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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막 곧 회막 (출 4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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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 곧 회막 (출 40:1-38)


난생 처음으로 차를 한 대 구입하게 되는 것은 실로 가슴이 뛸 정도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 이전까지 버스나 지하철만 타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차에 동승만 하다가 이제 자가용 자동차가 한 대 생기면 마치 온 세상 어디로든지 자기 마음대로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빠져 들기 때문입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비록 셋집에 살더라도 일단 차부터 한 대 마련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고 나면 그때부터 벌써 완전히 독립한 성인이 된 것 같이 뿌듯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차를 한 대 샀다고 해서 그때부터는 그처럼 운전을 즐길 일만 남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차를 살 때에는 이제 기름만 넣어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 얼마나 큰 오산이었는지는 '자동차 정비'라는 현실을 접하게 되면서 곧 깨닫게 됩니다. 
그 차라는 것이 정기적으로 무슨 오일 교환이라는 것을 해야 하고 때때로 브레이크 패드라는 것도 갈아야 하며, 비록 별 문제가 없어 보일 때에도 정기 점검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 것인 줄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본인의 차가 없을 때에는 자동차 정비라는 말을 들어도 '뭐, 차가 고장이 나면 가는 곳이겠지.'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가, 그게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자기 지갑 속에 있던 아까운 돈을 정비공의 손에 넘겨주면서, 혹은 본인 스스로 자동차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기름때를 묻히며 오일필터라는 것을 바꾸어 끼워 보면서 비로소 실감하게 됩니다. 
이처럼 차라는 것은 구입만 한다고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해서 정비 관리를 해야 안전하게 운전을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신자의 교회생활 역시 그러합니다. 
교회에 등록을 하고 출석하기만 하면 나머지 신앙생활은 절로 다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큰 오산입니다. 
교회생활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을 통해 항상 은혜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기 위해서는 '영적 정비'가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막 완성된 성막을 본격적으로 가동시키기 시작했던 낙성식, 혹은 봉헌식에서 우리는 바로 그런 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성막과 그에 속한 기구들이 다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 성막이 절로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거기에는 세 단계의 가동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비단 낙성식 때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성막의 기능이 계속 원활하게 유지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들이기도 했습니다. 
그것들이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는 우리 기독신자들이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항상 은혜 충만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늘 스스로의 심령을 통하여 점검하고 관리해야 할 '영적 정비'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독신자는 '경건을 통한 성화'로써 교회중심의 생활을 영위해야 합니다. 

교회생활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화 즉 '거룩한 경건생활로써 날마다 자신의 더러운 죄를 닦아내는' 영적 정비가 반복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본문 1절부터 16절에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너는 정월 초일일에 성막 곧 회막을 세우고 3또 증거궤를 들여 놓고 또 장으로 그 궤를 가리우고 4또 상을 들여 놓고 그 위에 물품을 진설하고 등대를 들여 놓고 불을 켜고 5또 금 향단을 증거궤 앞에 두고 성막 문에 장을 달고 6또 번제단을 회막의 성막 문 앞에 놓고 7또 물두멍을 회막과 단 사이에 놓고 그 속에 물을 담고 8또 뜰 주위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장을 달고 9또 관유를 취하여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그것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라 그것이 거룩하리라 10너는 또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에 발라 그 안을 거룩하게 하라 그 단이 지극히 거룩하리라 

11너는 또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12너는 또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13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여 그로 내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 14너는 또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겉옷을 입히고 15그 아비에게 기름을 부음같이 그들에게도 부어서 그들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은즉 대대로 영영히 제사장이 되리라 하시매 16모세가 그같이 행하되 곧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고 계시는 것들은 이제 막 완성된 성막과 그 기구들을 어떤 순서로 조립해서 완성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세부적 지시입니다. 
그처럼 성막을 조립하고 세우는 과정에서 특별한 순서가 하나 포함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 모든 성막과 기구들에 "관유"를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비단 성막과 기구들뿐 아니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임직하는 순서에서도 그 기름을 그들에게 붓도록 했습니다. 
이 관유라는 것은 출애굽기 30장 22절부터 25절에서 하나님께서 그 제조법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계시는 것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당시에 있던 최상급 향품들의 모든 종류와 최고 품질의 감람유를 섞어서 만든 아주 특별한 향유였습니다. 

그 관유를 성막과 그 기구에, 그리고 제사장들에게 바른 것은 곧 그것들을 '성별'시키기 위한 상징적인 의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 보면 "관유를 발라... 거룩하게 하라", 혹은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라"는 말씀이 여러 번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거룩'이라는 단어는 원래 '구별하다'라는 뜻의 어원을 가진 말입니다. 
즉 그처럼 관유를 통해 성별됨으로써 비로소 성막과 그에 속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 자신의 것으로 거룩하게 구별'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거룩한 구별'이 없는 교회생활이란 것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룩함" 즉 성화생활의 진보가 없으면 아무리 겉으로는 교회생활을 하는 것 같아도 결국에 가서는 "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즉 재림하실 주님 앞에서 구원의 반열에는 절대로 서지 못할 것이라고 단호히 잘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거룩함'이야말로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이며, 따라서 그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양자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함'과 '거룩하지 않음'이야말로 하나님과 사람을 갈라놓는 대표적인 차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거룩함'이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부터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접촉하게' 되는 대표적인 통로인 동시에 그 하나님을 '닮아가게' 되는 대표적인 공감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과연 어디에서 이와 같은 '거룩함'을 배우고 익힐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교회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바로 '흠도 점도 티도 없이' 지극히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실로 완벽하게 거룩한 당신의 보혈을 흘리심으로써 이 교회를 장망성 세상으로부터 성별하여 세워 주셨습니다. 
그러니 진정 그런 교회의 '지체'된 기독신자라면 당연히 그 주님의 '거룩하심'을 자신도 절로 입게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불신세상에서 악한 인생들과 섞여 살던 시절에는 절로 점점 더 더러워지고 악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지극히 순결하고도 고귀한 십자가의 보혈이 흐르는 교회를 중심으로 살게 되었다면 하루 하루 지날 때마다 그만큼 더 경건과 성화생활에 진보가 나타나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저 몸만 예배당에 왔다 갔다 하는 교인이 아니라 자신의 교회생활 구석구석에 늘 '경건의 관유'를 부음으로써 결국은 우리 주님과 똑같이 '완벽하게 거룩한 형체'로 변화하게 될 그날에 이르기까지 늘 성화의 진보를 나타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독신자는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써 교회중심의 생활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일점도 틀림없이 즉각 순종하는 것 역시 은혜롭게 교회생활을 할 수 있는 요소입니다. 
  
17절부터 33절까지의 말씀에 "17제이년 정월 곧 그 달 초일일에 성막을 세우니라 18모세가 성막을 세우되 그 받침들을 놓고 그 널판들을 세우고 그 띠를 띠우고 그 기둥들을 세우고 19또 성막 위에 막을 펴고 그 위에 덮개를 덮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 20그가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채를 궤에 꿰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 21또 그 궤를 성막에 들여 놓고 장을 드리워서 그 증거궤를 가리우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 22그가 또 회막 안 곧 성막 북편으로 장 밖에 상을 놓고 23또 여호와 앞 그 상 위에 떡을 진설하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 24그가 또 회막 안 곧 성막 남편에 등대를 놓아 상과 대하게 하고 

25또 여호와 앞에 등잔에 불을 켜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 26그가 또 금 향단을 회막 안 장 앞에 두고 27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 28그가 또 성막 문에 장을 달고 29또 회막의 성막 문 앞에 번제단을 두고 번제와 소제를 그 위에 드리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 30그가 또 물두멍을 회막과 단 사이에 두고 거기 씻을 물을 담고 31자기와 아론과 그 아들들이 거기서 수족을 씻되 32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와 단에 가까이 갈 때에 씻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 33그가 또 성막과 단 사면 뜰에 포장을 치고 뜰 문의 장을 다니라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필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제 드디어 성막 조립과 기구 배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순서와 요령은 바로 앞 1절로 15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똑같습니다. 
아니 여기에 나타나는 내용은 출애굽기 25장에서 성막 건축에 관한 명령을 제일 처음으로 받을 때부터 시작해서 그 부품들을 완성한 39장에 이르기까지 벌써부터 수차례나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생략해도 좋을만한 똑같은 내용을 왜 몇 번 씩이나 반복해서 이 성경 말씀에 굳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성막 건축이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한 치의 틀림없이 그대로 수행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17절부터 33절에 이르기까지 구구절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는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막건축은 애초에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시발되었으며, 모든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시에만 따라서 진행되었습니다. 
성막의 내외 디자인은 물론이거니와 그것들을 만들 각종 재료뿐 아니라 공사 책임자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일일이 친히 지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그 완성된 부품들을 조립해서 성막을 완공하는 단계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거쳐 모세가 한 것이라고는 단 한 가지,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대로 순종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성막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미래의 모든 예배생활 역시 꼭 마찬가지로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만 진행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두말할 것 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것 역시 오늘날의 교회중심 생활에도 어김없이 적용되는 철칙입니다. 
'말씀 순종'이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나사를 꼭 죄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이것이 느슨해지면 그 사람의 신앙이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 풀려 버리고 사고가 날지 알 수 없는, 지극히 불안하고 위험한 상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히5:8)고 했으니 우리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한다는 것을 무조건 부담스럽게만, 무조건 귀찮고 힘든 것으로만 여기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명장이 필승의 작전을 세운 후에 내려 주는 명령을 그대로 복종하는 것이 병사에게는 얼마나 믿음직한 일이겠습니까?
  
그저 그 명령만을 따라서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면 자기편이 반드시 이기게 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병사에게는 그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것이야말로 군인으로서 실로 뿌듯한 일이며 그런 명령이 떨어지기를 오히려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수완 있는 사장이 경영 전략을 수립하고 지시를 내려 줄 때, 그것만 따르면 회사가 이익을 올리고 자신의 월급도 올라가게 될 것을 잘 알고 있는 직원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직원은 본인 스스로 무슨 판단을 내리기에 어려워하거나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이 오로지 자기 사장의 지시에 따라 일하기만 하면 그야말로 절로 신명이 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런 것입니다. 
순종만 하면 마귀를 이기고 순종만 하면 축복을 받게 되어 있는 이 뿌듯한 체험은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성도는 반드시 맛보게 되어 있습니다. 
피곤해도 주일성수의 명령에 순종하고 가난해도 십일조의 명령에 순종하고 기분이 나빠도 이웃사랑의 명령에 순종하고 힘들고 괴로워도 하나님만 끝까지 의지하라는 명령에 무조건 순종하면 바로 그때부터 진짜로 신나는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순종 없는 교회생활'이란 그야말로 '나사가 풀린 기계'와 똑같은 것임을 명심하면서, 그 어떤 경우에도 성경 말씀에 절대순종함으로써 그에 따라오는 풍성한 축복의 기쁨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기독신자는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교회중심의 생활을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항상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로 교회중심의 생활을 통하여 늘 생생히 느끼면서 살아야만 진정 신앙생활의 최고 은혜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완성하자마자 곧 누리게 된 체험이었는데, 바로 34절 이하 38절에 기록하기를 "34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37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38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고 했습니다. 

이제 완전히 완성된 성막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두 가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저 유명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무슨 성막의 장식품으로, 혹은 무슨 신기한 구경거리로 주어진 것들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둘 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 즉 하나님의 신이 그 성막이 가는 곳 어디에서나 항상 동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성막 위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볼 때마다 곧 하나님께서 그 순간도 그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상기해내고 또한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행군 중에 그처럼 날마다 성막 위에 나타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 백성들에게 어떤 힘을 주었을지는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없다면 그들 앞에 놓인 광야 길이라는 것은 정말 암담하고 불안한 것이었습니다. 
날마다 길 없는 길을 걸어가야 했고 끝없는 지평선 사방에서 어떤 자연 재해나 이방 민족의 공격이 닥쳐올지 알 수 없는 지극히 불안한 하루하루를 그저 가슴만 조리며 살아 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저 구름 기둥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지만 하면 그들의 행로에는 늘 분명한 방향과 확실한 일정이 설정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암담한 여정이란 없었습니다.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깜깜한 밤이 되어도 그저 불기둥을 한번 바라보기만 하면 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눈동자와 같이 지켜 주신다는 든든한 확신을 가지고서 실로 두 발 뻗고 편안히 잘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교회생활을 이렇게 하고 계십니까?
바로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늘 바른길로 인도하시고 매사에 보호해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날마다 느끼고 확신하며 살고 계십니까?
교회에 대하여 늘 불만만 가지고 사는 교인에게는 그 교회생활이란 것이 결코 은혜로울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전이었다면 도저히 어찌할 줄 몰랐을 어려운 인생기로에 섰을 때에도 바로 교회의 강단을 통해서 올바른 길로 인도받는 체험을 하게 되면 실로 하늘 아버지께서 자신의 손을 직접 붙잡고 이끌어 주신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내가 나가 주지 않으면 이 교회만 손해지.'라는 식으로 자칫 교만에 빠져 있으면 결코 교회생활의 참된 은혜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믿기 전이라면 꼼짝없이 넘어지고 말았을 절망적인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교회의 성도들이 함께 간구해 주는 기도를 통하여 놀라운 응답을 받게 되면 실로 보혜사 성령께서 자신을 눈동자같이 지키고 보살펴 주신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교회를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이 눈에 보이고 교회를 통하여 그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체험하게 될 때에 그런 성도 앞에 놓인 인생길은 결코 더 이상 막막한 광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오래 교회생활을 했다고 해도 이런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은혜를 실제로 누려 보지 못했다면, 그것이야말로 헛수고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신앙생활이란 가끔씩 예배에 출석 한 번 하는 것도 무척 어려운, 실로 녹이 슬대로 슬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말세가 될수록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과 같이 되지 말고 더욱 교회중심으로 매사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즐거움을 실제로 체험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생활을 진정 활기차게 만드는 영적 윤활유를 치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해야 그것이 정말 교회생활다운 교회생활이 될 수 있는지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세우게 하신 성막을 통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거룩한 경건생활을 통하여 더욱 성화의 진보를 나타내도록 부단히 노력하고,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유일한 기준인 성경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오직 철저한 교회중심의 생활을 통해 날마다 피부로 느끼면서 사는 것 - 이것들이 바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점검종목인 동시에 정비조건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정비소에 가보면 흔히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는 표어를 보게 됩니다. 
원래 군대에서 쓰던 말인데 이제는 일반화된 '정비의 기본이요 상식'인 것입니다. 
만약 평소에 늘 '닦고 조이고 기름을 치지' 않으면 차가 결국 어떻게 될 것인지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 것입니다. 

혹 여러분의 교회생활이 부드럽게 굴러가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딘지 모르게 삐꺽거리는 소리를 내거나 잦은 고장을 일으키지는 않습니까?
차 샀다고 다 끝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다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화의 진보로써 자신의 삶을 더더욱 윤이 나도록 닦고, 말씀을 순종하여 생활에서 체험함으로써 자기 심령의 나사를 더 꼭 죄어 가고, 엿새 동안에도 늘 교회를 향하여 마음의 창을 열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만사형통하게 인도해 주시는 기름칠을 하면서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잘 굴러가는 신앙생활, 정말 쾌적한 교회생활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한가운데 그처럼 귀한 성막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애굽의 종도 아니요 금송아지 우상 앞에 절하는 백성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신 성막이 그들의 광야 여로 가운데 우뚝 서서 중심을 잡고 그들을 인도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니 그들이 그 얼마나 정성껏 그 성막을 모셨겠습니까?

이 경향교회도 우리에게 바로 그런 성막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교회를 우리에게 주신 까닭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자유자가 되었으며, 멸망당할 가증한 것 앞에 절하던 우상숭배자가 아니라 유일신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선민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야말로 내 인생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존재인 줄을 깨닫고 더 아끼고 더욱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건생활을 통한 성화'와 '말씀에 대한 절대 순종'과 '하나님의 구체적인 보호와 인도하심'을 바로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나날이 지키고 체험함으로써 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더욱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세워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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