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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에 보이는 땅 (창 13: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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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땅 (창 13:14-18)
 
음치라는 것이 있지요?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음치입니다. 완벽하게 음을 잡는 사람은 드뭅니다. 가수가 비브라토를 내는 이유를 아마도 정확한 음에 근접하기 위한 본능적인 시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간의 귀로 완벽한 음을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목소리의 떨림 범위 안에서 정확한 음에 도달하기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현악기의 비브라토도 같은 원리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그럼 음치가 심한 사람의 이유가 뭡니까? 자기 목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기 귀로 자기 목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음이 틀려도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치 교정 학원 같은 데를 가면 머리에 큰 통을 씌우고 그 속에 들어가 자기 목소리의 울림을 듣게 한다고 합니다.

더 좋은 음악을 만드는 비결이 무엇이냐? 더 좋은 음이 귀에 들리면 됩니다. 지금 내가 음악을 만드는 방법보다 더 좋은 음, 더 좋은 멜로디, 더 좋은 화음이 들릴 수 있다면 더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음이 들리지 않는다면 더 나은 음악을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림을 그립니까?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립니다. 손재주도 있어야 되겠지만 먼저 자기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가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를 좌우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미술학원에 다녔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저보고 건물을 그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렸어요. 그걸 보고는 저희 어머니가 벽돌이 이렇게 생기지 않았느냐고 지적하셨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내버려 두라고,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야 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 때는 뭐가 문제였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하니까 벽돌은 서로 엇갈리게 쌓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는 그게 제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국내 미대에 지원하는 학생들이 그리는 그림을 보면 다 똑같아 보인다고 하지요. 그 이유는 미술학원에서 다 똑같이 가르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원래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야 되는데, 학원교육이 다 똑같이 보도록 교육을 하기 때문에 다 똑같은 그림을 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창의력을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너는 마음에 무엇을 느끼느냐?’는 질문에 정답이 없는 것처럼 ‘네 눈에 무엇이 보이느냐?’는 질문에도 정답이 없습니다. 각자 보는 것이 정답입니다. 다 똑같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럼 교육이 무슨 필요가 있다는 말이냐? 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학생들로 하여금 더 풍성하게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그렇게 훌륭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생각의 범위를 넓혀 주는 선생님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주입식 교육의 단점은 학생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느냐에는 관심이 없고, 선생님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느끼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보라고 지시하신 것이 아니고 어디를 바라보라고 지시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좌우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은 어느 쪽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고 그리고 아브라함의 눈에 보이는 땅을 그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눈에 보이지 않으면 할 수 없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만큼, 그의 보는 대로 아브라함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보이는 만큼, 보이는 대로.

우리는 우리 자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들이 원할 리도 없고, 믿을 리도 없습니다. 사람 눈에 무엇이 보이느냐 하는 것은 각 사람의 몫이에요. 사람마다 다릅니다. 

우리는 남이 무엇을 보느냐를 염려하지 말고 내 눈에 무엇이 띄느냐를 보고 좇아가면 됩니다. 뭔가가 보여야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무언가가 보여야 의욕이 생기고 동기가 생기고 목표가 생길 것입니다. 신앙교육도 마찬가지에요. 믿어지지 않는데 믿어지지 않는 사람에게 신앙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가 믿어져야 됩니다. 무언가가 느껴져야 됩니다. 무언가가 감동이 와야 신앙교육이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이 수십 년 동안 교육을 받았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캐나다의 총리였던 피에르 트루도는 맥길 대학에서 공부하고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런던 정경대에서도 공부했지만, 그는 공부를 마친 후에 세계 여행을 했습니다. 돈을 많이 들고 다니는 여행이 아니고 제대로 비자도 없이 다니는 여행입니다. 

그의 전기를 읽어보면 여행하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을 찾아 갔습니다. 즐기기 위한 여행이 아니고 세상을 보기 위한 여행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정치에 뜻을 두고 입문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쳐줄 수 없고 우리가 세상에서 직접 부딪쳐 보기 전에는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참 좁아요. 이 좁은 땅에서 서로 부딪치며 사는 한, 눈에 보이는 것은 사람밖에 없어요. 여러 군데를 다녀 보고 느껴야 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쪽으로도 다녀보고 저쪽으로도 다녀보고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봐야 됩니다. 

취업이 어렵다고 말하지요. 그 이유는 아마도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자기가 원하는 직장을 찾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교회 청년 중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취업한 청년이 있는데 저의 페이스 북 친구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신발 속에 전갈이 들어가 있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아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취업하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 더운 곳에서, 가족을 떠나서 왜 일하느냐?’ 그러나 돈이 있는 곳에 기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시대에 돈은 아라비아와 두바이 같은 나라에 있습니다.

배우자 찾기가 어렵다고 말하는데 그것 역시 내가 사는 지역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인구의 반이 남자고 인구의 반이 여자인데,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수녀원에 살고 있다면 모르지만 이상한 것입니다. 여자의 경우에는 남자가 찾아오길 기다리지 말고 남자들이 많은 데로 가면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쪽만을 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다 바라보라고 하셨어요. 한쪽만을 주는 게 아니고 동서남북을 다 바라보고 네 눈에 보이는 것을 너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보라고 요구하신 것은 아니고 아브라함 눈에 보이는 것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합리적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성격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합리적이에요. 왜냐하면 우리 눈에 보이는 않는 것에 대해서는 미련을 가질리 없기 때문이에요.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대로. 

제 동료 목사님 한분은 사모님과 맞선을 볼 때 처음에는 인상이 별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자에서 일어났을 때 보니까 사모님이 키가 크더래요. 그 한 가지가 마음에 들어서 결혼했습니다. 그게 눈에 들어온 거예요. 그게 본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고 그것이 마음에 들어서 결혼했어요.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미련이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무엇이 보이느냐 그것이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우리 눈에 무엇이 보인다는 말은 그것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 눈에는 안 보이는데 남의 눈에 보인다면? 그건 내 몫이 아니고 그 사람의 몫이라는 얘기이고 남의 눈에는 안 보이는데 내 눈에 보인다면? 그건 내 몫이라는 뜻입니다.

교회 성도님 중에 한 분이 ‘목사님, 우리교회 청년들을 위하여 결혼 세미나를 엽시다.’라고 제안한 분이 계셨습니다. 젊은이들이 그런 것이 필요하고 젊은이들을 모으는데 필요하다고, 그 필요가 그 분의 눈에 보인 것입니다. 제 눈에는 안 보였는데 그 분의 눈에 보였기 때문에 저는 그분에게 그 일을 일임했습니다. 왜냐하면 필요를 보는 사람에게 그 일을 할 만한 의욕이 있고 비전이 있기 때문이에요. 

반대로 제 눈에는 유학생들을 위한 세미나를 열어야 될 필요가 보였습니다. 남이 본 게 아니고 제가 본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세미나를 계획하고 추진할 수 있는 의욕과 지혜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왔습니다. 그리고 성황리에 그 세미나를 치룰 수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에 방문했을 때 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 아십니까? 오토반이 들어왔어요. 눈에 독일의 잘 만들어 놓은 고속도로가 들어와서 귀국한 후에 무엇 건설을 시작했습니까? 경부고속도로. 남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자기 눈에 그것이 보였다는 사실은 가능성을 시사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눈에 무엇이 보입니까? 무엇을 보기 위하여 남들보다 특별한 기회를 얻어야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데가 아니고 ‘너의 있는 그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남들보다 더 많이 보기 위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야 되는 게 아니에요. 

그건 반칙이에요. 있는 곳에서 얼마든지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있는 곳에서 보인지 않는다고 높은 데에 올라간다고 보인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있는 곳에서 안 보인다면 다른 곳에 간다고 보인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선교의 비전을 얻기 위해 비전트립 가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다른 데를 가면 비전이 보일까 생각한다는 얘기인데 지금 있는 곳에서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면 다른 데를 간다고 비전이 보인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재벌 3세들의 공통점이 뭡니까? 하나같이 미국에서 MBA를 하고 온다는 거예요. 정작 창업자인 할아버지는 MBA는 고사하고 유학도 다녀오지 않았지만 큰 기업을 세울 수 있었는데 시대가 바뀐 것이냐? 아니에요. 있는 곳에서 돈 벌 기회가 보이지 않는다면 MBA를 한다고 돈 벌 기회가 보이는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벌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데 시간을 벌기위한 교육은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가 지금 있는 곳을 업신여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함정에 빠집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여요. 남의 집 뜰이 더 푸르러 보여요. 그래서 ‘내가 이 좁은 구석에 갇혀 있는 바람에 아무 것도 안 보인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했는데 나도 더 넓은 데에 가면 더 많은 게 보이겠지.’ 그러면서 내가 있는 곳을 업신여깁니다. 나의 현재 직장을 업신여깁니다. 내가 지금 다니는 학교를 업신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사는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다른 곳에 간다고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우리가 밀라노에 간다고 더 창의적인 사람이 되는 게 아니고, 뉴욕이나 런던에 간다고 더 금융의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에 간다고 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게 아니에요. 장소에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중심에 비밀이 있습니다. 오히려 이곳에서 더 창의적인 사람이 되면 밀라노에서 모셔갈 것이고, 이곳에서 금융의 귀재가 되면 뉴욕에서 모셔갈 것입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내 옆에 하나님 음성 듣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문제에요. 롯은 어떤 사람이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 감각대로 판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롯은 소돔성에 물이 많은 것만 봤지 그 성의 죄악은 보지 못하고 소돔 성을 선택해서 떠나갔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런 사람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임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약속과 비전은 롯이 공유할 수 없고 동참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얘기에요.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후에 만일 제가 옛 친구와 친지들에게 연연했다면 저에게 일어나는 일을 저는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옛날 친구, 친지, 가족과 가까이 있고 싶지요. 그러나 새로운 기회, 발전의 기회를 좇으려 하다보면 과거의 친했던 사람과 헤어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따라오지 않을 것이고 따라 올 수도 없습니다. 롯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에 동참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렇다고 옛 친구들이 루저고 저는 위너라는 말이 아닙니다. 서로 갈 길이 달랐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목사님, 저는 아무리 쳐다봐도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이렇게 말씀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먼저 갈 사람을 가게 하면 됩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롯이 원하는 대로 가도록 양보했더니, 그제야 아브라함의 몫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몫이 롯이 차지한 것보다 더 크고 많았어요. 

읽지는 않았지만 9절에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하길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그 말은 먼저 선택권을 주었다는 얘기입니다. 남이 선수를 칠까봐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남이 먼저 시작하게 하세요. 남이 먼저 시집장가 가도록 하세요. 남이 먼저 좋은 학교 가게 하세요. 먼저 개척하게 하세요. 남이 가는 것을 축복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몫이 보입니다. 남이 먼저 가진 것보다 더 좋고 더 풍성한 몫이 보입니다. 남이 여러분의 몫을 빼앗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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