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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울림 (잠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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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림 (잠 18:1-5)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하고,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을 적대시한다. 미련한 사람은 명철을 좋아하지 않으며, 오직 자기 의견만을 내세운다. 악한 사람이 오면 멸시가 뒤따르고, 부끄러운 일 뒤에는 모욕이 따른다. 슬기로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세차게 흐르는 강처럼 솟는다. 악인을 두둔하는 것과 재판에서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일은 옳지 않다.]

• 마주 잡을 손 하나

잎이 붉게 물든다 하여 ‘잎 붉은 달’이라 칭하는 10월의 첫 주일 아침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우리 마음도 붉게 물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끔 우리 마음이 너무 창백하고 파리하게 변해버린 것은 아닌가 싶어 쓸쓸해질 때가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노라면 참담한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갈등을 부추기는 천박한 말과 관음증적 호기심이 난무합니다. 대결과 대립, 냉소와 조롱의 말이 넘칩니다. 그 말이 꼭 우리 개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해도 우리는 그 말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괜히 옆에 서 있다가 오물을 함께 뒤집어 쓴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우리 영혼은 퍼렇게 멍들었습니다. 그 멍든 영혼을 주님 앞에 자꾸만 내려놓지 않으면 우리 또한 괴물로 변해버릴지도 모릅니다.

작고한 시인 고정희는 <상한 영혼을 위하여>라는 시에서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뿌리 깊으면야/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고 노래했습니다. 시인이 고통을 부둥켜안자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세월이 아무리 어두워도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주잡을 손이 없을 때, 인생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 됩니다. 살다보면 누군가 나에게 마주잡을 손 하나가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랄 때가 있습니다. 그 손은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하나님일 수도 있습니다. 얼음처럼 차가워진 손을 잡아 따뜻하게 녹여 줄 손 하나 있으면 세상은 그런대로 살만한 곳이 됩니다. 많은 종교인들과 시민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현장에 나아가 어려운 이들 곁에 서 있는 것은 서러운 이들의 손을 잡아주기 위함입니다.

• 독선과 배타를 넘어

오늘 본문은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하고,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을 적대시한다”고 가르칩니다. 사귐에 다소 굼뜨거나 소극적인 사람들에게는 좀 불편한 말입니다. 노는 일에 이골이 난 사람들은 어쩌면 이 구절에 밑줄을 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위축될 것도 없고, 우쭐할 것도 없습니다. 이 구절은 소극적인 사람들을 정죄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울림이란 한데 섞이어 조화롭게 되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도시의 풍경 하나가 떠오릅니다. 아이들이 친구 집 앞에 우르르 몰려가서 외칩니다. ‘000야, 노올자!’. 마을 공터에서 놀던 아이 하나가 엄지손가락을 세운 채 외칩니다. ‘술래잡기 할 사람 여기 붙어라!’ 참 정겨운 풍경입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어울림에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흉허물 없이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자꾸만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저는 1절을 이렇게 바꾸어 읽어봅니다.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하고,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을 적대시하는 사람은 어울려 사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이 있습니다만, 진짜 어울림의 명수들은 자기와 다른 이들까지도 기꺼이 품어 안는 사람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교회를 가리켜 ‘무지개 공동체’라 했습니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은 서로 다른 색들이 한데 어우러지기 때문인 것처럼, 교회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이들이 만나 조화를 이룰 때 교회다워집니다. 

어울림의 반대는 독선과 배타입니다. 독선과 배타의 뿌리는 자기 애(self-love)입니다. 독선적인 사람일수록 자기 의(self-righteousness)가 강합니다. 자기 의는 예수님이 가장 미워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당사자를 망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가슴에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매에 맞으면 자국이 남지만 혀에 맞으면 뼈가 부러진다.”(집회28:17) 경외서인 집회서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오늘 본문도 같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명철을 좋아하지 않으며, 오직 자기 의견만을 내세운다.”(2)
“악한 사람이 오면 멸시가 뒤따르고, 부끄러운 일 뒤에는 모욕이 따른다.”(3)

‘쓸모와 유용성’이 거대한 우상이 되어 모든 이들에게 숭배를 강요하고 있는 시대는 품성이 고귀한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 살기에 우리 마음은 늘 퍼렇게 멍이 들어 있습니다. 치유책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잘 놀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현실의 필요성 때문에 힘겹게 일을 하거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온 힘을 집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일만 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리산지리산 비틀거리지 않으려면 아무런 현실적인 목표 없이 지내야 하는 시간, 곧 無爲의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18세기 말의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Schiller, 1759-1805)는 자유롭게 노는 일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자가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고 어떤 맹수와도 싸울 필요가 없을 때면 남는 힘이 스스로 하나의 대상을 만들어냅니다. 사자의 힘찬 포효는 초원을 울리고 이렇게 목적 없는 낭비에서 사자는 여분의 힘을 스스로 즐기는 것이지요. 곤충은 햇빛 속에서 웅웅거리며 즐거운 삶을 누립니다. 새의 노래 선율에서 우리가 듣는 것은 욕구의 외침만은 아닙니다.”(실러, <미학 편지>, 휴먼아트 출판사, 안인희 역, p.205)

잘 놀 때 우리 속에 깃든 무거움이 사라집니다. 우리에게 감춰져 있던 능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구체적인 목적 없이 놀이를 할 때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아름다움과 마주치게 됩니다. 놀이는 우리를 짓누르는 현실의 중압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줍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서 놀이를 위한 시간과 공간을 빼앗아가는 일은 그야말로 생명에 대한 폭력이요 낭비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 하면서 우리는 아이들의 생명을 호리병 속에 가둡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아름다움에 반응할 줄 모르는 사이보그적인 인간을 양산해냅니다. 지혜로운 듯 하나 미련한 자들이 참 많습니다.

• 몸에 배어든 하늘

자기 의견만을 내세우는 미련한 사람과 대조되는 것은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잠언 기자는 슬기로운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슬기로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세차게 흐르는 강처럼 솟는다.”(4)

‘슬기’는 사리를 밝히고 잘 처리해 가는 능력을 일컫는 순 우리말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말 가운데 ‘슬금하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속으로 슬기롭고 너그럽다는 뜻입니다. 슬기로움에는 너그러움도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너그러움은 마음이 넓고 크다는 뜻이니, 편협함과 대조되는 말이라 보면 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야말로 슬기로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라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말이나 행동을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체에 걸러서 내놓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말은 깊은 물과 같습니다. 깊은 물은 쉽게 찰랑거리지 않습니다. 고요하게 흘러 만물의 어미가 됩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의 어떤 가뭄을 만나도 쉽게 고갈되지 않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샘물이 솟구쳐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는 제자들을 보고 학식 많던 의회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누가는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행4:13)

지혜는 배워서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에 저절로 배어든 ‘하늘’이고 ‘내면의 빛’입니다. 누가 그들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8:1)고 말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덕을 세우는 사랑 그리고 지혜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함께 어우러짐을 통해 우리 속에 깃든 아름다움과 형제자매들의 가슴에 깃든 신성함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편협하고 이기적이었던 마음이 넓어져 누군가의 품이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어우러짐을 통해 캄캄한 하늘 아래 서 있는 이들에게 마주 잡을 손 하나가 되어주는 배우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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