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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없는 양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 궁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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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31절-44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쌔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예수님의 말씀이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셨다. 쉬면서 뭘 먹으려고 하는데 오고 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먹을 수가 없다. 좀 차분히 앉아있지. 일을 했으면 먹여줘야 힘을 얻어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승목사님(김석준목사님)은 살아계실 때에 육은 소유격으로 하고 영 주격을 두고서 말씀을 하시는 건데, 그러니까 영 주격적 마음을 가지고 ‘육은 먹여줘야 한다. 육은 부려먹어야 한다. 부려먹으려면 육을 먹여줘야 한다’ 라고 했다. 이 말을 누가 들으면 이상하게 들릴 거다.


‘내가 밥을 먹어야지’ 하는 것은 육신이 배가 고프니까 하는 말이다. 그런데 믿는 우리는 영 주격의 마음을 가지고 육신은 먹여줘야 한다. 남이 나를 먹여줘야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먹여줘야 한다. 그래야 육신이 힘을 얻어 이 몸을 영을 위한 의의 병기로 쓸 수가 있다.


이 말을 조금 더 새김질을 할 것 같으면 ‘반찬이 맛이 있다, 없다’ 하는 건 육신에 주격이 된 소리다. 말하자면 육신의 입맛에 맞춘 소리다. 그러나 ‘육신을 먹여줘야 한다’는 그 말 속에는 영이 주격이 돼서 시던 짜던 아무 말 말고 먹여주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성과 육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성으로 지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이 또는 이성적 정신적 마음이 강하게 나가면 육신이 약간 피곤한 것도 초월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우리의 육신은 부려먹어야 한다. 이걸 모른 채 육신이 주격으로 돼 있으면 항상 육신 주격으로 생각을 해서 ‘하기 싫다. 어쩐다’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본인은 몰라도 그게 영 주격적 소리는 아니다.


우리는 이걸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걸 따지기 때문에 이걸 알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이걸 모르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못하고, 안 믿는 사람도 이런 생각을 못한다.


영 주격으로 말하는 사람과 육 주격으로 말하는 사람은 다르다. 육 주격으로 말하는 사람은 상당히 좁다. 좁으면 이 사람은 육 주격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자꾸 육신 위주로 가치판단을 따져 들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영 주격이다. 영 주격을 가지고 육신을 부려먹고 지혜롭게 하려니까, 지식적인 것을 가지고 영 주격으로 이롭게 하려니까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도 판단을 하고 취하고 하는 것이다.


육 주격과 영 주격은 다르다. 우리는 영 주격으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자기 몸이 의의 병기로 쓰여지기 위해서 먹는 것도 지혜롭게 먹고, 때를 따라서 먹여주는 것이다.


육 주격으로 돼 있으면 자기 몸이 병든다. 특히 미용실 같은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손님은 계속 오지, 그러니 점심시간이 되어도 점심을 먹을 새가 없다. 그래서 점심을 오후 두 세 시에 먹는다. 점심시간에 손님이 하나 오면 그걸 다 해놓고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또 손님이 와서 기다리면 점심도 못 먹고 계속 일을 해야 한다. 그러다가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몸이 다 망가진다.


모든 면에서 영 주격으로 해야 한다. 안 믿는 사람은 육 주격으로 사는데, 그렇다고 해서 꼭 육이 좋도록 하느냐? 사실은 그것도 아니다. 육을 위해 한다고 하면서도 육이 망가지도록 일을 한다. 이런 경우는 육 주격이 아니라 어리석음이 주격이다. 왜 몸에 병이 들 정도로 일을 하느냐?


더 어리석은 사람은 병이 들면 병원에 가야 되기 때문에 몸이 망가지고 있는데도 돈을 더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병원에 가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설상가상이다. 참 미련하다.


본문에 보면 무리들이 어찌 그리 눈치도 없느냐? 왜 들락날락 하고, 미용실 손님들처럼 점심도 못 먹게 하고 눈치도 없을까? 무리들 모두가 자기 목적적으로 들어있다. 남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사람은 영리해야 된다. 지혜로워야 된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영의 양식을 받아먹어야 복음활동에 힘을 얻어 능력 것 발휘할 수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으로 가자고 하시는 거다. 일을 하다 말고 왜 조용한 곳으로 가느냐? 다음 일을 하기 위해 쉬려고 가는 것이다. 그게 지혜로운 것이다.


32절-34절: 조용한 곳으로 배를 타고 가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배를 타고 가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둘씩 짝지어서 전도하던 사도들임을 알아보고 더 확신이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를 타고 간다는 그 소문을 듣고 모두 만나보고 싶어서 각 고을에서 서로 경쟁을 하듯이 뜀박질을 해서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볼 사람은 미리 가서 기다리는 거다. 깨달음의 은혜를 받은 자는 예수님과 사도들을 만나보고 싶고, 또 깨달음을 받고 싶어서 미리 가서 기다린다. 교회에 오는 것도 보면 알 수가 있다. 은혜 받기 싫은 사람은 예배 시작 직전 또는 시작 조금 지나서 5분 후 정도에 온다. 그러면 어쩌다가 그러는 거냐? 아니다. 항상 그런다. 이건 교회에 오기 싫다는 것이다.


교회에 왔다고 하더라도 교회에 온 그 사람이 교회에 오고 싶어 하는 심성이 있고 안 오고 싶어 하는 심성이 있다. 서 있는 차를 시동을 걸고 가려고 하려면 안 가고자 하는 성질이 있다. 그리고 차를 타고 가다가 세우려고 하면 이 차가 가려고 하는 성질을 띤다.


자기에게도 그런 게 있을 수 있다. 섰다가 가려고 하면 안 가려는 게 들어있고, 빨리 가다가 서려고 하면 안 서려고 하는 그런 게 있다. 교회 오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기 속에 그게 다 들어있는 거다. 교회에 왔어도 ‘저게 놀러왔나, 말씀을 들으러 왔나, 잠을 자러 왔나, 집에서 잔소리를 하니까 도피하러 왔나?’ 그런 게 있는 거다. 깨달음의 은혜를 받는 사람은 사도들을 만나보고 싶고, 만나서 또 깨달음을 받고 싶어서 먼저 가서 기다린다.


나는 주일학교 교사할 때 예배시간보다 한 시간 먼저 교회에 가서 주일학생들 집을 찾아갔다. 그 때는 차도 없고 길도 다 좁은 골목길이었는데 일일이 걸어 다니면서 애들을 불러내면 어떤 아이는 밥도 안 먹고 있고, 어떤 아이는 자고 있고, 어떤 아이는 엄마가 빨리 밥 먹여 보내려고 하고. 그런데 그 어린 애들이 그렇게 보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주일학교 교사들은 몇 시에 교회에 나오는지? 교사들은 학생들보다 먼저 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수종을 드는 사람은 미리 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다 챙겨놓는다. 게으른 사람은 남이 다 챙겨놓은 후에 온다. 정신이 그래서는 안 된다.


회사의 사장이나 높은 직에 있는 사람은 회사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를 미리 준비를 한다. 그러고서 직원들을 그 계획대로 일을 시킨다. 그런 것에서 그 사람이 지도자상인지 아니면 뒤따라 다니는 심부름꾼인지 다 나오는 거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다윗이나 부름을 받는 종들이 어떠했는가를 성경을 통해 봐라.


주일아침에 보면 애들을 주일학교 예배에 데리고 와야 하니까 부모들도 꼼짝없이 일찍 아이들과 같이 온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능실 능실 오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늙어빠졌다. 그 습성이 언제까지 갈까? 그 습성이 죽을 때까지 갈 수가 있다. 사회 격언에도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짓을 자기가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미움 받을 짓을 자기가 한다. 젊은이들도 옷 입는 것 하며, 걸음걸이 하며, 싹싹한 거 하며, 부지런한 거 하며 그런 것이 인상이 좋게 비취면 시집장가 다 잘 간다. 그런데 느려터지고 하면 제가 제 짝을 찾아야 하니까 얼마나 힘이 드느냐? 그러니 안 갈 수는 없고 제 생긴 대로 찾게 돼 있다. 좀 깨달아라.


깨달음의 은혜를 받은 자는 빨리 온다. 예를 들어서 구정 때나 추석 때나 고향에 가고 싶은 사람은 마음이 이미 고향에 가 있으니까 미리 차표를 준비한다. ‘미리’ 하는 그 마음이 벌써 고향에 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처럼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예배 시작 전에 미리 와서 자리를 잡고 기다리지만 예수 믿는 게 싫고 교회 다니는 게 싫은 사람은 항상 늦게 오거나, 왔다가 자거나, 예배시간에 다른 사람이 집중을 못하게 딴 짓을 한다.


처음 교회에 오는 것도 아니고 집사고 늘 눈으로 보는 사람임에도 가장 늦게 오니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자리를 잡고 앉아 있어서 자기가 앉을 자리가 없다. 이건 나쁘게 말하면 쫓겨나는 거다. 습성이 계속 그러면 결과는 쫓겨나는 거다. 그건 자기가 나가는 거다. 들어올 자리가 없으니 자기가 나가는 거다.


사회에서 대학교 강의시간에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는 짓을 하거나 열중을 안 하고 있다면 강의하는 분이 방해하는 자기를 가만 두겠느냐?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방해 짓을 하면 눈총이 가거나 나가라고 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가장 중요한 일에 열중을 하고 있는데 주위에서 아이들이 떠들고 있으면 자기는 그 아이들을 가만 두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시간에 듣는 사람에게 방해를 주고 있다면, 예를 들어서 성경책을 계속 넘긴다거나, 무슨 낙서를 한다거나, 핸드폰 통화를 한다거나, 아이들이 뛰고 우는 걸 가만 보고 있다거나, 어른들이 잡담을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한다면 이건 다 마귀 짓이다. 마귀 짓은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다.


배고픈 사람은 밥자리에 미리 가서 앉느냐, 밥을 다 먹은 후에 뒤에 가서 앉느냐? 이치를 말하는 거다. 미리 가서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무리들을 예수님께서 보시니 목자 없는 양 같이 보여졌다.


양에게 목자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목자의 보호를 입지 못하고 사나운 들짐승의 밥이 되거나 길을 잃어 헤매다가 죽으면 독수리의 밥이 되는 거다. 안 된다가 아니다. 그런 것처럼 지금 이 말씀은 무리들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니 참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마음과 정신면에 상처투성이가 될 것이고, 알지 못해서 속아서 살게 되고, 미련해서 이용을 당하고, 충성봉사 안한다고 말로 얻어맞고, 열심히 충성을 했어도 물질투자 시간투자 노력투자를 했는데도 깨닫는 면에서는 아무 소득도 없고, 공갈협박을 당하고, 시험도 당하고, 앞으로도 깨달음이 없다면 얼마나 당하고 살다가 불쌍하고 처절한 자로 처박힐지? 그런 교인들도 참 많고 목사들도 많다.


그렇게 살다가 예수님 앞에 가면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알아주겠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인격적으로 들어가면 심성이 뜨거워지는 거다. 그냥 문자 글자 역사적 또는 강론적 학문적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인격적인 사람은 감성이 풍부해지고 선하고 의로운, 그러니까 겉으로 보이는 이면 속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의 소리를 듣는 거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아프면 아이는 어디가 아픈지 말을 못한다. 그러나 어린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는 그 아이의 마음을 알고 병원에 데리고 간다. 그러나 모르는 미련한 어머니는 운다고 애를 두들겨 팬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느냐? 인격적인 사람은 마음으로 영으로 느낀다. 그게 인격적인 사람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구원의 이치와 도리를 만나지 못하고 살면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신세가 된다.


34절: 왜 불쌍히 여겼을까? 무모형제가 없나?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는 거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부모형제가 다 있고 잘 먹고 잘 살아도 영의 눈으로 보면 ‘목자가 없구나’ 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알아진다.


‘목자 없는 양과 같다.’ 그 때에 각 고을에는 회당이 있었을 테고, 회당이 있다면 그곳에는 성경을 가르치는 서기관이나 율법사나 선생이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그곳의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놀다 보면 얼굴에 땀이 흐르고 흙이 묻고 하면 ‘네 꼴을 보면 어찌 부모 없는 자식 같으냐’ 한다. 누가 그 소리를 하는 거냐? 부모가 자기 자식을 보고 그 소리를 한다. 이 말은 부모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있기는 있는데 너 하는 꼴이 꼭 부모가 없이 사는 것 같구나’ 하는 뜻이다.


그런 것처럼 교인들이 많아서 목사가 있기는 있는데 참 목자가 없는 것 같은 교회가 있을 수 있다. 참 목자가 없는 그걸 볼 줄 알아야 한다. 지금 발에 밟히는 게 목사인데, 목사 하다가 돈이 없어 장소를 못 얻고 쫓겨난 목사, 싸우고 나온 목사, 병 앓는 목사 등 참 많다. 그런데 ‘현재 목회하고 있는 목사들이 바로 하고 있느냐’ 하는 면에서 이것이 또 문제다.


말세에 거짓 종들이 많다는 것은 참 목자가 아닌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 것은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많은데, 교회에 사람은 많이 모이는데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을 가르치는 참 목자가 적다는 것이다. 세상 것을 자랑하고 구하게 하는 목사는 많은데 참 목자가 적다는 말이다.


우리가 볼 때 참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도들의 전도소리를 듣고 각 고을에서 예수님께 나온 것을 보면, 첫째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평소에 구원을 잘 깨닫게 해주는 자가 없었다는 것을 볼 수 있고, 두 번째는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고 반대편으로 가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진리에 목말라 했었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사도들을 통해 무리들을 구원이 없는 곳으로부터 탈출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훈이 있는 곳으로 불러 모으신다는 것도 그 안에 계시적으로 들어있다.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한 가지만이 아니라 이것저것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만사와 이치를 가지고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해가 저물었는데도 이 무리들이 집에 돌아가지를 않는다. 그래서 35절-36절에 제자들이 큰 걱정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걱정을 안 하시는 건지 하시는 건지, 제자들이 걱정을 한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구체적으로 말을 한다.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 가니 무리들을 촌과 마을로 보내서 무엇을 사 먹게 하소서.’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시간을 만드시고 때와 장소와 사람을 만드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배고픔과 그 상황을 모르실까? 다 아신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그 생각을 못하고 있는 거다. 우리는 이 성경을 읽으면서 ‘이 분이 어떤 분이시다’ 하는 면에서 해가 지고 무리들이 배가 고프고 한 그것을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37절-38절: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은 이미 다 아신다. 여기에 몇 명이 모인 거냐? 장정만 5천 명이다. 그러니 제자들이 생각할 때에 예수님의 그 말씀이 너무나도 황당해서 말문이 막힌다. 장정만 5천 명이니 전체로 보면 2만 명 이상 될 텐데 무슨 돈으로, 혹 돈이 있다고 해도 그 많은 것을 어떻게 가져오느냐? 또 동네에 가면 그만한 양식이 있을까? 동네가게를 싹쓸이를 해도 모자랄 판이다.


이어서 ‘너희에게 떡이 몇 개가 있는지 찾아봐라’ 하신다. 예수님은 모르고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찾아보니까 무리 중의 한 사람이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고 하며 그걸 예수님께 가져왔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예수님은 이걸 아신다. 그래서 우리가 추측을 해본다면 그 떡과 물고기로 이적을 일으키시려고 저녁때까지 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39절-40절: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는데 혹 백 명씩 혹 오십 명씩 앉혔다. 질서정연하게 줄을 잘 맞추어 앉았다. 말하자면 그만큼 듣고 깨달았으면 은혜 받을 준비에 순종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배시간에 자리에 앉는 것도 예수를 믿고 이미 그만큼 듣고 보고 깨달았다면 자기가 어디에 어떻게 앉아야 하는 것도 알 수 있는 거다. 키가 작은 사람은 의자 안쪽으로, 그리고 키가 큰 사람은 의자 양쪽으로, 그리고 뒤쪽으로 앉아야 한다. 키가 큰 사람이 염치도 없이 의자 가운데 턱 앉으면 어떻게 되느냐? 키가 큰 사람이 가운데 앉고 싶으면 맨 뒤에 가서 앉고, 뚱뚱한 사람일수록 양쪽으로 앉고. 어른이 앞에 앉아있고 주일학생들이 그 뒤에 앉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의자에 앉을 때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앉아야 하므로 질서정연하게, 앞자리에서부터 빈자리가 없이 채워서 앉고. 의자 양쪽 가에 하나씩 먼저 앉아놓으면 그 가운데로 뚫고 들어가려면 얼마나 힘이 드느냐? 또 맨 나중에 와서 앞의 의자에 앉고 싶으면 맨 뒤에 있다가 오전 예배 후에 나중에 앉는다.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춰서 잘 앉았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만큼 듣고 깨달았으면 은혜 받을 준비에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이 빨리 진행이 되지 않게 방해하는 자는 혹 없을까? 예를 들면 무리 한 가운데서 일어나서 이 쪽 저 쪽으로 왔다 갔다 한다거나, 줄을 맞춰 앉아있는데 뒤에서부터 앞으로 비집고 들어오다가 아기의 발을 밟은 사람은 없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뒤에서 딴 짓을 하다가 말씀을 마친 후에 먹는 것을 준다고 하니까 줄 맨 앞으로 가서 서 있었던 사람은 없었을까? 이게 광야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돼서 온 교회가 떠들썩해서 설교를 못 듣게 싸우는 일은 없는가?


혹시 누군가 발을 내밀고 있다가 떡과 고기를 나눠주는 사람이 걸려서 넘어지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의 에티켓이나 교회생활 중에 지켜야 할 모든 행동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 제자들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무리들을 질서정연하게 앉혔다. 그래야 신속하게 떡을 나눠줄 수가 있다.


41절-44절: 예수님께서 떡과 물고기를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를 하신다. 떡은 잘 빻아졌고 반죽도 잘 됐고 간도 맞고 잘 익혀진 떡이다. 물고기도 간도 맞게 먹기 좋게 잘 구워졌다. 덜 익혔거나 덜 굽혔다면 배는 고픈데 먹을 수가 없다. 누가 이렇게 정성들여 잘 만들었을까? 어느 교인이 입맛 있게 이렇게 잘 만들었을까?


떡과 물고기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는 것은 단순히 떡과 물고기만은 아니다. 떡은 먹는 것으로 배를 채우게 해준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떡이 잘 빻아지고 잘 익혀지고 잘 구워져서 성전 안의 떡상 위에 놓여져 있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나의 자아가 잘 빻아지고 익혀지고 구워져서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 축복의 사람, 하늘의 사람이 되라는 당신의 뜻을 영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해달라는 축사가 아니겠느냐? 그런 사람을 보게 해달라는 축사가 아니냐?


지금 떡과 물고기를 들어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고 있다. 그 떡을 만든 사람의 중심을 보고 싶다. 그 사람이 언제 그렇게 말씀대로 잘 만들어졌는지? 사도들이 나가서 전도할 때 이 사람이 예수구원의 소식을 들은 것 같고, 그리고 지금 예수님을 만나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저물도록 은혜를 받을 때 그렇게 만들어졌는지?


그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품과 정성에서 나온 떡과 물고기를 남녀노소 모두에게 나눠줬으나 모자람이 없다. 떡과 물고기를 나눠줄 때 뒤에서 부모가 자기 아이를 앞으로 내보내면서 ‘빨리 가서 떡과 물고기를 받아오너라’ 하지 않고 모두 앉아서 배불리 받아먹었다.


그 떡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이 남자만 5천 명이나 되는데, 다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 가득하게 거두었으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몇 배나 불어난 것이냐? 그러니까 이것은 풍부요 대 만족이다.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는 것은 전 세계의 영적 이스라엘 열두 지파 모두에게 충분히 나눠줄 수 있는, 그러니까 지금의 우리에게까지도 오는 축사된 떡이요 이적의 떡이다.


이 축사를 그냥 물질적 개념을 넣은 ‘감사합니다’ 하는 그 기도로 생각하지 말고 그 속에 이치를 넣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니 즉, ‘그런 인물은 영적 이스라엘에게 보냄을 받아도 풍부한 일꾼이구나’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주님의 손에 붙들리고 쓰임을 받으면 많은 사람에게 하늘의 만족을 주고, 많은 남자들(힘 있게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이 먹고 힘을 얻어 하늘의 일을 하게 되는 거다. 기독교 설교 메시지 속에는 그런 이치들이 들어있다. 이걸 모르면 말씀에 욕심이 안 난다. 알면 욕심이 나게 돼 있다. 오늘날 영적인 말씀으로 풍부하게 먹일 종들이 어디 있을까?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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