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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 2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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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 26:36-46)

4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살펴보면,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려 죽어주신 십자가 사건이며, 그리고 무덤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것과 그리고 병자들을 고치신 치유와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며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면밀히 4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행적을 살필 때 예수님이 가장 많이 하시고 또 가르치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의 처음을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광야로 가셔서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역의 모든 과정 속에 기도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중요한 일을 하실 때는 반드시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밤새워 기도하시고 난후 제자들을 선택하셨고, 인류구속을 위한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전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일생은 한마디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과 기도는 정말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해야 할 때가 임박하셨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최후를 하나님의 뜻대로 맞이하기 위해 산에 오르신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하신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인간적인 심한 고민과 슬픔이 찾아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7절에 보시면 “고민하고 슬퍼하사”라고 하셨고, 38절에는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 예수님의 순수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쉽게 받아들이신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다시 부활할 것인데 ‘까짓것’ 하고 가볍게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고민하며 고통스럽게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고민된 문제들을 안고 계십니까?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솔직히 털어놓고 기도해 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신데 감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솔직히 아뢰고 도움을 청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기도에서 배워야 할 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36-37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 입구쯤에 앉아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좀 더 높은 곳인 중턱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38절에서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가신 이유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아마 주님은 좀 더 조용한 곳에서 깊이 기도하시기 위해 대부분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곳에 머물게 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들도 정말 중요한 문제를 두고 기도하기를 원하거나 아주 중요한 문제에 부딪히게 될 때, 조용히 홀로 있는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대부분의 제자들을 그곳에 남겨 놓으신 듯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올라 가신 분명한 한 가지 이유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이들을 데리고 가실 때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왜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까? 십자가에서 당하게 될 육체적 고통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십자가에서 겪게 될 육체적 고통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게 될 것을 아십니다. 특히 제자들마저도 주님께 등을 돌릴 것에 대해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수제자인 베드로는 자신을 저주하며 3번이나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오늘 밤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실 때, 베드로가 그 말을 받아서 말하기를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베드로의 이 고백은 예수님에 대하여 온전히 신뢰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제자들이 다 배반하며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아신 주님은 베드로를 데리고 가서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깨어 있으라’고 부탁 받은 제자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본문 40절에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43절에도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기도를 하시다가 중단하시고 내려와 보시니 제자들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신이 약하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저 깨어 있기를 원하셨습니까? 깨어 있으라는 말은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문제앞에서 같이 기도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까? 단지, "한 시 동안", 잠시 동안 깨어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예수님의 기도와 연합하는 특권을 잠으로 잃어 버렸습니다. 피곤하고 약하다는 생각으로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영적으로 중요한 일에 소외당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자로서 부름 받은 소명감도, 부름 받은 감격과 감동도, 감사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특별히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신 부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감동도 없이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잠든 베드로와 제자들을 깨우시며 경고를 하십니다. 

41절을 보세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 안하면 시험에 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 안하면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시험을 들게 되지만, 기도하면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찾아오는 시험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작은 시험에도 잘 넘어집니까? 그 시험이 문제가 아니라 그 시험을 견디어 낼 영성이 없는 것입니다. 왜요? 기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평상시 기도해야 합니다. 평안할 때 기도해야 하고 건강할 때 기도해야 합니다. 일이 닥치고 나서 기도하는 것은 하수고 일이 닥치기 전에 기도하는 사람이 고수입니다. 

주님은 앞으로 닥칠 시험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아시기에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그것도 한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세 번씩 간절히 기도합니다. 온몸에 땀이 뒤범벅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핏방울이 떨어지듯이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은 그 기도에서 응답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뭔지를 알았고 그것을 감당하기로 결단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겟세마네기도 후 십자가를 당당하게 지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을 때는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기도 후에는 당당하게 일어서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선포하십니다. 45-46절을 보세요.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 말씀을 보시면 주님은 참으로 당당하게 고난을 맞이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십니다. 절대로 도망가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지 못한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도망쳤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엄청난 시험에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항상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무너질 때, 실패할 때, 절망할 때가 언제입니까? 시험에 들 때입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시험에 들 때가 많습니다. 시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시험이 다가온다고 해서 누구나 다 시험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시험에 들지만, 또 어떤 사람은 시험을 이깁니다.  

우리의 경우에도 어떤 때는 시험을 이기지만 또 어떤 때는 시험에 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무슨 일로든 시험에 들었다면, 그것은 내가 영적으로 잠든 상태에서 기도생활을 등한히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우리는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지 않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요즘,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기도의 목적을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기도가 단지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삶의 필요를 공급 받기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기도하는 목적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기도의 목적은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고 이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 마귀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마귀의 시험에 넘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았다가 큰 시험에 빠졌던 자신의 실수를 돌아보면서 성도들에게 이같이 권면하였습니다. 벧전 4: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자다가 깰 때입니다. 이 시기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때입니다. 세상이 악할 뿐 아니라 교회에도 세속의 물결이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마귀의 시험에 넘어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땅에 거하시면서 문제만 생기면 겟세마네로 가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는 것을 습관을 좇아 가셨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눅 22;39절에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라고 했습니다.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기도하시는 것이 습관이었습니다. 늘 그 곳에 가셔서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해결책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문제 십자가 문제도 이곳에서 해결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문제 인류 구원의 문제를 이곳에서 해결하셨습니다. 

삭개오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돈은 많았으나 백성들에게 매국노로 소외를 당하고 사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였습니다. 인생 문제를 해결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키가 작은 삭개오는 사람들이 많아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뽕나무위로 올라갔습니다. 지나가시던 예수님은 자기를 그렇게 간절히 사모하는 삭개오를 보시면서 그를 만나 주시고, 그 집에 가셔서 하룻밤을 지내셨습니다. 그 밤은 삭개오의 인생이 바뀐 구원의 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삭개오는 인생의 문제만 생기면 뽕나무로 가서 뽕나무를 붙들고 예수님을 생각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는 여러분들만의 겟세마네 동산이 있습니까? 문제만 생기면 가고 싶어지는 곳이 있습니까? 외롭고 힘들고 아프면 찾는 곳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의 겟세마네 동산은 바로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 자리가 바로 여러분이 엎드리는 기도의 자리가 되셔서 모든 문제와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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