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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 (왕하 5:1-16) - 나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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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 (왕하 5:1-16)
     
오늘 본문에는 나병환자 나아만이라는 장군이 등장합니다. 나병이란 병은 생각하거나 말하기조차 싫어하는 끔찍한 질병입니다. 나병이란 병명은 일반적으로 Leprosy(레프러쉬)라고 하는데 학명은 ‘한센’병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문둥병이라고 불렀으나, 듣기도 거북하고 말하기도 상스러운 말이 되어,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살이 문등 문등 물러나고 썩어간다 하여 문둥병, 그런 사람을 문둥이라고 불렀습니다.

1874년 노르웨이의 한센(Hansen 1841-1912)이란 의사가 나균을 발견하면서 치료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런 훌륭한 의학자들이 있었기에 우리 사회는 건강하고, 잘 사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무서운 질병이 발생하여도 이를 물리치고 예방할 수 있는 길을 열어가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꿈과 소망을 가지고 인류평화와 복지에 이바지 하고 공헌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히브리어의 나병을 “차라아트”라고 하는데 ‘매’, ‘징계’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나병은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았다, ‘하늘의 벌’, ‘천의 형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나병에 들린 사람은 무조건 마을을 떠나서 외딴 동굴에서 살아야 하였고, 옷을 찢어서 자기가 나병환자인 것을 표시하고 먼저 부정한 사람이라고 외쳐야 합니다. 

나환자가 길을 가는데, 저 30m 앞에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나환자가 먼저 소리를 높여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 이렇게 세 번 이상 외쳐서 사람들이 자기를 피하여 지나가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돌을 들어 나병환자를 향하여 던지면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리로 들어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나병은 천의 형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질병입니다. 나환자의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어느 날 재봉을 하다가 바늘에 찔렸는데, 손가락 끝이 아프지가 않습니다. 나병을 진단하는 쉬운 방법은 감각소실입니다. 감각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픈 통증을 느끼는 것이 좋습니까? 아픈데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 축복입니까? 아픔을 느끼는 것이 좋습니다. 바늘을 가지고 손가락 끝을 찔러보세요. 아프면 건강한 사람입니다. 안 아프면 심각한 질병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픈 것을 축복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환자의 글을 보면 그가 소록도를 향하여 가는 중에 냇가에 발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감각도 없이 발가락이 하나 빠지더니 물에 떠나려갑니다. 그런 상황이 나에게 연출되고 있다면 끔찍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발가락 하나가 아무런 감각도 없이 빠져 나간다고 하면 아찔한 일입니다.

시인이며 소설가 중에 나환자 한하운(1920. 3. 20-1975. 2. 28)선생이 있습니다.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났습니다. 17세 때에 나병 확정 진단을 받았습니다. 치료를 받고, 중국 베이징대학 농학원을 졸업하고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중에 나병이 재발하여 사직하고 고향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1948년 월남하여 여러 시집을 내고 소설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천형의 병고를 가장 깊이 표현하므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보리피리가 있습니다. 

“보리 피리”

“보리 피리 불며 / 봄 언덕 / 고향 그리워 / 피 - ㄹ 닐니리. //

보리 피리 불며 / 꽃, 청산 / 어린 때 그리워 /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 인환의 거리 / 인간사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 피 - ㄹ 닐니리.”

‘인환(人?)’이란 ‘인간의 세계’라는 말이고, ‘기산하(幾山河)’라는 말은 산하가 그 몇 해인가? 라는 말입니다.


그의 시 중에 ‘전라도 길’ (소록도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전라도 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우리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가시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아람 나라 시리아제국에는 왕의 군사령관이요, 전쟁 영웅인 나아만이란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왕이 아끼는 신하요, 백성들로부터 존경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전쟁에 승리하고 시리아를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만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 불신의 나라도 축복하시고 있습니다.

나아만은 장군이요, 용사인데 그만 나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나병이라는 병은 무서운 병이지만, 예전에는 죽어야 하는 병이요, 이 병에 걸리면 사랑하는 사람도 떠나가고 함께 있기를 싫어합니다. 이 나아만은 나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의사의 치료도 받았을 것이요, 좋다는 약을 다 써보았지만 전혀 차도가 없고,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서서히 자기의 살이 문드러지고 썩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서운 공포였고, 하루 하루를 보내야 하는 것이 고통, 아픔, 실의 그 자체였습니다. 그동안 장군이 되었으면 무엇 합니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면 무엇합니까? 그는 더럽고 무섭게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의 집에는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소녀가 있었습니다. 아람이 군대를 일으켜 이스라엘 땅에 쳐들어갔을 때에, 그곳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잡아왔습니다. 그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를 시중들고 있었습니다. 그 소녀가 나아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소녀는 비록 원수의 나라에 잡혀 와서 종으로 살고 있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소녀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 여주인에게 말하였습니다. “주인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를 만나보시면 좋겠습니다. 그 분이라면 어른의 나병을 고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데, 이스라엘의 한 예언자를 만나보면 그가 고쳐줄 것이라고 하니, 만나봐야 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기에 찾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엔 군대를 몰고 쳐들어오던 나라인데, 그런 나라에 신세지러온다는 것이 여간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불치의 병 앞에 서고 보니 체면이나 국적이나 신분을 내려놓고 우선 고치고, 살고 보아야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은 그의 나라 아람의 왕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땅에 잡아온 여종이 한 말을 들은 대로 보고하였습니다.

아람의 왕은 기꺼이 이스라엘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왕은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써 보내겠으니, 가 보도록 하시오”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은 열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옷 열 벌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와서 수도 사마리아로 와서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에게 찾아왔습니다. 그가 가지고 온 돈은 약200억원 상당이라고 계산합니다.

나아만이란 장군이 왕에게 들어와서 시리아 왕의 친서를 내어놓았습니다. 그 편지에는 “내가 이 편지와 함께 나의 신하 나아만을 귀하에게 보냅니다. 부디 그의 나병을 고쳐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요람은 우상숭배하는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자라 그런지, 아무런 믿음도 없고, 나약하기만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요람 왕은 편지를 읽고 낙담하였습니다. 그는 옷을 찢으며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이렇게 사람을 보내어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니 될 말인가? 이것은 분명, 공연히 트집을 잡아 싸울 기회를 찾으려는 것이니, 자세히들 알아보도록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 요람이 낙담했습니다. 옷을 찢었습니다. 소식이 사마리아에 펴져나갔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사람이신 엘리사는 종을 보내어 왕에게 말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 주십시오.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그에게 알려 주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이 왕궁을 나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와서 엘리사의 집 문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라는 선지자는 나와 보지도 않고 사환을 보내어 나아만에게 하는 말이 “우리 선지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요단강으로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장군의 몸이 다시 깨끗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환은 선지자가 이른 말씀을 받아 한 마디도 보태거나 빼지도 않고 받은 대로 전하였습니다.

여기서 나아만이란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요, 그래서 금은보화를 수없이 가지고 왔습니다. 권력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편지를 받아가지고 오고,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온 사람입니다. 그는 시리아의 최고 사령관이요, 국빈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기는 어디를 가든지 대접받아야 하는 사람, 알아주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겸손하게 내려올 줄도 알아야지, 항상 높은 데만 바라보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찾아왔는데, 문 앞에서 돌려보내다니, 괘씸하였습니다. 기분이 상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선지자라는 사람이 나와서 먼 길에 잘 오셨다고 영접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든지, 안수하든지, 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나아만의 고정관념 중에 병을 고치려고 한다면 사람이 환자에게 나와서 아픈 부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던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어떤 치유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도 변할 수 없는 진리와 변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방법은 얼마든지 변화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변의 내용, 진리의 말씀을 가감하거나 수정할 수 없고, 고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전파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달리 할 수 있습니다. 치료는 하나님이 하시지만, 치료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달리할 수 있습니다.

요단강이라는 강이 그렇게 수질이 좋은 것도 아니요, 수심이 깊은 것도 아니요, 사람이 목욕한다면 좀 깨끗한 물에서 목욕해야하는 것이 아닙니까?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이스라엘에 있는 강물보다 좋지 않다는 말이야? 강에서 씻으려면 거기에서 씻으면 될 것 아닌가? 우리나라 강물에서는 씻기지가 않는다는 말이냐”고 불평하였습니다. 불평불만에 가득차서 분을 참지 못하면서 돌아서고 있었습니다. 병 고치러 와서 사실 전쟁할 수도 없고, 속이 상했지만, 어찌합니까?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의 아래에 있는 부하들이 나아만에게 가까이 와서 말했습니다. 먼발치에서 소리친 것이 아니라, 가까이 가서 작은 소리지만 확신에 찬 말로 간곡하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도 축복의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장군님, 그 예언자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하였다면,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다만 몸이나 씻으시라는데, 그러면 깨끗해진다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부하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힘이 드는 것도 아니요, 물질적인 손해가 되는 것도 아니요, 군마를 거느리고, 병거를 타고 권세를 부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장군에게 걸 맞는 예우가 사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병에서 고침 받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인생입니다. 지금 무엇을 따지고 가릴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겸손과 순종을 요구하시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영적으로 바로 서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면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요단강물이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한 방법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현대 의학적으로 보면 나병환자가 강물에 가서 몸을 씻으면 병세는 더 악화됩니다. 요단강에서 가서 씻으라고 하시는 것은 사람 편에서 보면 좋지 않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 나에게 유익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믿고 순종해야 됩니다. 겸손과 순종이 은혜받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나오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오라고 하십니다. 지금 엘리사는 나아만으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하려고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나아만이 고침을 받은 것을 사람에게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고침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고 요단강으로 내려 보내고 있습니다. 나아만으로 하여금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고 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의 할 일이지, 그의 얼굴이나 기억하고 돌아가게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참된 종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사람을 만나러 갔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이것이 교회가 할 일이요, 우리 믿음의 사람이 할 일입니다. 우리도 사람을 만나러 왔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쉬운 일을 시키시고 있습니다. 쉬워야 공짜요, 그것이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나아만은 부하들이 하도 간곡히 부탁하고, 선지자의 말대로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나아만이 요단강으로 내려가서 한번 두 번 세어보면서 일곱 번을 씻게 되었습니다. 여섯 번까지 씻을 때까지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첫 번째에 피부라도 조금 희어진다든지, 한 다섯 번째는 거의 낫는다든지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래도 순종합니다. 몸이 뜨거워진다거나, 무슨 느낌이 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번 씻고 보니 조금 낫고, 두 번째는 더 낫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섯 번까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속는 기분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기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인데, 내가 지금 사람을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시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일곱 번까지 순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마음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행동화하는 믿음, 곧 순종입니다. 나아만은 요단강에 일곱 번 그 몸을 씻고 올라오면서 드디어 고침을 받았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의 살같이 그 피부가 온전히 되살아나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나아만과 그 수행원들이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에게 돌아와서 “이제야 나는 온 세계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디 예언자님의 종인 제가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주십시오”라고 사례하게 되었습니다. 예언자는 끝내 거절하면서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감격을 안고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 때에 선지자가 무슨 선물이라도 받았다고 하면 나아만은 생각하기를 나는 할 만큼 하였고, 드릴만큼 드렸다고, 은혜는 무슨 은혜로 구원받았느냐, 값을 주고 당연히 고친 것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엘리사의 생도 게하시가 가서 돈을 받아 가지고 왔는데, 그가 징계를 받아 나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왜, 은혜로 구원받았다는데, 자기 공로로 구원받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느냐고 하십니다. 나아만이 돈을 주므로 하여, 믿음을 손상시키고, 나는 할 만큼 했다, 돈을 주지 않았느냐, 자기의 공로로 구원받은 것처럼 만들었다고 게하시가 책망을 받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한 영혼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여, 그로 영육을 고침받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가 한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값없이 주는 선물이지만,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실 때는 세상적인 명예와 부와 영광을 다 버리고 나는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요, 치유되어야 할 사람이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말씀을 들고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고, 생각하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여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이 한 영혼을 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소녀도 잘 했고, 선지자도 그의 사명을 감당하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다 사라져야 하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에게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9)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야 합니다. 고전1:21에 보면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전도하는 것은 좀 미련한 방법으로 보여집니다. 그래도 우리가 하는 것은 한 영혼을 살려보려는 운동입니다.

어린 소녀가 여주인에게 “주인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를 만나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어른의 나병을 고치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전도했습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순간 이 소녀는 잡혀온 계집종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파송된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시리아로 파송한 선교사요, 하나님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순간 신분이 바뀌어 집니다. 한 생명을 구원하는 은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죄와 허물을 씻어주시는 우리 주님 예수님에게 완전히 맡기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 앞에 나아와 주님을 모셔 들이고, 주님께 의탁하고, 100% 의존해야 합니다. 나는 죽고 우리 주님이 내 안에 사시는 완전한 의탁과 헌신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하심이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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