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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밤중에 부르는 희망의 노래 (욥 3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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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에 부르는 희망의 노래 (욥 35:10-11)


I. 밤중에 부르는 노래

청소년 시절 얼굴에 나는 노란 염증을 여드름이라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얼굴이 깨끗한데 저희들 청소년 시기에는 얼굴에 여드름이라는 게 참 많이 났습니다. 저도 얼굴에 여드름이 났는데 한 선배가 얼굴에 여드름이 나오면 애인이 나타날 징조랍니다. 얼마나 반가운지 여드름을 만지기 시작했지요. 이왕 나타나려면 퀸카가 나타나라. 그래서 여드름이 커지면 퀸카, 킹카가 나타나는 줄 알고 만지작거렸습니다. 때묻은 손으로 여드름을 만지작거렸으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예 여드름이 사탕만하게 부풀어올랐습니다. 얼마나 보기도 흉하고 아팠던지 크레오파트라도 싫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른들이 “긁어서 부스럼 만들었구나”하고 나무라십니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기는 합니다만 이 여드름은 만지작거리면 점점 더 커지고 흉해 진다는 겁니다. 그저 아침 저녁으로 깨끗하게 씻는게 제일 좋습니다.

인생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끌어안고 만지작거리면 문제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커져갈 뿐입니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송으로 씻어내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밤중에 부르는 희망의 노래」 입니다.  

고난 가운데 문제를 안고 그 문제를 키워 가는 사람이 있고, 고난 중에 노래하고 찬송하며 문제를 녹여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향한 한 별명이 있다고 하면 환란의 밤중에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이미 은퇴한 PGA 골프 선수중에 아프리카 짐바브웨 출신 

닉 프라이스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이 선수는 슬럼프가 없는 선수로 유명한데 한 기자가 그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프라이스 선수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제가 어릴때 우리 아버지께서 어려움이 있을 때는 휘파람으로 노래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난 게임이 풀리지 않을 때는 휘파람으로 즐거운 노래를 부릅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어디에 갖다 놔도 원망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은 어디에 갖다 놔도 감사하며 삽니다. 모든 사람이 인생의 밤을 한탄하는 그 시간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그 밤에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17세기, 30년동안 유럽대륙을 초토화시켰던 “30년 전쟁”이라고 하는 무서운 전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절망하며 낙심에 빠져 살았을 것 같은데 놀라운 사실은 그와 같이 무서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많은 노래가 만들어지고 불리워졌다는 것입니다.

환켄 나우어라고 하는 음악가가 이 당시에 불려졌던 노래들을 수집해 보았더니 32,000곡의 주옥같은 노래들이 있더랍니다. 후에 웨첼이라고 하는 음악가가 다시 수집을 했더니 55,000곡이 되더라는 거지요.

30년 간의 전쟁을 통하여 평화스러울 때 부르지 못하던 찬송이 성도들의 입을 통하여 샘솟듯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가운데 노래할 수 있다. 환란 가운데 찬송하며 살아간다.”

깊은 밤중에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 

깊은 밤과 희망의 노래! 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이처럼 어울릴 수 없는 양극단의 조화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참맛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노래로 시작하여 노래로 끝이 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시작된 천군 천사들의 축하찬송과 목자들의 노래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의 대합창으로 끝이 납니다. 

기독교는 생일날에도 노래하지만 장례식장에서도 노래를 합니다. 신앙 안에서는 빛 가운데 기쁜 찬송이 있고 어둠 가운데서도 심금을 울리는 애절한 찬송이 있습니다. 신앙인! 그는 「밤중에도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한소망교회와 함께 걸어왔던 지난 22년을 뒤돌아보면 그때마다 우리에게 주신 노래가 있었습니다. 
막 교회개척을 시작하고 도와줄 손길이 없어 밤낮 외로움에 울고 다녔습니다. 
이 무렵 입만 열면 터져 나온 노래가 「♪ 주님여 이 손을 꼭잡고 가소서」하는 노래였습니다. 

능곡 지하 예배당에선 전혀 교회가 성장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 문득문득 힘이 빠졌습니다. 이때 밤낮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나의 등뒤에서 ... 일어나 걸어라」하는 노래입니다. 

은혜의 동산에서 불렀던 ♪난 예수가 좋다오  ♪내가 원하는 한 가지 ....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 이 모두가 밤중에 우리가 불렀던 희망의 노래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나만이 이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고통의 무게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 무겁게 느껴진단 말입니다. 금년 특밤 주제가 바로 「밤중에 부르는 희망의 노래」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고난의 밤이라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이때 우리는 희망을 노래할 것입니다. 주 안에서 희망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보내주신 강사님들과 함께 희망을 보게 될 것입니다. 

II. 고난의 종류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당신을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까? 직장을 잃은 분이 있습니까? 사업이 잘 안되어 당신의 가슴을 태우고 있습니까? 남편 문제로 인하여 가슴에 멍이 들어 있습니까? 자식 문제로 인하여 엉클어진 머리를 붙잡고 눈물 흘리는 분들이 있습니까? 가족 간에 종교적 갈등으로 인하여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직장에 대한 환멸과 불만 때문에 괴로워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고난의 밤이 찾아 온 것입니다.

사실  고난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우선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이 고난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려고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의 원인이 내게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돌이켜 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둘째, 에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유 없는 고난에 부딪힐 때 자못 당황하게 됩니다. 가령 이웃사람의 부주의로 불이 나서 우리 집까지 그 피해가 미칠 수 있습니다. 혹 나는 차선을 지키고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는데 뒤에 오던 자동차가 잘못하여 내 차를 받아버리므로 본의 아니게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이때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비록 인간 편에서 볼 때에는 불합리한 고난으로 보일찌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틀림없이 고난의 이유가 있다고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셋째는 선을 이루기 위한 자원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문제는 본문에서 욥이 당한 고난은 이상의 일반적인 고난의 특성과 전혀 다른 성격을 지녔다는데에 있습니다. 욥이 당한 고난은 제4의 고난입니다. 우선 욥의 고난은 의인의 고난이요 철저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 당한 고난입니다. 
그렇다고 자원하는 고난도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욥은 끝까지 내가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욥이 당한 제4의 고난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총체적, 종합적 고난이었습니다.

III. 욥이 당한 고난의 종류

자! 그러면 욥이 과연 어떤 고난을 당했나 한번 살펴 봅시다. 

첫째, 재산을 잃은 고난입니다.

피땀 흘려 모은 재산, 안 입고 안 먹고 안 써서 모은 그 재산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평생토록 애써서 모아놓은 재산을 하루아침에 빼앗기고 거지가 될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욥은 큰 부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됩니다. 
무슨 대단한 잘못도 없이 재산을 약탈당합니다.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두 번째는 자식으로 인한 고난입니다.

재물이 아무리 귀해도 자식에 비할 바는 못되지요. 화목하게 지내던 십 남매가 큰아들 집에서 잔치를 하다 집이 무너져 모두다 죽었습니다. 세상에 또 이런 고통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당하는 고통보다 더 한층 뼈아픈 고통이 자식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세 번째, 사랑하던 아내와 모든 친구들이 욥을 저주하고 떠나버립니다.

여러분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이해 받지 못하는 고통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이것도 큰 고난입니다.

이에 더하여 건강까지 잃어버렸습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종기가 나서 이것을 기왓장으로 긁고 잿더미에 뒹굴며 몸부림합니다. 이 얼마나 처참한 모습입니까?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욥은 고난의 이유도, 그 의미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괴롭습니다. “어머니! 왜 나를 낳았습니까? 왜 나에게 젖을 먹였습니까?” 이처럼 자기 생을 한탄합니다. 

그때 옆에서 이와 같은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젊은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엘리후입니다. 계속 듣기만 하던 그는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부분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IV. 엘리후가 말하는 하나님 ①

본문에서 엘리후가 발견한 귀중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고난의 밤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고 성숙시키는 지혜라는 것입니다. 
자연계에 밤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지혜입니다. 꽃은 아침에 피어나기 위해 밤에 준비를 합니다. 아름다운 봉오리가 이슬을 머금고 입을 벌려 피어나기 위해서는 어두운 밤동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밤이 없다면 꽃은 피지 못할 것입니다.

인생의 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밤 동안 인간에게 꽃을 피울 준비를 시키십니다. 만일 고난이 없다면 인생의 꽃은 피지 못하고 신앙의 열매는 영글지 못한 채 시들고 말 것입니다.

시인 테니슨은 그의 시집 「용광로」에서 우리의 신앙과 인격을 용광로에서 녹아지는 쇠붙이에 비유했습니다. 쇠붙이를 벌겋게 용광로속에 달구어서 원하는 형태로 두둘겨 찬물에 담급니다.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는 다시 달구고 두들겨 원하는 형태로 기어이 만들어 냅니다.

성경속에서 하나님의 손에 바로 쓰임을 받은 인물치고 인생의 밤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이 좋다고 하는 분들을 가만히 보면 대개가 밤을 통과하신 분들입니다. 인간은 밤을 통과하지 않고 온전히 만들어지지 아니하는 고약한 기질이 있는 모양입니다. 이는 마치 채광석이 용광로에 들어가지 않고는 순금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밤을 중요하게 다루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찌라도 고난의 용광로 속에 던지길 주저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목적에 합당한 존재로 만들기 위하여 밤이라는 용광로를 사용하십니다. 광부는 불순물이 잔뜩 섞여있는 채광석을 용광로 속에 던지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왜요? 광부의 관심은 불순물에 있지 않고 잠시후에 흘러내릴 순금에 있기 때문입니다. 

V. 엘리후가 발견한 하나님 ② Climax

욥의 사건을 통하여 엘리후가 우리에게 소개해 준 하나님의 독특한 성품이 있습니다. 그분은 밤을 허락하시는 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밤중에 노래하게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노래를 주시된 희망의 노래를 주십니다. 

고난만 허락하는 잔인한 하나님이 아니란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밤중에 기도와 희망의 찬양을 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밤중에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 
이 얼마나 멋진 사람들입니까?

밤중에 부르는 노래는 낮에 부르는 노래와는 다릅니다. 만물은 고요 속에서 침묵하며,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칠흑 같은 어두움. 그리고 나에게 남은 것은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또 하나 남은 것이 있다면 처절한 실패와 눈물뿐입니다. 이 속에서 무덤 같은 침묵을 깨고 감사와 감격의 눈물로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욥이, 엘리후가 발견한 하나님이었고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만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커피를 보면 생각나는 사건이 제게 있습니다. 
공군장교시절 대전 세광교회에서 아동부 전도사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땐 제 위장이 안좋아 교회 조집사님이란 분이 조내과 원장님으로 계셨는데 조집사님의 조언인즉 찬음식을 먹지 말고 커피를 먹지말라 하셨습니다. 교사회의 시간 커피를 한잔씩 나누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이드신 오장로님이 제게 먼저 커피를 권합니다.

제가 하는 말 “조내과 집사님이 제 몸에 커피가 나쁘다고 마시지 말라네요.” 그때 오장로님 왈 “에이. 조집사님이 몰라서 그래요. 그게 몸에 나쁘면 미국 사람들이 먹겠어요?” 
그 말에 온 교사들이 껄껄대고 웃었습니다.

1등 국민이라고 미국 사람을 그토록 신뢰하던 오 장로님이 생각납니다. 
하물며 우리는 하나님을 그만큼이라도 신뢰하는가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건인데? 

어떤 이는 아이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낙심하고. 혹은 교회 온 사이에 도둑맞았다고 신앙을 버리고. 혹은 예배당에 왔다가 핸드백 하나 잃어버리고 낙심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교회에 등록했더니 세탁기가 고장이 났다고 신앙을 버립니다. 
여러분, 지금 비록 나쁜 밤을 보내고 있어도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심을 믿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기도를 드리고 희망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밤중에 희망을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 지금 제가 밤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가 너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께서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주여, 풀무가 뜨거울수록 순금이 나옴을 믿습니다.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할렐루야!

어떤 성도 한 분이 관절염에 걸려 외출을 못하고 고용간호사의 간호를 받으며 집안에서 꼼짝없이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심심도 하고 해서 후라이팬으로 요리를 만들다 하나도 먹지 못하고 다 태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래된 찌꺼기와 엉겨붙은 찌꺼기들을 세척제로 닦아도 닦아지질 않았습니다. 그때 간호사가 달려오더니 “음식 찌꺼기가 그대로 눌러 붙었군요. 이건 비누로는 안돼요.” 그리고는 후라이팬을 불에 빨갛게 달구었습니다. 그러니까 음식 찌꺼기들이 깨끗이 떨어져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성도는 “그렇다. 내가 관절염에 걸렸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불로 달구어 내야지” 하는 순간 눈물이 쏟아지며 회개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어 성령충만한 찬송이 입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덧 고통의 관절염도 녹아졌습니다.

VI. 밤중에 부르는 노래

우리 성도들이 밤중에 부르는 노래는 어떤 노래입니까?

1. 첫째, 성도는 환란을 통해 하나님을 더 가까이서 만난 행복의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세상의 고난이나 환란으로부터 면죄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동행을 경험하게 됩니다.

구약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이유 때문에 풀무불 속에 집어 던져집니다. 왜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풀무불 속에 던져지도록 내버려 두었는지 그리고 풀무불 속에 들어가는 젊은이들을 왜 건져주지 않았는지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풀무불 속에 세 사람만 던져놓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풀무불 속에 네 사람이 빙글 빙글 불속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불같은 시험을 만나서 우리가 던져질 때에 하나님이 왜 나를 고난에서 면죄시켜 주지 않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알 길이 없으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불같은 시험 가운데 나 혼자 버려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전능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능력 있는 아버지가 여러분의 고난의 현장에 함께 계셔 여러분을 지켜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할렐루야.

밤중에 성도가 부르는 또 다른 찬송의 주제가 있습니다.

2. 둘째, 환란 가운데서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치료하는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가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라고 하는 사제가 쓴 유명한 책  「The wounded healer.  상처받은 치유자」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복음서를 따라 예수님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는데 그 분은 상처받은 분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뭇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았고 제자들의 배신으로부터 상처를 받았고 가족들로부터 거절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상처를 받았으며 살이 찢겨지는 상처를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커다란 상처를 받았습니다. 짤막한 인생을 살았던 예수! 그분은 상처의 사나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받았던 상처 때문에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았고 불평하지 않았고 자학하지 않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치유하시는 분이 되었습니다. 온 인류의 상처를 홀로 체험하신 그 분이 온 인류의 상처를 치유하는 위대한 치유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상처가 사명이 되고 능력이 되는 은혜입니다. 
어릴때 몹시도 가난하게 살아오셨던 분이 계십니까? 
거기에 여러분의 사명이 있습니다. 
질병의 고통 가운데 놓임을 받으신 분이 계십니까?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치유하라고 하는 사명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3. 셋째 성도들이 밤중에 부르는 노래의 주제가 또 있습니다. 

고난의 밤중에 내영혼이 맑아지는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이 만사형통 할 때에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살아갈 것 같은데 그러지가 못합니다. 여러분,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꽃 한 송이를 꺾어 들을 때 노래가 절로 나올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잘먹고 잘사는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도 감사와 찬송대신 자만의 거드름을 피우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공과 행복이 마치 자기가 잘나 만들어 진 것으로 착각하고 자랑합니다. 평탄한 페이브먼트를 달려가게 될 때에 한없이 노래하며 살아갈 것 같은데 인생이 그러지를 못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 보라 나는 얼마나 위대한가? 자기를 우상화시키기를 시작합니다. 자기를 과시하기 시작합니다. 허영을 부풀려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만, 거만, 자만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란을 경험하고 고통을 경험하면서 비로서 인생은 진실을 겪게 됩니다. 자기가 부셔지기 시작합니다. 자기라는 우상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 혹독한 삶의 시련, 삶의 체험 속에서 별것 아닌 나의 진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피조물이다. 흙으로부터 온 인생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을, 티끌 같은 인생 티끌 붙들고 살아갈 존재가 아닌 것을!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영혼이 맑아지고 깨끗해진 것이지요.

VII.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이 극심하던 때 일입니다. 

버스를 타더라도 앞 자리는 백인들만 앉을 수 있었고 흑인들은 앞자리가 비어 있어도 뒷자리에 혹은 서서 가야 했습니다. 몽고메리시에서 늦은 밤 공장에서 지치도록 일을 하고 돌아오는 흑인 한 소녀가 너무나 피곤하여 비어 있는 백인 자리에 잠시 앉아 잠이 들었다 봉변을 당합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흑인인권운동이 일어납니다. 이 운동의 지도자는 여기 몽고메리시에서 목회를 하던 마틴루터 킹 목사였습니다. 폭동으로 번져가는 분노한 사람들을 달래며 이 운동을 이끌어 갑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자. 
태양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때도 구름건너 태양이 존재하듯 
비록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지 않을 때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자.

나는 꿈을 꾸노라. 미국이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흑인들이 백인들의 손을 잡고 이 나라를 섬길 그 날을 꿈꾸노라. 

마틴 루터 킹과 함께 백만군중이 어깨동무, 손에 손을 잡고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We Shall Overcome」이라는 노래입니다.

We shall overcome We shall overcome  
We shall overcome some day 
Oh,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 day

We'll walk hand in hand We'll walk hand in hand   
We'll walk hand in hand some day 
Oh,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 day   

We are not afraid We are not afraid   
We are not afraid some day 
Oh,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 day  

We are not alone We are not alone  
We are not alone some day   
Oh,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 day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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