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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적진을 치라 (삿 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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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진을 치라 (삿 7:1-14)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없이 몇 주를 지나가다 보면 1등 당첨금이 1억불이 넘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복권 사는 열기가 갑자기 생깁니다. 평소에 복권을 잘 사지 않는 분들도 혹시나 하여 사기도 합니다. 그럴 때 어떤 분이 “하나님 이번 복권에 당첨이 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줄 알겠습니다”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들으실까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기도를 드렸다고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면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사실 그런 기도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본문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기드온이 드렸습니다. 

싸움에 나가라고 하니까 나름대로 확실한 증거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부탁을 합니다.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6:37)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양털만 물에 젖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확신이 안 생깁니다. 너무 쉬운 부탁을 했나 하여 두 번째 구합니다.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6:39) 이번에도 하나님은 그 부탁을 들어주셨습니다. 

기드온의 행동은 믿음의 행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여줍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성도들이 이왕이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되고 하나님 뜻대로 행하시면서 하나님의 크신 역사에 동참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보시기에 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7년 동안 백성들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는데 이번에는 미디안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미디안뿐 아니라 아말렉과 동방 사람까지 가세함으로 이스라엘의 괴로움은 어느 때보다 극심하였습니다. 그들이 올라와 토지소산을 멸하며 이스라엘에 식물을 남기지 않으며 무수한 사람과 약대를 가지고 올라와서 이스라엘 땅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피해 산으로 가서 구멍과 굴과 산성을 만들이 피신하고 적들이 ‘메뚜기 같이’왔다고 묘사하는 것은 예언서에서 ‘여호와의 심판의 날’을 연상시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사로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너무 많은즉”(7:2) 

기드온이 자기 집에 있던 바알의 단을 허물며 성령에 충만하여 이스라엘을 모으매 그들이 미디안과 싸우고자 미디안의 진 맞은편에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상식과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미디안을 대적하기 위하여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총동원해도 시원찮을 판에 기껏 싸움에 나가겠다고 자원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들어 돌려보냅니다. 기드온이 모집한 사람들의 선발 기준은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와도 좋다면서 가능하면 많이 뽑으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미디안의 십만이 넘는 대군과 싸우자면 더 모여야 하는데 하며 기드온은 삼만 이천 명도 오히려 작다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삼만 이천 명이 너무 많다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은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입니다. 신명기 8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하신 일들을 잊고 모든 것들을 자신들의 공로로 돌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경고하며 그럴 경우에 그들이 망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신 8:17-20). 여호와의 관심은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에도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에게 섬겨야 할 신이 누구인지를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우상 숭배에서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우선 목적입니다. 이런 여호와의 참 뜻을 기드온은 많은 군대 수의 모집과 양털 시험 등으로 자꾸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걱정하시는 것은 이 백성들이 승리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스스로에게 돌릴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숫자를 줄이게 하십니다. 민수기 20장에서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치면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마치 자기가 기적을 일으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것처럼 교만한 모습을 보이다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다윗이 잠시 교만하여져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인구조사를 했다가 애꿎은 백성들이 칠만 명이나 죽는 대가를 치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가 세 번 기도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은 사역하면서 자기가 너무 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이 그 가시를 주셨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바울은 비록 자기 몸에 여전히 그 가시가 있었지만 자기를 계속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도리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벧전 5:5,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내가 무엇을 좀 한 것을 인하여 아는 것을 인하여 가진 것을 인하여 교만하지 말고 자기를 낮추어 육신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을 본받으며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문제점을 지적하신 후에 해결책을 제시하십니다.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 떠나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진 친 곳은 ‘하롯샘 곁’인데 하롯은 ‘두려움’이라는 뜻으로 기드온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두려움의 샘’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을 돌려보냅니다. 이것은 신명기에서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신 20:8)라고 한 율법 정신을 반영한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자들로 인해 남아있는 자들의 사기까지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칠년 동안 미디안에게 철저히 눌려 지냈습니다. 감히 그들과 대항하여 싸울 생각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기드온이 모이라고 해서 왔지만 우리가 그들을 이길 수 있을 까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이만 이천 명이 돌아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미디안의 군대에 비하여 숫적 열세인데 삼분의 이가 돌아갔으니 기드온은 적지 않게 놀랐을 것입니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죽으면 죽으리이다 담대하게 나갔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담대해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금신상에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거절하다가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지게 될 위험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왕 앞에서 담대히 자신들의 입장을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즉 우리가 불에 타죽는 다할지라도 우리는 우상들에게 절하지 않겠습니다. 담대히 선언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담대함’이란 단어에는 ‘현재의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정적인 사람, 소극적인 사람, 현재의 상황을 이유로 핑계만 대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담대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아직도 많으니”(7:4)

이제 기드온은 남은 일만 명을 데리고 싸우러 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또 막으십니다. 아직도 많으니 남은 만 명을 물가로 데려가라고 하십니다. 만 명이라는 숫자는 누구의 힘에 의해 승리가 이루어지는지 판단하기 애매한 숫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군대의 믿음 뿐 아니라 그들을 이끌고 갈 기드온의 믿음을 test 하고 계십니다. 가나안의 낮은 뜨겁습니다. 얼마나 목이 마르겠습니까? 물가로 가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얼굴을 물에 대고 정신없이 물을 마십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손으로 물을 떠서 혀로 핥아먹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개가 핥는 것처럼 그 혀로 물을 핥는 자를 따로 세우고 다른 사람들은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왜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자는 싸움에 적합지 않다고 하십니까? 자세로 본다면 얼굴을 물에 박고 먹는 자는 물을 마시느라고 주변 상황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손으로 물을 떠서 혀로 핥는 자들은 마시는 동안에도 주변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설명은 9700명은 무릎을 꿇고 마셨고, 300명은 혀로 핥았는데 하나님은 적은 쪽을 택하셨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왜 삼백 명을 택하였는지 성경은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입에 대고 핥아먹은 자 300명을 구별하여 세우셨다는 점입니다.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7:9) 

여호와께서 군사를 300명으로 줄이심으로써 전쟁 준비를 끝낸 기드온에게 적진을 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해 역사하심을 분명히 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하나님의 전투개시명령에도 불구하고 적진을 향해 나아가지 못합니다. 300명으로 십만 대군을 상대하여 싸워야 합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기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신 것은 인정하지만 이스라엘 한 사람이 미디안 군대 333명씩을 물리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자 두려워합니다. 말씀을 듣고도 내려가기를 주저하자 하나님은 부하인 부라를 데리고 그 진으로 내려가서 미디안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기드온은 부라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대로 미디안 진으로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곳에 그가 본 것은 메뚜기떼 같은 사람들과 모래알같이 많은 약대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기드온은 사람들을 돌려보낸 것을 후회했을지 모릅니다. 적의 진영에 내려가 둘러보는데 마침 어떤 미디안의 병사가 자기가 꾼 꿈을 자기 친구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더라. 

옆에 있던 친구가 그 꿈을 해석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어. 우리가 그와 더불어 싸우면 죽을 거야. 그들의 대화는 미디안 군사들이 지금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소심한 기드온을 위하여 이렇게까지 배려하셨습니다. 기드온은 꿈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 이스라엘이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경배를 드립니다. 

전쟁에 승리하는 비결 중의 하나가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기가 떨어지면 아무리 많은 병력과 무기가 있어도 싸움에 이기지 못합니다. 넓은 골짜기를 다니는데 하필이면 미디안 군사가 꿈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고 그 이야기가 불안에 빠진 미디안을 물리치는 기드온 군대에 관한 것입니다. 우연인 것 같지만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그런 말을 기드온으로 하여금 듣게 하셨고 이로 인하여 기드온은 마음을 담대히 하고 싸움에 나갈 각오를 새로이 합니다. 기드온은 진중에 돌아와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느니라”고 합니다. 비로소 기드온은 두려움 속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전쟁을 치를 준비를 마칩니다. 믿음의 갈등이 끝났습니다.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는 믿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갑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1)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과 미디안 모두에게 여호와의 능력과 그분만이 진정한 예배의 대상임을 알리려고 하십니다. 이것은 이해하는데 기드온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기드온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한다면 그들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여호와와 멀어져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묵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무엇 때문에 가나안에 왔는지 알지 못하고 그저 가나안의 풍요로움에 빠져 허우적거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나안을 허락하시는 것은 이스라엘만 그 땅에서 단지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가나안족속과의 싸움은 죄와의 싸움이요 가나안을 하나님의 구별하시는 거룩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싸움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전쟁의 성격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1절에서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부름으로써 이 전쟁은 단순히 미디안과의 전쟁이 아닌 바알과의 전쟁임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싸우시는 전쟁이라는 말입니다. 이 전쟁을 통해 여호와만이 참 신이시며 그분만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능력이 있는 분이심을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기드온은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는데 어려움을 나타냅니다. 양털 시험에서도 주관적이고 독단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진노하시지 않고 요청을 들어주십니다. 군대의 수를 줄인 후에도 기드온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고 그들에게 여호와를 다시 알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복 받고 살게 하려 하십니다. 그들이 계속 우상을 섬길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저주와 고통뿐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은혜와 인애와 자비와 인내심 등 그분의 많은 속성들이 본문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어떻게 다루셨습니까? 기드온하면 300명의 용사와 더불어 10만의 미디안 연합군을 물리친 영웅으로 떠울리지만, 사사기 6장과 7장에 나타난 기드온은 어떻습니까? 와! 정말로 기드온 믿음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까? 아닙니다. 그는 미디안 사람들이 두려워 포도주 틀에 숨어 밀을 타작하던 겁쟁이입니다. 사명을 주셔도 의심과 두려움 속에 계속해서 주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연약한 자를 큰 용사라고 부르시며 비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바위 위에 있던 제물을 불로 태우는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드온의 불신앙, 주저함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을 용납하시고 참으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대단하다고 여겨집니다. 은혜로 기드온을 부르시고 당신의 뜻대로 기드온을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 얼마나 저희들에게 위로를 주는지 모릅니다. 기드온은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이니까 그렇지 나 같은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기드온과 같은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너무도 귀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도 저희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저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주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합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렸기에 이스라엘은 자신이 가진 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을 의지하고 겸손하게 그분만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없이도 당신의 뜻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려고 할 때 우리를 기뻐하시고 변화시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능력을 주십니다. 미디안 군사가 기드온을 언급할 때 보리떡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보리떡은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음식입니다. 그 순간 기드온은 자기를 보게 됩니다. 기드온도 자신을 별 볼일 없는 보리떡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미디안은 그를 하나님의 칼날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보리떡 같은 기드온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안 돼 하며 계속 주저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자신이 보리떡 같은 존재임이 깨달아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사용하신다는 확신이 올 때 우리는 감격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역사는 대부분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숫자가 많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대단하다고 반드시 하나님이 쓰는 것은 아닙니다. 요즈음처럼 성공지향적인 세대에서 크고 많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있는 사람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성별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두려워 떠는 다수”를 통하여 역사하시기보다 헌신된 소수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능력 있는 사람들은 교만해지기 쉬우며 두려워서 떠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사기조차 꺾어놓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요 공중 권세 잡은 마귀와의 영적인 싸움입니다.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환경을 초월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에 의지할 때 영적인 능력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습니다. 기드온과 그 삼백 용사가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삼백 명으로 십만 대군을 무찔렀습니다. 그것도 항아리와 나팔과 횃불을 가지고 막강한 미디안의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우리의 싸움도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고 그의 때를 기다리며 그의 방법을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만을 의존하고 신뢰하기 원하십니다. 숫자로만 세상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비밀된 힘을 보여줄 때 세상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그저 숫자나 늘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알지 못하는 신비스런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우리의 부족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능력의 지극하게 큰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고후 4:7).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대는 악한 세대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리는 세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한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담대함을 가지고 영적인 능력과 더불어 헌신된 정예용사가 되어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이 예비하신 상급을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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