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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수된 것을 소멸한 십자가 (시 18:16-18, 엡 2: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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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된 것을 소멸한 십자가 (시 18:16-18, 엡 2:14-18) 
 
일본의 소설가 시가 나오야(志賀直哉)를 사람들은 ‘소설의 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일본 근대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다이쇼(大正) 시대의 걸출한 작가입니다. 그의 소설 가운데는 ‘화해’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소설 이상의 소설이라고 격찬했던 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주제는 자신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바로 잡을 수 있었던 화해의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소설에서 “불화의 원인을 쓰려면 한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화해’는 주인공이 아버지와 충돌하면서 격앙되고 번민하다가 마침내 화해라는 매듭을 짖게 됩니다. 시가 나오야는 오랫동안 꼬이고 꼬인 일신상의 문제인 아버지와의 불화가 1917년 8월 30일 갑작스레 풀리므로 부자는 진심으로 화해하게 됩니다. 

이 화해의 감동이 생생한 9월 초부터 펜을 잡고 단숨에 작품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잦은 출장 때문에 아버지와의 정이 없었습니다. 그는 3세 때부터 조부모의 양육을 받았습니다. 13세가 되었을 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성장과정에서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차게 되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관계는 극적으로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화해한다는 것은 원수 된 것을 다 없이하고 먼 사이가 가까운 사이로 회복됨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3:15에는 최초의 ‘메시야 예언’이 나타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와와 뱀은 타락과 에덴에서 추방되므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뱀을 용서와 화해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은 불 뱀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물게 하시고 물린 자가 다 죽게 되었지만 장대 높이 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원수를 소멸하시고 이미 다 이기셨습니다. 
  
화해란 타자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죄를 용서받는 조건이 된다는 것을 아는 일입니다. 철학자 헤겔은 화해란 일종의 근본적인 덕으로 중시하였습니다. ‘법률용어사전’에는 화해란 “분쟁 당사자가 서로 양보하여 당사자 사이의 분쟁을 종지할 것을 약정함으로써 성립하는 계약이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화해는 분쟁을 종식하는 일입니다. 남의 잘못을 용서하고 자신의 권리를 양보하는 것입니다. 화해란 결국 원수 된 것을 없이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모형을 보면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무거운 휘장이 길게 쳐 있었습니다. 일 년에 한 차례 대제사장이 휘장 안으로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대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쫙 찢어졌습니다. 더 이상 막힌 담이 없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중간에 막힌 담을 십자가에서 자기 몸으로 소멸하셔서 담이 없게 하시고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소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십자가로 소멸하고 원수를 친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와 같은 사람들을 친구로 만드셨습니다. 베다니의 나사로에게도 예수님은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몸으로 허시고,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무거운 담을 헐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힘입니다. 원수가 사라지고 친구가 되는 것은 십자가의 힘입니다. 우리도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담이, 우리와 다른 사람 사이의 담이, 우리와 자연과의 담이 다 헐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육체로 막힌 담을 허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14에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된 것을 소멸하시는 화해자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리스도의 근본이 화평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탄생을 보세요. 누가복음 2:14에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합니다. 갈기갈기 분열되고 깨어지고 찢긴 이 세상에 평화를 주시려고 평화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세요. 이사야 53:5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합니다. 우리의 죄악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시고 죽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으시므로 우리로 하여금 평화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화평이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세요. 마태복음 28:9에는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들의 평안이었습니다. 평안이신 주님만이 주실 평안을 제자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죄는 분리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임마누엘입니다. 분리된 하나님과 사람이 다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다시 하나 되게 임마누엘을 이룬 것은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간에 막힌 담을 육체로 허시고 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땜질입니다. 결합입니다. 혼인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며 선지자입니다. 그는 사울과 다윗 두 왕을 친히 기름을 부어 세운 선지자입니다. 그는 여러 면에서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등장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의 사역은 ‘평화’였습니다. 사무엘상 7장에는 사무엘이 블레셋을 물리치고 빼앗겼던 땅을 찾습니다. 그리고 7:14에는 그의 사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화해란 싸움하던 것을 멈추고 서로가 가지고 있던 안 좋은 감정을 풀어내는 것입니다. 화해는 서로의 관계가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화목하게 하다”란 말의 헬라어는 ‘상태를 되돌려 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해란 뜯어진 것을 다시 꿰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항하는 마음을 되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싸늘히 식은 열정에 불을 지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처음 상태인 임마누엘의 상태로 되돌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사적 인물들을 볼 때도 화해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 국민의 갈등의 요인인 종교 문제 즉 이슬람과 힌두의 갈등을 해소하려고 무던 애를 썼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매일 아침 읽었다고 전해지며 산상보훈에 기록된 무저항주의를 늘 주장하였습니다. 

미국의 흑인 해방 운동가였던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흑백갈등을 해소하려고 애썼습니다. 그가 주도하던 워싱턴의 평화행진은 문자 그대로 평화를 위한 행진이었고 비폭력 행진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미국 남북의 갈등을 해소하려고 흑인해방 법을 제정하였습니다. 

남북전쟁이 끝난 다음 링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맙시다. 모두를 향해 사랑의 마음을 품읍시다.” 전쟁이 끝난 직후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말이었습니다. 이런 화해의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암살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을 주어 화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육체로 중간에 막힌 담을 허는 일에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해결’은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화해’는 관계에 초점을 맞춥니다. 화해에 초점을 맞출 때 문제는 그 중요성을 잃고 무의미하게 되어버립니다. 관계에 초점을 맞출 때에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아예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잘 부르는 복음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양은 금년 WCC 10차 부산총회에서 부르게 될 찬양입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각양의 인종과 교파와 신학이 있지만 십자가 안에서 헐리지 않을 담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람과 사람,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의 모든 담을 헐게 합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 둘이 하나 되게 하신 화평의 징표입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육체를 버리신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십자가는 하나님과 화목하려고 원수된 것을 소멸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16에는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원수라는 딱지를 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더 이상 ‘원수가 아니다’ 라는 선포입니다. 
  
죄란 하나님과 원수된 것입니다. 반면에 십자가는 죄를 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원수 된 것을 소멸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원수된 것인데 이 원수를 소멸해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는 뱀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될 것이고, 뱀은 여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죄를 지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모든 인류에게 응하여 사람은 원수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원수 된 것을 소멸하였습니다. 더 이상 원수가 아닙니다. 더 이상 원수가 아닌 것은 죽음이, 마귀가 원수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는 넉넉히 원수를 이기시므로 원수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이미 화해하여 원수를 친구로 바꾸셨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원한 승리의 표입니다. 
  
출애급기 15:6에는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부수시는 원수란 현실적으로는 이방나라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사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부수시어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사탄이 왜 사탄이 되었습니까? 타락한 천사의 무리가 사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겨루려고 하던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하나님께 대적하던 못된 무리들입니다. 타락한 영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방해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든 세상이 하나님께 원수가 되고, 하나님과 원수 되게 만든 장본인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천사가 타락한 사탄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선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편에서 일할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4:4에는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세상과 벗이 되는 사람은 하나님과 벗이 될 수 없고 원수가 됩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밝혀줍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합니다. 열왕기하 17:33에는 “여호와도 경외하고 자기 신도 섬겼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0:21에는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말라”고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은 함께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려고 하는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입니다. 원수인 세상과 함께 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런 원수 됨을 소멸하는 힘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알면 더 이상 세상의 편이 되지 않고, 세상과 짝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성경은 여러 번 경고합니다. 구약에서는 ‘네가 나를 버렸다’고 합니다. ‘이방 신과 행음하였다’고 합니다. ‘나를 버리고 네 길을 갔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원수 됨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는 ‘큰 아들은 포도원에 간다고 하고서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인의 아들을 죽인 불의한 청지기’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서 자기의 뜻대로 하는 탕자’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화해하려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친히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기의 육체를 드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시고 모든 죄의 문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원수 갚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서로 싸우고 죽이는 것입니다. 모든 전쟁이 신의 이름으로 할 때가 가장 치열합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기독교 전쟁 같은 전쟁은 없습니다. 유럽의 ‘30년 전쟁’은 종교전쟁에서 시작하여 정치전쟁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얼마나 지독하게 싸웠던지 독일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고, 이 전쟁으로 유럽 대륙은 황폐하게 변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원수 갚는 방법은 어떠했습니까? 죽이고 죽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살므로 원수를 무력화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십자가를 통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이깁니다. 원수를 사랑으로 녹여 이기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항상 원수에 대하여 좋은 말만 하는 링컨 대통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어떤 사람이 대통령에게 항의하였습니다. “원수는 없애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링컨은 웃으면서 “옳습니다. 없애야 하구 말고요. 저도 바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원수를 친구로 만들어 원수를 없애버리는 걸요”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원수를 친구로 만드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는 더 이상 원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원수를 이겨서 없애고, 원수를 친구로 만들어 원수를 없애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27년간 로빈 섬 감옥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한 넬슨 만델라는 출옥 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는 변함없는 국민의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억압한 사람들에게 원한을 갖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만델라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원한을 가질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를 소멸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결론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어느 병원에 한 젊은 남자 환자가 에이즈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청소년시절 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문제아로 취급되었던 사람입니다. 부모도 그를 찾지 않을 정도로 막된 삶을 살았습니다. 온몸에 문신이 가득하고 폭력조직에도 가입하였습니다. 문란한 성생활 때문에 에이즈에 걸려 온몸이 뼈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집을 뛰쳐나와 거리생활을 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음이 준비되지 않아 눈을 감지 못합니다. 병원의 원목 목사님이 그를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의 손을 잡고 눈으로 무엇인가 말을 하고 있는 환자에게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환자는 “아버지와 화해하고 아버지의 용서를 받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목사님은 수소문하여 아버지의 소재를 찾았습니다. 

마침내 병실에 들어선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아들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아들아, 사랑한다”고 아버지는 나지막하게 속삭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라고 숨을 몰아쉬며 말했습니다. 아들의 그 말에 아버지는 “아들아, 이미 용서했다”라고 화해의 말을 전합니다. 이 말을 듣고 아들은 얼마 후 조용히 아버지의 품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아버지와 화해한 아들이 평안하게 숨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용서와 화목은 십자가의 영원한 힘입니다. 
  
칼 메닝거는 많은 정신병이 용서와 관계된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서로 용서하면 전 세계 정신병원의 70%가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정신병을 고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병을 다 고칩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육신의 병을 고칩니다. 정신의 병을 고칩니다. 영혼의 병을 고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막힌 것을 헐고, 원수된 것을 다 소멸하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의 삶을 사는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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