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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주소 (창 27:3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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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주소 (창 27:30-45)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약속대로 100세에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의 나이는 90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의 이름을 이삭(웃음)이라고 지었습니다. 이삭은 성품이 온순했고 농업에 종사하여 전형적인 유목민의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40세 때 종형 브두엘의 딸 리브가를 아내로 취하여 60세 되던 해에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게 되었습니다. 에서는 성격이 용맹하고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야곱은 반대로 지혜가 예민하고 집에서 양치기를 좋아했습니다. 야곱은 어느 날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올 때에 주린 기색을 살피고 떡과 팥죽 한 그릇으로 형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샀습니다(창 25:34).

이삭이 108세의 일기로 헤브론에서 그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의 마지막을 정돈하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이삭이 에서를 불러서 네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면 먹고 축복하여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 모친 리브가가 듣고 야곱을 에서의 모양으로 변장시켰습니다. 그리고 야곱과 함께 진미를 만들어서 사냥 간 에서가 들어오기 전에 먼저 아버지에게 들어갔습니다. 야곱은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하는 부친을 속여 에서가 받을 축복을 모두 받고 말았습니다. 

축복은 인간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리시는 행복과 번영입니다.

요한복음 3장 27절에 『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고 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축복 자체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의 모든 생활에 미친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신 28:1-6).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에게만 있는데도 인간이 축복을 구하는 것은 그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노아가 셈에게 축복한 것(창 9:26)이나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것(창 27:27-29)이나 야곱이 요셉과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한 것(창 48:15-16)과 아론의 축복기원(민 6:24-26)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을 기원하는 일은 확실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축복을 기원하는 일은 족장시대에는 족장이나 가정의 대표자가 했습니다. 출애굽 이후부터는 가족 대표자 및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이 그 일을 전담한 것으로 여겨집니다(레 9:22, 신 10:8, 대하 30:29). 또한 축복은 신적 권위를 가졌기 때문에 한번 선포되면 결코 취소될 수 없습니다(창 27:30-38).

신약시대에 와서는 좀 구체적으로 실시되었습니다. 회당에서 식사 전후에 꼭 기원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서신서에서 서두와 말미에 사도들이 반드시 축복을 기원했습니다.

사냥에서 에서가 돌아 왔을 때는 이미 야곱에게 축복한 후였습니다. 에서는 동생에게 빼앗긴 축복이 원통해서 방성대곡하며 말하기를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입니까"하고 소리치며 울었습니다. 이때 아버지 이삭이 입을 열어 야곱과는 정반대되는 이른바 에서의 주소를 일러주었습니다. 이 주소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장소적인 개념뿐만 아니라 다분히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여기 "너의 주소"에 해당하는 모샤베카는 야샤브라는 동사에서 유래했습니다. 
야샤브는 "앉다, 거주하다, 무엇의 안에 있다, 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부친 이삭이 에서와 야곱의 두 아들의 주소住所(address)를 선언한 것은 주소가 거주지, 생활의 본거지라는 사전적 의미 뿐만은 아닙니다. 다분히 미래에 주어질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축복과 각각 다른 영적 위상을 두고 한 말입니다. 

Ⅰ. 에서의 주소입니다.

이삭이 에서의 주소를 선언하는 것은 불가항력적입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아무 것도 빌어줄 것이 없었습니다(37절). 이것은 이삭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아픔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1) 하늘 축복이 끊어짐입니다.

본문 27장 39절에 『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뜬다는 말의 의미는 "떠났다"는 뜻입니다. 그 후에 에서의 자손들은 세일 산지에서 살았는데 과연 그 땅은 실제로 마른 땅이요, 박토였습니다.

2) 축복을 관망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8장 6절에 『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취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에서는 야곱이 축복 받는 것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낸 목적은 그 외삼촌 라반의 딸들을 아내로 취하도록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야곱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여자를 취하지 않게 하려고 멀리 밧담아람까지 보내게 됩니다. 이방인 여자를 아내로 취한 에서는 자기가 축복 받지 못한 것이 여기에 있는 줄 알고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이스라엘의 딸을 아내로 취하였으나 이미 늦었습니다. 에서는 야곱의 축복을 옆에서 구경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 칼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본문 27장 40절에 『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라고 했습니다. 이 예언과 같이 에서의 족속은 다른 족속을 약탈하며 피를 보며 살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그들은 사납고 거칠었습니다. 칼은 손에 잡는 것입니다. 손에 잡힌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것 밖에 믿을 것이 없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장차 자기 것 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는 피 흘리는 고난의 삶을 말합니다. 세상에서는 일시적으로 칼이 의지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칼은 의지할 대상이 못되는 것입니다.

4)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되는 것입니다.

본문 27장 40절에 『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관습에 장자는 아버지로부터 상속을 다른 아들보다 갑절을 받았습니다(신 21:17).
그리고 장자는 아버지의 전통을 계승하고 모든 동생들의 통치자로 섬김을 받습니다.
그런데 장자가 동생을 섬기게 되니 이것은 순리가 아니고 역리이며 축복이 아니고 저주입니다.

5) 피 흘리는 투쟁적 삶이 불가피하다는 말입니다.
본문 27장 40절에 『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러나 네가 힘을 얻게 될 때에 네 목에서 그의 멍에를 부숴버릴 것이다로 의역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에서의 후손들이 평화적 방법이 아니라 피 흘리는 투쟁의 결과로 자유를 회복하게 된다는 예언적 선언입니다. 피를 흘려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Ⅱ. 야곱의 주소입니다.

야곱은 에서의 동생입니다.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1) 하늘의 축복입니다.

본문 27장 28절에 『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고 했습니다. 비가 적은 팔레스틴 지방의 이슬은 농사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땅의 기름짐은 옥토를 가리킵니다. 포도주와 곡식은 농산물 중에서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삭은 인간에게 필요한 물질적 번영과 풍요로운 삶을 야곱에게 축복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물질적 풍요는 축복입니다.
시편 37편 19절에 『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라고 했습니다.

2) 장자의 축복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에 『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고 했습니다.

본문 27장 29절에 『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主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에게 굴복하게 됨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들이 사는 땅입니다. 나중에 야곱의 후손 다윗이 에돔을 정복함으로 이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사무엘하 8장 13-14절에 『 다윗이 염곡에서 에돔사람 일만 칠천을 쳐 죽이고 돌아와서 명예를 얻으니라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고 했습니다.
비록 야곱이 인간적인 지혜와 방법으로 축복을 받았지만 그가 받은 축복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야곱의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신명기 4장 38절에 『 너보다 강대한 열국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시편 2편 8절에 『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사실입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 『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고 했습니다.

3)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축복입니다. 
본문 27장 29절에 『 …네가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말씀을 그대로 반복했습니다. 야곱의 후손 다윗의 뿌리에서 메시야가 태어남으로 이 말씀이 성취되어 갔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즉 축복하는 자는 구원의 축복을 받고 그를 믿지 않는 자, 즉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아 사망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현재요, 미래요, 과거였습니다. 이것은 불가항력적인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의 주소가 이삭의 주소라면, 이삭의 주소가 야곱의 주소라면, 야곱의 주소가 유다의 주소라면, 유다의 주소가 오벳의 주소라면, 오벳의 주소가 이새의 주소라면, 이새의 주소가 다윗의 주소라면, 다윗의 뿌리에서 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주소는 곧 야곱의 주소입니다. 


Ⅲ. 우리의 주소입니다.

1)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축복입니다.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땅에 축복입니다. 자손의 축복입니다. 기업의 축복입니다.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축복입니다.

2) 영적 장자의 축복입니다.

고려신학교의 설립은 해방 후 하나님이 이 땅에 허락하신 바른 신학운동, 바른 교회운동, 바른 윤리가 현실로 나타나는 운동이었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던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등이 해방과 함께 출옥했습니다.

한상동 목사는 고향으로 내려가기 전에 서울에 들러 해방 후 남한 교회 최초로 소집된 남부총회를 참관했습니다.
남부총회 참관은 그의 교회 재건의 옥중구상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남부총회는 교회적으로 또 다른 중대한 공죄를 범했습니다. 첫째, 제 27회 총회가 범과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한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이는 성경과 장로교 헌법이 명시한 개인적 범죄는 개인이 회개하고 공적으로 범죄한 것은 공적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교회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둘째, 조선신학교를 남부 총회 직영신학교로 가결한 것입니다.
일제의 비호 아래 성장한 조선신학원을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교 전신)로 개칭하여 남부총회 직영신학교로 승격시킨 것은 남부총회 총대들의 영적 무지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입니다.

한상동 목사는 주남선 목사와 신학교 설립을 합의하고 1946년 4월에는 만주동북신학교 교수였던 박윤선 박사를 만나 이견을 조율했습니다.
그 해 5월 진해로 내려가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 손양원 목사들과 더불어 신학교 설립에 대한 합의를 보았습니다. 5월 20일에 신학교 설립 기성회가 조직되고 그해 진해 하사관 훈련수련관에서 박윤선 목사를 강사로 하여 6월 23일부터 8월 23일까지 만 2개월 동안 하기신학강좌를 개최한 것이 고려신학교 태동이었습니다.

이 신학교는 명실공히 옛 평양신학교를 계승하는 사명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장로교를 대표할 수 있는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추대할 것을 결의하고 1946년 7월 남영환 전도사를 교섭위원으로 파송했으나 이 일이 지연되자 1946년 9월 20일에 박윤선 목사를 교장 서기로 하여 부산진에 있는 일신여학교 교실 하나를 빌려 고려신학교를 개교했습니다. 
한상동 목사는 이때를 가리켜 돈 없이, 집 없이, 인물 없이 한 신학교라고 회고했습니다.

고려신학교는 명실공히 한국교회 진리운동의 산실로 자리를 잡아왔습니다.
그러나 고려파는 여러 가지 이해관계로 시끄럽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고려신학교는 이른바 헤게모니 쟁탈로 인해 급기야는 불신 법정소송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믿는 형제끼리 불신 법정에 송사하지 못하도록 한 고린도전서 6장 1-11절을 지적하면서 제 23회 총회(1973. 9. 18.)가 정회되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석원태 목사, 하창권 목사등이 고소를 반대한다는 성경의 뜻을 따라 반고소反告訴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75년 10월 27일 서울에서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하고 1975년 11월 25일 본격적으로 복교 추진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1976년 10월 19일 마침내 반고소 고려측 총회가 발족되었습니다. 1970년 12월 31일 부로 고려신학교가 폐교되고 일반 지도자 양성을 위한 고신대학으로 문교부에 인가되면서 반고소 고려측은 옛 고려신학교 이름을 되찾아 신학과 전통을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3) 원천 고려파 정신으로 재무장한 갈보리교회 운동의 축복입니다.

갈보리교회는 개혁주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신행일치의 순교적 신앙이 갈보리교회의 궤도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명한 바른 윤리적 삶을 절대 지향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벧후 1:3,5; 롬 14:19, 15:2, 고전 8:1, 10:23, 14:3,4,5,17, 26, 엡 4:29, 살전 5:11). 앞서간 신앙의 조부들의 족적이 그의 후손들에 의해 오늘의 잣대로 재평가 되는 현실입니다. 앞서간 선조들의 족적을 오늘의 잣대를 가지고 무참하게 만들어야 의로운 대접을 받는 참혹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서는 장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장자의 명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야곱이 죽을 쑤어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과 바꾸자고 제의했습니다(창 25:31). 
창세기 25장 34절에 『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고 했습니다.
주일날 학원 보내고 쓸데가 생겼다고 십일조 떼먹고 하는 일이 곧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파는 것입니다.

야곱이 받은 축복은 우리가 받은 축복입니다. 하늘에서 이슬이 내리고 땅이 기름져서 심은대로 거두는 옥토가 우리의 주소입니다. 이것은 근원적인 축복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활동무대가 옥토입니다.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가는 곳에는 하늘에서 이슬이 내리고 땅이 기름져서 수확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칼을 의지하고 살 수 없습니다. 칼을 믿고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손에 잡힌 것,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리는 것은 유물론의 사고방식입니다. 피를 보면서 칼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축복을 받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축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우리의 주소입니다. 

땅을 주겠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주소입니다. 자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겠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주소입니다. 너를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 우리의 주소입니다. 영적 장자의 축복이 우리의 주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갈보리 교회 운동이 우리의 주소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우리가 받은 직분이 우리의 주소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약속을 믿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주소입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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