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누구를 위한 싸움입니까? (삿 8:22-35)

첨부 1


누구를 위한 싸움입니까? (삿 8:22-35)
 

리더들의 끝맺음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끝을 잘 맺은(finished well) 경우로, 생애의 말년까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리더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 욥, 요셉, 여호수아, 갈렙, 사무엘, 엘리야, 예레미야, 다니엘, 요한, 바울, 베드로입니다. 두 번째는 끝을 잘 맺지 못한(finished poorly) 경우로, 한 때는 주신 사명을 감당했으나 사역의 후반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나 사역의 수행 정도에 있어서 좋지 않은 리더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예를 들면 삼손, 엘리, 사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등장하는 기드온은 어디에 해당할까요? 그렇다면 나는 어떤 길로 가야할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전쟁(7:19-23)

기드온이 삼백 명과 함께 미디안을 치러갈 때에 그들에게 외치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 ‘여호와를 위하여’가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그러면 ‘기드온을 위하여’는 무슨 뜻입니까? 기드온을 높이기 위하여. 그러다 보니 기드온은 두 종류의 전쟁을 치릅니다. 하나는 여호와의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기드온의 전쟁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여호와께서 주관하시는 전쟁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는 전쟁입니다. 

반면에 기드온의 전쟁은 기드온의 뜻대로 하는 전쟁이고 기드온이 드러나는 전쟁입니다.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가 밤 10시쯤 되었을 때 미디안 군대에 기습공격을 합니다. 보초가 교대할 때가 경계가 가장 허술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왼손에는 횃불을 들고 오른 손에 나팔을 들고 일제히 불며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라고 외치자 미디안 군대는 혼란에 빠집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소리를 지르고 허겁지겁 도망을 치다가 자기들끼리 칼로 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하셨다고 합니다. 

기드온의 스토리가 다른 사사들보다 길게 전개되지만 막상 여호와의 전쟁은 사사기 7장 19절부터 22절까지 불과 네 절에 불과합니다. 그 전쟁에서 기드온과 3백 명이 한 것이라고는 횃불을 흔들고 나팔을 불고 소리를 지르며 시각적 효과와 음향 효과를 낸 것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싸우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전쟁은 기드온의 전쟁으로 퇴색되고 맙니다. 

기드온의 전쟁(7:24-8:21)

대부분의 사사들의 경우에는 여호와의 전쟁 후에 ‘사사가 사는 날 동안 평안하더라’하며 이야기가 끝납니다. 그러나 기드온의 경우는 ‘여호와의 전쟁’이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도망가는 미디안 군사를 치기 위해 기드온은 전에 돌려보냈던 납달리, 아셀, 므낫세 사람들을 다시 부릅니다. 그들의 참여는 300명의 군사로 축소한 하나님의 의도를 희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사자들을 보내 그들로 하여금 요단강에 이르는 퇴로를 차단하게 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미디안 군대의 지휘관인 오렙과 스엡을 잡아 죽입니다. 

승리는 거두었지만 기드온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방법으로 한 것은 아닙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처음부터 자신들이 전쟁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전쟁인가’로 서로 주도권 다툼을 합니다. 기드온은 분노한 에브라임 지파를 향해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8:2)는 외교적 발언으로 그들의 노를 풀어줍니다. 

기드온의 군대는 미디안의 군대를 쫓아 요단을 건너갑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여호와께 의존했을 때는 300명의 군사로 메뚜기 떼 같은 미디안 군대와 싸워도 지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디안의 두 왕을 좇는데도 피곤해 합니다. 기드온도 달라졌습니다. 3백 명의 군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했습니다. 7:2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너와 함께 하는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말할 때 그와 함께 하던 3백 명을 ‘나를 따르는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직역하면 ‘내 발에 있는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3백 명의 군사들은 기드온과 동역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의 부하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드온도 삼백 명이 피곤한 것을 알고 있기에 숙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 사람들에게 지금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고 있는데 배가 고프니 음식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숙곳 사람들은 기드온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섣불리 기드온의 편을 들다가 나중에 미디안에게 보복을 당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에브라임의 불평을 들었을 때는 외교적 수사로 그들을 다독였던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는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비굴한 모습을 기드온이 보여줍니다. 자기가 승리하고 돌아올 때 들가시로 찔레로 그들의 살을 찢겠다고 합니다. 브누엘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절을 당하니까 기드온은 더 화가 나서 자기가 돌아올 때에 그들의 망대를 헐겠다고 합니다. 결국 기드온을 따르던 3백 명의 군사는 배고프고 지친 상태였지만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한 채 세바와 살문나를 계속 추격해야만 했습니다. 지금 기드온은 지지받지 못하는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미디안 군대는 이미 요단강 서편에서 12만 명이 죽었고 요단강 동편으로 도망을 친 자들이 약 일만 오천 명 가량 있었습니다. 그들이 멀리 도망 왔다고 안심하고 쉬던 차에 기드온의 군대가 기습을 합니다. 결국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나머지 군대를 격파합니다. 기드온이 그들을 잡으려는 집착과 여러 번에 걸쳐 그들을 간신히 잡는 모습은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6:16)는 말씀과는 거리가 멉니다. 

기드온이 돌아오는 길에 그가 말한 대로 숙곳의 방백들과 장로들 칠십칠 명을 잡아 고통을 줍니다. 그리고 브누엘에 가서는 망대를 헐며 그 성읍 사람들을 죽입니다. 기드온은 여호와의 군대로 모집한 300명의 용사들을 미디안을 죽이는 게 아니라 동족을 죽이는데 동원합니다. 음식을 주지 않았다고 목숨을 빼앗는 것은 지나칩니다. 이것은 이방 나라 폭군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이 아닌 기드온을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이 이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에게 그들이 다볼에서 죽인 자들에 대해 묻습니다. 두 왕의 대답은 “그들이 너와 같아서 하나 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고 합니다. 기드온은 “그들은 내 형제들이며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니라”고 밝힙니다. 여기서 기드온이 왜 그토록 두 왕들을 끝까지 추격하는데 집착하였는지 알게 됩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보복할 일이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의 장자 여델에게 미디안 왕들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위치와 아들의 위치를 미디안 왕들의 위치보다 더 높이려는 의도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은 두려워하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과거에 두려워하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기드온은 더 이상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 군림하는 자로서 행동하며 두 왕들을 죽입니다. 

왕이 아니면서도 왕 같은 기드온(8:22-28)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이김으로 기드온은 전쟁영웅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요청입니다. 그 근거는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요청 속에는 기드온 뿐 아니라 그 아들과 손자들 대까지 계속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구원해 달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아들들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장자인 아델의 유약함을 이미 보았고 앞으로 등장할 그의 또 다른 아들 아비멜렉은 최악의 폭군으로 왕이 될 자격이 전혀 없는 자로 나옵니다. 

기드온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숙곳 사람들을 괴롭히고 브누엘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우상에게 의존했고 이제는 여호와의 도구에 불과한 기드온에게 다시 의존하려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백성의 요청에 대한 기드온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기드온이 이제까지 한 발언 중에서 가장 경건한 발언입니다. 기드온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기드온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부름을 받고 미디안의 대군을 물리치고 사람들의 유혹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킨 자라는 칭송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백성의 제안을 거절한 후 기드온은 백성에게 그들이 탈취한 귀고리를 자기에게 달라고 요구하자 백성들은 그의 요청을 기꺼이 들어줍니다. 그들이 기드온에게 준 금 귀고리의 양은 엄청났습니다. 보통 세겔을 11.4그램 정도로 보기에 1700세겔은 약 20킬로그램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승리를 선사받은 기드온은 백성들에게 적에게서 노획한 금귀고리를 거둬들여 제사장이 입는 옷인 에봇을 만들어 자신이 거하던 성읍에 두었고, 이스라엘이 금 에봇을 음란하게 섬겨서 그것으로 인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에봇을 만든 것은 마치 광야를 다닐 때에 아론이 금귀고리를 모아 금송아지를 만든 일을 연상시킵니다(출 32:1-6). 

백성들은 적의 손에서 구원을 요청했는데 기드온은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백성들을 다시 우상숭배로 인도한다는 점입니다. 적들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려면 여호와만을 섬겨야 하는데 우상을 섬김으로써 다시 적의 손에 백성들이 넘어갈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기드온이 사는 날 동안 사십년 동안 그 땅이 평안하였던 것은 기드온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에 지속적이고도 거룩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기에 그가 죽은 후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바알브릿은 언약의 바알이란 뜻으로 이스라엘은 참 언약의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언약의 주로 섬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야할 자리를 다시 바알에게 내주고 말았습니다. 기드온은 바알을 부수고 출발했지만 그 자리에 또 다른 우상을 소개한 최초의 사사가 됩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인간에게 내재된 최대의 우상이 돈, 섹스, 권력이라 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를 물리칠 수 있다면 신앙적으로 승리하는 인생을 구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기드온의 경우 어떠합니까? 탐심이 싹텄습니다. 온갖 전리품과 백성의 선물을 엄청나게 쌓아 놓았습니다. 미디안의 두 왕을 죽이고 그 약대 목에 꾸몄던 새 달 형식의 장식을 취하였습니다. 백성들로부터 금 귀고리 외에도 초승달 장식과 패물, 그리고 미디안 왕복과 낙타 장신구를 받았습니다. 깨끗하게 헌신하고 사람들의 존경 속에 사라져간 사무엘과 달리 기드온은 시작도 미미, 끝이 지저분합니다. 물질은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물질의 복을 받은 후에는 자기를 위하여 낭비하지 않고 주신 물질을 사명으로 연결시킬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적인 문제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강한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사랑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가정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아내가 많았습니다. 많은 아내는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아내들에게서 낳은 아들이 70명이었으며, 그 외에 첩을 통해 낳은 아들도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비록 왕의 지위를 거절했지만 실질적으로 왕의 권력과 부를 누렸으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의 왕 같은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기드온의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삶이 결국 그의 훌륭한 업적을 퇴색시키고 말았습니다. 

권력 면에서 보면 어떠합니까?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백성들은 그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했고 그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첩의 아들인 ‘아비멜렉’의 이름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런 그가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거나 혹은 그렇게 짓도록 허락한 것을 보면 비록 그가 표면적으로 왕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내심으로 왕권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사사기 9장에 나오는 아비멜렉의 삶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통치에 대한 탐욕의 연장선에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배다른 형제 69명을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자기를 왕으로 세운 세겜 사람들과 나중에는 서로 원수가 되어 싸우다가 여인이 던진 맷돌 위쪽을 맞고 죽었습니다. 기드온은 역경에서는 하나님을 잘 따랐으나 풍요 속에서는 하나님의 바르게 섬기지 못하고 실족하였습니다. 

사사기 저자는 여호와의 리더십과 기드온의 리더십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리더십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그들에게 평안을 주시고 백성들에게 우상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섬기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기드온의 리더십은 군대를 지치게 하고 자기 민족을 죽게도 하고 분열을 일으키게도 하며 개인적인 성공과 업적을 추구하는데 역점을 둡니다. 누가 이스라엘을 다스려야 하는지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여정을 가는 우리들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1) 왕이신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드온과 미디안의 싸움이 시작될 때 하나님은 자신만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유일한 존재임을 알리시기 위해 모인 군대를 32000명에서 300명으로 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이름 옆에 자신의 이름을 끼워 넣었던 기드온 때문에 사람들은 여호와가 아니라 기드온을 구원자로 알게 됩니다. 이렇게 승리의 영광을 노골적은 아니지만 은근히 그러나 확실하게 가로챈 기드온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권력을 공동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적인 욕망을 이루는데 사용합니다. 그 결과 백성은 여호와가 아니라 기드온에게 왕적 권세를 주려고 합니다. 

미디안 왕들의 의복, 많은 아내, ‘내 아버지는 왕’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 등은 기드온의 속 마음을 엿보게 합니다. 지도자가 권력에 심취하자 공동체는 위기에 빠집니다. 기드온의 스토리를 보면 내부적 갈등들이 서서히 표면으로 드러납니다. 영적으로 바로 서지 못하다보니 내부의 위협이 외부의 위협보다 더욱 심각한 요소임을 경고합니다. 기드온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배교를 더욱 촉진시켰습니다. 본문은 말이 아니라 삶의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만이 참된 왕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왕이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의 종입니다. 왕좌에 앉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왕좌를 다른 것에 넘기려 해서도 안 되고 더 나아가 감히 그 자리에 앉으려고 해도 안 됩니다. 아무리 많은 명예와 권세, 물질을 소유할지라도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히 엎드리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여호와만이 진정한 구원을 주실 수 있습니다. ‘기드온과 300용사’의 전쟁에서 핵심은 믿음과 신뢰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그의 믿음을 칭찬합니다(히 11:32). 기드온이 여호와만이 전쟁에서 승리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으로 확신했을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기드온에게 여호와만을 신뢰하는 것은 10만이 넘는 군대에 맞서기 위해 3만이 넘는 군대의 대부분을 돌려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 외에 아무도 의존할 것이 없고 ‘오직 믿음’만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사사기는 우리에게 그런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믿으면서 왕이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기드온은 왕이 되어달라는 요구는 거절하였지만 실제로는 왕처럼 살았습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집중하게 되면 처음에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어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조금씩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자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요소들이 있는지 철저히 점검해야 합니다. 가족이든, 재물이든, 명예든 무엇이든 간에 각자의 삶에 우상적인 요소가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차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기드온은 백성들이 살려달라고 요청했을 때 여호와께서 다스릴 것이라고 대답을 했지만 자신이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였다는 백성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지도 않았습니다. 간접적으로 여호와의 영광을 빼앗은 셈이 됩니다. 백성들의 발언에 침묵함으로써 백성들의 생각에 동조한 셈이 됩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전쟁에서 탈취한 금귀고리를 요청합니다. 우리도 때로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말을 하면서도 실제에서 우리 자신이 한 것처럼 태도와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사역을 하면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것인지 자신이 하는 것인지, 여호와의 받으실 영광을 자신이 은연중에 취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영적 전쟁을 치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기드온은 끝까지 미디안 왕들을 추격함으로써 여호와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인물로 비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 기회에 보복하려는 개인적인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그 결과를 하나님의 용사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얻어냈습니다. 이것은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덫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열정적으로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같으나 이미 하나님의 사역이 아닌 자신의 사역에 몰두하고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자만에 빠져 파악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늘 하나님의 사역 속에 개인적인 목적을 채우도록 계교를 부릴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드온의 스토리에는 두 전쟁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전쟁, 기드온의 전쟁. 왜 두 전쟁이 있어야 합니까? 주도권 다툼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와 기드온이 왜 갈등을 벌입니까? 에브라임과 기드온 누가 유력한가? 여호와의 전쟁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이런 추한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도 제자들은 누가 크냐 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누구를 위한 싸움을 싸웁니까? 겉으로는 주님의 이름을 내세우지만 중심에는 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다니, 나를 무시하다니.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나의 싸움은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나의 싸움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나의 싸움은 결국 나도 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싸움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다른 사람들을 세웁니다. 결국 내가 높아집니다. 내 마음에 평강이 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