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행복을 주는 사람, 바나바! (행 4:32-37)

첨부 1


행복을 주는 사람, 바나바! (행 4:32-37)


어떤 그릇이나 물건들은 약간 어두워야 멋이 있습니다.  너무 밝으면 이그러진 모습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땅 속 깊이 감추어진 신비의 동굴은 빛을 받아야 그 태고의 신비가 드러나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감탄을 일으키게 합니다.  어둠 속에서는 그 아름다움이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와야만 아름다워지는 사람들입니다.  아담 이후로 타락한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없이는 결코 한 점의 아름다움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춰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지혜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리석을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앞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자는 말은 인간의 방법이나 수단을 의지하지 말자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꾸만 자신의 방법과 수단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과 수단은 점점 자기 중심적으로 교묘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에는 그 어디에도 방법이나 수단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교묘하게 행동하거나, 환경의 변화에 약삭빠르게 적응하기 위해 바람개비처럼 방향을 바꾸거나, 남이 알지 못하도록 자신을 회칠하라는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방법이란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기질을 모방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방법과 수단을 품지 말고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연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사람의 지혜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동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변치 말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변치 말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내 삶을 통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어디에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거룩한 영적 파장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영적 파장은 하나님께서 나약한 인간들에게 바라시는 핵심적인 요구입니다.  내 영혼에 거룩한 영적 파장이 일어나면 살 길이 있습니다.  이 땅에 하늘의 거룩한 영적 파장이 일어나면 살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 안에 하늘의 이 거룩한 영적 파장이 일어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영적 파장은 모든 가정들에게 필요합니다.  방황하는 청소년에게 필요합니다.  삶의 가치관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수 있는 성령의 거룩한 영적 파장을 사모하셔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는 권능의 무리들이 나타나야 할 때입니다.  하늘의 크고 영화로운 일을 위해 거룩한 영적 파장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늘의 거룩한 영적 파장은 사람의 성품도, 기질도, 팔자도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이 영적 파장은 한 개인의 인생을 바꾸고, 집안을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작은 돌멩이를 잔잔한 호수에 던지면 동심원의 파도가 생깁니다.  그러나 큰 바위를 들어서 던지면 그 작은 동심원은 큰 바위가 만드는 큰 동심원의 물결 앞에 다 없어지고 맙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영적 파장이 일어나고 있다면 세상과 사탄이 던지는 모든 파장은 다 흡수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는 거룩한 영적 파장이 내게 있어야 합니다.  삶의 선택의 기준에 무너짐이 있거나 흔들림이 있던 사람들은 오늘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다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믿음은 그 믿음의 파장이 말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붙들고 쓰시는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그 파장이 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제일 큰 기대와 소원이 어디에 있을까요?  믿음의 파장이 있는 교회입니다.  믿음의 파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땅의 소망은 교회 밖에 없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이 땅에 거룩한 영적 파장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타락한 세상적인 파장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영적 파장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남들보다 더 잘 믿는 것 같은데 가만히 보면 자신의 파장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우리가 기도를 하지만 바리새인들만큼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고 하지만 바리새인들만큼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이 있을까요?  오늘날로 말하자면 그들은 가장 기독교적인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자부를 했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는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달라고 목숨을 걸고 기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했을 때 목숨을 걸고 거부했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 그들은 한 마디로 인류 역사상 가장 헷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땅의 교회에는 헷갈리는 사람들이 없을까요?  아니 우리들 가운데는 헷갈리는 사람들이 없을까요?  소위 나름대로 자칭 예수를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그리스도인들, 그렇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영적 파장이 아니라 자신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바리새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사하고 믿는 믿음의 성도들에게서도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는 헷갈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말하지만 위에서 부어주시는 참된 은혜가 아니라 자기 감정이 느끼는 은혜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삶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감화와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 감정에 충실한 자기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자기 기분을 전염시키는 자기 파장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고 영혼을 구원하는 거룩한 영적 파장을 사모하십시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볼 때 그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요즘 제가 좋아하는 노래 가운데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우리 가는 길에 아침 햇살 비추면 행복하다고 말해 주겠네.
이리 저리 둘러봐도 제일 좋은 건 그대와 함께 있는 것.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아무리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함께 가고 싶은 사람, 당신이 나와 함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해 주고 싶은 사람, 당신은 나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고 말해 주고 싶은 사람,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그런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나바라는 사람입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일에 크게 쓰임을 받았음에도 그가 한 일 만큼이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평 한 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배후에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그가 잘 되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주면서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다가 조용히 사라져간 사람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만약에 바나바가 없었다고 한다면 사도 바울도 없었을 것입니다.  13편의 방대한 바울 서신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나바라는 인물이 배후에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있었고, 13편의 바울 서신이 기록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가 없었다면 사도 바울의 위대한 선교의 업적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 바나바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서 바나바를 찾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모두가 바나바와 같이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나바와 같은 우리들 때문에 하나님이 행복해 하셨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나바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일 수가 있었습니까?

첫째로, 그는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시대에 그것을 초월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나바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36절 이하에 보면, 성도들이 교회 사역을 위해 자신의 밭을 팔아 헌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성령강림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 하나님께 바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 가운데 바나바도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밭을 팔아서 하나님께 헌납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시 예루살렘은 극심한 기근과 식민지 국가의 어려움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가난했으면서도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도들은 가난했지만 풍성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웃에 대한 헌신은 바나바가 영적 파장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나바라는 이름은 사도들이 지어준 이름이고 그의 본래 이름은 요셉입니다.  바나바는 유대인의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으로 구브로라고 하는 지중해에 있는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사도들이 자기의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헌신적으로 사는 요셉이라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그에게 붙여준 이름입니다.  '바나바', 이 말은 "격려의 아들", "위로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위로 받고, 그로 인하여 도움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멋진 별명을 붙여준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바나바라는 이름은 개인적인 이름이 아니라고 봅니다.  다른 사람을 살려주고, 삶의 용기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지치고 좌절감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사람은 누구든지 바나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거룩한 영적 파장 속에서 관심 있는 현상은 바나바의 헌신으로 바나바가 존경받고, 칭송 받는 것을 보고 "나도 저 바나바처럼 존경을 받아 보았으면……"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좋은 현상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영적 파장이 내 안에서만이 아니라 교회와 지역 사회로 퍼져나가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짝퉁 파장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룩한 영적 파장을 일으키는 것 같은데 실상은 자기 파장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그가 바로 다음 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밭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팔고 보니 너무나 아깝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그래서 반을 뚝 떼어서 감추어 두고 사도들에게는 전 재산인 것처럼 갖다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나도 바나바와 같이 존경을 받겠지?"  그러나 그들에게 온 결과는 존경과 명예가 아니라 비극적인 종말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헌신의 동기가 정말로 주님 앞에 드리고 싶어서였다기 보다는 바나바의 인기가 탐나서 드렸던 것입니다.  그들의 헌신에는 분명히 불순한 동기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시기로 말미암은 헌신이요, 과장된 헌신이요, 거짓된 헌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나바의 헌신과 짝퉁 헌신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바나바의 헌신은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헌신이 아니었습니다.  바나바는 내가 이만큼 헌신하고 이만큼 드렸으니 내가 교회 안에서 이만큼의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헌신은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헌신이었습니다.  자기 중심의 자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바나바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나니아와 같은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남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그래서 "야, 나도 저 사람을 닮아 보았으면 …"이라는 존경과 칭찬의 사람,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바나바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려지던 제물들을 기억하십니까?  주님 앞에 드려진 제물들은 피가 다 빠진 완전히 죽은 제물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날뛰며 살아 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드린 것은 모두 자아가 죽은 상태에서 중심이 갈라진 상태로 드려져야 온전한 제물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헌신은 이렇게 철저히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소위 헌신, 봉사, 헌금, 직분 등 교회의 활동이 자기 PR을 위한 동기로 사용되어지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 자신이 인정받으려는 동기, 체면의 동기, 이러한 동기가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바나바의 헌신은 우리에게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마치 옥합을 깨뜨린 여인같이, 초월적인 헌신을 하고 드려진 것으로 만족했던 이 바나바의 행동이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나바의 무엇이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가 있었습니까?
두 번째로, 바나바는 이 세상 모든 것보다 인간의 소중함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경쟁 사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취를 최고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사람들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치열한 생존의 경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입시경쟁, 취업경쟁, 생존경쟁, 수출경쟁, 진급경쟁 등, 우리는 지금 치열한 삶의 경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말로 심각한 것은 목표만을 추구하다 보니 인간성은 짓밟히고, 인간을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 되어버리고마는 인간성 상실에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바나바의 또 다른 미담은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의 첫머리는 사울이 주님의 제자들을 잡으려고 대제사장의 공문을 손에 들고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다메섹으로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원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더구나 예수 믿는 자들을 처단하려고 다메섹으로 갔던 악하고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변화되었습니다.  물론 이 소식은 예루살렘의 사도들도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사울을 만나주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본질적으로 무서운 사람이다.  이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없다."  그래서 상대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가 은혜를 받았지만 주위에서 그가 받은 은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때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예루살렘 그 먼 길을 걸어서 사도들에게 갑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사울의 신원을 보증합니다.

그 내용이 사도행전 9장 27절입니다.  사도행전 9장 27절을 찾아서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울에 대한 바나바의 증언은 한마디로 이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을 보증하겠습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이 사람은 장차 주님의 큰 일군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믿어야합니다.  여러분, 내가 이 사람을 보증 할테니까 믿어 주십시오."

바나바는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사도들에게 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도들이 그를 인정합니다.  사도들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사울은 못 믿지만 바나바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바나바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줍니다.  그래서 사울이 드디어 주님의 제자들과 교제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9장 28절에 보니까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그렇습니다.  바나바의 보증과 변호 덕분에 사울은 비로소 사도로서의 첫 걸음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나바로 인하여 사울이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교제를 나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에 그때 바나바가 사울을 변호해 주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의 바울이 있었겠습니까?  없습니다.  오늘의 바울이 있게 된 것은 바나바의 전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나바의 사울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비단 바울의 경우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마가에 대한 바울과의 의견 충돌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차 전도 여행기간 중에 마가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되돌아가 버렸습니다.  이 일로 바울은 굉장히 기분이 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2차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마가를 데리고 가지 않으려는 바울과, 마가를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와 의견 대립이 일어났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열심히 변호합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끝내 자신의 주장을 거두지 않습니다.  결국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갔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먼 훗날 마가는 바나바의 말 그대로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년에 "이 복음의 사역을 위해 내가 동역자가 필요하니 마가를 내게 보내주십시오"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훌륭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그때 만약에 바나바가 마가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마가를 포기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오늘날 인간성은 대단히 변해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목표를 성취하는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내가 손해보는 것은 조금도 참지 못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대접을 받는 곳이 아님에도 대접을 받지 못해서 안달들입니다.  너무 이기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얼마나 바나바가 그리운 시대입니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러분은 바나바와 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지 않으시겠습니까?

한 사람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그 가능성을 키워주는 사람, 비록 그의 과거가 우리를 실망시켰어도 그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의 장점이 주님에게 붙잡히는 그 날, 그가 큰 인물이 될 것을 믿고서 바나바와 같이 영혼을 세우는 일에 헌신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비판하기 보다, 버리기 보다, 포기하기 보다, 그 사람을 믿어주며 용기를 북돋워 주며, 그래서 병들고 약하고 쓰러져 있는 형제의 손을 붙잡고 함께 가자고 격려하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런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바나바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일 수가 있었습니까?
마지막으로, 바나바가 사람들의 마음에 행복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신앙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바나바에 대한 또 다른 미담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목회자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나바가 부임한 그날부터 안디옥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바야흐로 바나바의 인기는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일을 바나바가 혼자서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그는 바울을 초청하여 함께 동역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바나바가 속이 좁은 옹졸한 목회자였다면 그는 바울을 데리고 오는 것을 꺼렸을 것입니다.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기의 인기나 명예, 성취욕보다도 하나님의 일이 더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불렀고 그가 오자마자 교회는 더 부흥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바나바의 천거로 사울은 바울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주를 영접한 후 변화를 받았지만 선교의 터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었지만 그에게 선교의 일터를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바나바로 인하여 바울이 되기 위한 선교의 현장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있었기에 비로소 안디옥 교회는 세계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도행전 11장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표기가 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장 이전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기록되었지만, 이일 후에는 "바울과 바나바가"로 이 이름의 순서가 바뀌고 있습니다.  세계 선교의 주체가 바나바에서 바울로 옮겨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바나바의 불평이나 원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침묵으로 기쁘게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계속 감당하는 것이 전혀 섭섭하지 않았던 사람,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인기나 체면, 목표보다도 주님의 사역이 더 활발하기를 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다면, 주님의 교회가 좀더 부흥될 수 있다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주를 섬기리라"면서 살았던 이 사람 바나바, 그에게서는 자기의 체면이 세워지는 것은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것, 역시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주님의 일이 부흥되기만을 원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원했던 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했던 사람,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숙하기를 원했던 사람, 그가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한국 교회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인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울이 아니라 바나바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모두가 위대한 지도자만 되고자 하는 이 시대에 바나바와 같이 묵묵히 감사하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자리가 위대한 자리입니까?  청와대에 가야만 위대한 자리입니까?  국회에 가서 큰소리를 쳐야만 위대한 자리입니까?  장(長)자가 붙는 회전 의자에 앉아야만 위대한 자리입니까?

무서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있었습니다.  반장 아이가 병이 들어서 입원했습니다.  그래서 반 아이들이 같이 병 문안을 가자고 하니까 안 간다고 하더랍니다.  왜 안 가려고 하느냐고 하니까 그 아이가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가 죽어야 내가 반장하지."

전부가 대통령, 반장하려는 사람만 있지 밑에서 보좌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인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동업을 못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진정으로 위대한 자리는 그 자리가 큰 자리라서 위대한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세우신 그 자리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그 일을 감당할 때 비로소 그 자리가 위대한 자리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나바는 사도행전의 한 성도일 뿐 아니라 모든 성도가 바나바가 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있는 곳에 전도의 문이 열렸습니다.  바나바가 있는 곳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왔습니다.  바나바가 있던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모두가 교회를 우러러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서 우리가 들어가는 곳마다 바나바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직장, 어느 가정, 어느 사회든지 바나바가 들어가서 수많은 사람을 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들로 인하여 세상이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바나바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믿은 새신자 사울을 찾아서 먼저 사도 된 주님의 제자들에게 소개를 했듯이 교회에 처음 나온 새신자들에게 먼저 믿은 사람이 바나바로 그를 찾아가서 격려해주고 그에게 용기를 주면서 먼저 믿은 사람에게 가까이 하도록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바나바는 새가족을 통해서 교인과 화목을 이루어줍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사울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그를 데리고 가서 화목시켜 줍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사울에게 일을 맡깁니다.  안디옥 교회에 데리고 가서 일을 하도록 맡겨줍니다.  우리의 생애에도 바나바와 같이 위대한 사역이 계속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나바는 자신이 바울이 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발견하여 그를 세우는 것이 자기의 사명임을 알았던 이 사람 바나바, 그래서 바울을 자기 자리에 세우고 자기는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면서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세례 요한의 고백이 가능했던 이 사람 바나바, 그래서 교회와 세상은 그로 인하여 행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모두 다 바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세계를 세 차례나 걸쳐 여행하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있습니다.

넘어져 있는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성도님, 일어나야 합니다.", "집사님, 수고하셨습니다.", "목사님, 힘을 내십시오", "형제님, 기도하겠습니다"하는 이 한마디를 통해서 바울 같은 일꾼을 만들었던 바나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때문에 공동체는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때로는 우리의 가는 길이 지루하고 외로운 길이라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은 바나바와 같은 영적 파장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주는 바나바의 삶이 오늘 우리 모두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