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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의 도리 (롬 1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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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도리 (롬 10:11-13)


성경은 사람이 구원을 받는데 무슨 자격을 요구하지 않으며, 다만 이같이 선언합니다.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

구원 받는데 민족의 차별이 없습니다. 선민의식이 강한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므로 당연히 구원을 받지만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했으므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합니다. 이 누구든지 안에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때 헬라인은 모든 이방인들을 대표합니다. 헬라인 안에는 한국인인 우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는 구절은 “유대인이나 한국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선민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이 누구나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별도 없습니다. 과거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던 시대에도 믿음의 세계에서는 남녀가 평등하게 대접을 받았습니다. 사회적인 신분의 차별도 없습니다. 고대 로마세계에서는 노예제도가 성행했습니다. 노예는 인권이 없고 마치 가축이나 물건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데는 자유자와 노예의 차별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3:28에 이르기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연령의 차별도 없습니다. 어른만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믿을 수 있습니다. 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라도 괜찮습니다. 한번은 사람들이 자기의 어린 아기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그들을 나무라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빈부의 차이도 없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차별 없이 누구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원칙을 말하자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데는 선민과 이방인, 남녀, 노소, 빈부의 차이가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복음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구절과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구절은 같은 의미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곧 주를 믿는 자를 말합니다. 선민이냐 이방인이냐, 남자냐 여자냐, 어른이냐 아이냐, 부자냐 가난한 자냐의 차별이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이 선량한지 악한지의 차별도 무의미합니다. 

선량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선량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나눌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에 불과합니다. 구태여 말하자면, 선량한 사람은 선량한 죄인이고 악한 사람은 악한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법인 율법에 의하면 둘 다 멸망 받을 죄인입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인간들의 실상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여기서, “하나도 없다”는 표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래도 이 세상에는 의인들이 소수 나마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들은 온 인류가 추앙하는 성인들이지 않은가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단언합니다. 인간들이 볼 때에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인데도 성경은 그들을 포함해서 “깨닫는 자도 없다”고 단정 짓습니다. 철학을 탐구하고, 도를 닦고, 수양을 하고, 자선을 하는 것, 등등 인간들의 모든 행위가 한 가지로 무익한 것이요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서 인정받을만한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기준이 너무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까? 항의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준의 엄격함을 비난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요즘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방사능 오염수가 매일 300톤 이상이나 바다로 유입된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주변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에서 방사능이 검출되어 얼마 전부터 우리나라도 일본산 물고기 수입을 금지했습니다. 수입금지 조치를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정부가 나서서 일본산 수입 물고기에서 검출된 방사능 양이 기준치 이하이므로 건강에 해가 되지 않으므로 먹어도 된다고 발표했지만 국민들은 믿으려 하지 않고 불안해했습니다. 

그 이유는 방사능은 기준치 이하라고 해도 그것이 쌓이면 치명적인 부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일본 정부는 우리 정부에게 항의하고 일본산 물고기에서 검출된 방사능 양이 기준치 이하이므로 수입을 재개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은 기준치 이하이더라도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관련이 있는 일본산 물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기준과 원칙은 정당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 엄격하다고 항의할 수 없습니다. 죄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우리의 영혼을 죽일 수 있으므로 심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죄를 지은 사람만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죄를 범한 사람은 누구나 다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작은 죄를 지은 사람도 죄인이고 큰 죄를 지은 사람도 죄인입니다. 죄인은 누구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큰 죄를 지은 사람과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은 다 심판을 받지만, 각 사람이 지은 죄의 경중에 따라서 형벌이 다릅니다. 그러면 이 땅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구원 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죄인이므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기독교는 너무나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언제나 죄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때가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같은 지적은 맞습니다. 기독교가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항상 죄에 대하여 말하는 것도 맞습니다. 그것은 병원에 가면 의사가 병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의사에게 “당신이 나의 병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심을 갖기 때문에 부담스럽습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처럼 나의 질병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주는 의사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육체의 질병이 아니라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더니 그가 예수님을 위해 자기 집에서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마태의 동료 세리들과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참석했습니다. 그 때 서기관들이 이 광경을 보고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고 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스스로 의로운 자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세리들과 경건치 못한 자들을 죄인이라고 여기고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의사로서 영혼이 병든 자들을 가까이 하셨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겼으므로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님께 나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리들과 죄인들은 자기들의 추하고 비참한 영적 실상을 알았으므로 겸손히 주님 앞에 나아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건강에 자신하는 사람이 병원을 찾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자기가 죄인인 사실을 시인하는 사람이라야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세상에서 잘 난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 부자들, 권세가 있는 사람들,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들 중에는 주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데,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을 상당히 쓸 만한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인데…’ 그런 자부심에 차 있어서 자기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에서 잘난 것이 예수님을 믿는 데 불리한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형편은 초대교회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내세울 것이 없으므로 마음이 겸손해 지기 쉬운데, 바로 이 겸손함이 주님을 믿는데 유리한 조건이 됩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은 생활이 매우 건전하고 윤리적으로 훌륭한데 전도를 해도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기독교인들의 부족함을 지적하면서 자기의 의로움을 은근히 내세웁니다. 

기독교인들의 언행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모범이 되어야 하지만,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다 성숙한 신자인 것이 아니고 미숙한 단계에 있는 신자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누구나 도덕적으로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과 자신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자기를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평생 전혀 죄를 짓지 않고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한 사람인들 있을까요? 만약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과 남을 속이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믿기 전에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감히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빛나는 광채 앞에 엎드러졌고 시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하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 때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심 받은 메시아이신 것을 알게 되었고 자기가 얼마나 무서운 죄를 범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다메섹의 어느 골방에서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고, 주님의 은총을 입어 다시 눈을 보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자기의 생애를 바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의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마음눈을 열어주시자 자기의 추악한 실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탄식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고 했습니다. 율법에 비추어 흠이 없노라고 자부하던 사람의 입에서 이런 탄식이 터져 나왔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를 구제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라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교회 생활을 오래 했더라도 이 사실을 절감하지 못했다면, 아직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취미 삼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가 선용으로 그저 한번 믿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그것도 영원한 생명이냐 영원한 파멸이냐를 결정짓는 심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5)…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리 인생들의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셨을 리가 만무할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의 죽음이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예수님을 미워한 유대교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기득권층의 이해관계 때문에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로마 총독 빌라도나 로마 군병들은 말하자면, 조연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요,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대속의 죽음을 죽을 것을 미리 아시고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그 이튿날 아침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르시기를 “48)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희생하실 것을 미리 다 알고 계셨으며, 공생애 내내 그 결정적인 때를 위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셨다는 사실은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를 말해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은 우리의 죄가 그만큼 크고 심각하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목숨을 버려야 할 만큼 죄는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하게 주님을 믿는 사람은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에 대한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대속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대속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어 장사 되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대속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죽고 살지 못하셨다면 그 분이 인류의 구세주시라고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덤에 장사되신 지 삼일 만에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셨으므로 만민의 구주이신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 같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죄 많은 옛 사람이 죽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우리가 새 생명으로 함께 부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를 대하실 때 자연인 아무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대하십니다. 로마서 8장에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하신 말씀은 예수 믿는 성도들을 위한 해방 선언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완전무결한 사람들이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약점과 부족함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아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대홍수가 나서 모든 사람들이 다 물에 빠져 죽었으나 방주 안에 있었던 노아의 식구 여덟 사람은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인품이 고상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방주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결점이 있고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의 공로는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점차적으로 인격이 성숙해진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는 과거에 자랑거리로 여겼던 가문, 학벌, 사회적인 신분, 지식, 의로움, 종교적 열심 따위를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하였으며, “…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고 했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은혜를 아는 성도들은 사도처럼 오직 예수님만 자랑합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한 것도, 많은 봉사를 한 것도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내세우는 자랑이 될 수 없으며 다만,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 종교들은 인간의 공로를 구원의 중요한 수단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람은 스스로 도를 깨닫고 선을 쌓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깨닫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밖에 없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신 대로, 예수님 한 분만이 인류의 구주이십니다. 

우리가 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밖에 없으며,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 개인의 의로움이나 선행, 자질, 노력 따위는 구원을 받는데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의지하는 사람은 오히려 주님을 올바로 믿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스스로 지혜롭고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구원의 방법이 너무 단순하고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단순함과 쉬움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베풀어주신 지극한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낫 놓고 기역자를 모르는 사람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흉악한 살인강도도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사함 받고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 중 한 사람은 주님을 향하여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라고 한 마디 부탁드린 것밖에 없으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만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세주로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성도님들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한 결코 정죄함이 없고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살아가실 뿐 아니라, 아직도 인간의 노력과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얻는 줄 알고 있는 불신 이웃들에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 도리’를 부지런히 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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