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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이름을 남기는 길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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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좋은 이름을 남기는 길

(누가복음 10장 17-24절)


< 정정당당하게 행동하십시오 >

 몇 년 전 어느 날, 한 목회자가 제 홈페이지 설교에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목사님! 이제까지 목사님 글의 신뢰가 무너집니다. 서울에서 목회하는 유명한 아무개 목사님의 설교를 거의 베꼈네요. 서론과 결론도 거의 같고 대지 3개도 똑같고 내용도 거의 같네요.” 그렇게 오해할 수 있었습니다. 인터넷에 그 아무개 목사님의 설교는 그때보다 몇 년 전에 게시되었고 제 설교는 바로 그때 게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새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설교 카피한 것을 비교적 쉽게 찾아내기에 남의 설교를 카피해서 인터넷에 글로 게시하면 그것은 자멸의 길입니다. 알고 보니까 제가 그때보다 10여 년 전에 ‘15분 분량의 새벽설교’로 작성했던 것을 그때 ‘30분 분량의 주일설교’로 내용을 확대해 새롭게 설교를 작성했는데 그 아무개 목사님이 제 새벽설교를 인용해서 사용한 사실을 모르고 오히려 제가 카피했다고 댓글을 달았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말해주자 그분은 잘 몰라서 무례하게 댓글을 올렸다고 사과했습니다.

 사람은 잘 알지 못하고 비판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비판할 때는 더 윤리의식이 탁월해야 합니다. 잘 모르고 남을 함부로 비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더 나아가 익명으로 남을 뒤에서 댓글로 비난하거나 입에 담긴 힘든 말로 난도질하는 것은 가장 나쁘고 비겁한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뒤에서 총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화를 보면 신사도를 중시했던 중세 영국인들의 전쟁 장면이 나옵니다. 전쟁에서 양쪽 군대가 당당하게 서서 사거리 내에서 정면으로 맞붙습니다. 은폐물에 숨지도 않습니다. 그때 먼저 왼쪽 군대 지휘관이 “조준! 발사!” 하고 외치면 제일 앞줄의 사수들이 총을 한번 쏩니다. 그러면 오른쪽 군대 앞줄에 있던 군인들이 픽픽 쓰러져 죽습니다. 쓰러지지 않은 사람은 그대로 있고 쓰러지면 그 다음 줄 사람이 앞으로 나옵니다. 그때 왼쪽 군대 군인들이 또 총을 쏘지 않습니다. 한번 쏘고 상대방이 쏘기 전에 또 쏘는 것은 비겁한 일이란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오른쪽 군대 지휘관이 “조준! 발사!” 하고 외치면 제일 앞줄의 사수들이 총을 한번 쏩니다. 그러면 왼쪽 군대 앞줄에 있던 군인들이 픽픽 쓰러져 죽습니다. 그런 식으로 몇 번 교대로 총을 쏘다가 마침내 서로 당당하게 총을 쏘면서 전진해서 싸움의 결판을 냅니다. 그때 숨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습니다. 영국식 신사도의 개념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쁘고 비겁한 사람은 뒤에 숨어서 총질하는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나쁘게 유명한 사람을 악명 높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때는 악명보다 익명이 더 나쁠 수 있습니다. 어떤 때입니까? 익명의 댓글로 뒤에서 마구 총질을 할 때입니다. 그처럼 무자비한 댓글로 사이버 공간에서 총기난사를 하는 사람은 가장 비겁한 사람입니다. 중세 귀족들은 자기 이름을 걸고 정정당당하게 비판했고 자기 이름을 지키려고 목숨을 내놓는 명예 결투까지 심심찮게 벌였습니다. 비판은 정정당당하게 자기 이름을 걸고 해야 합니다.

 가끔 인터넷에서 익명으로 비판적인 댓글을 달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때 마음을 자제시키고 참습니다. 익명의 의사표시는 좋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익명으로 마구잡이로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게다가 그 비난이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더욱 나쁜 일입니다. 익명의 인터넷 댓글이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신문고 역할을 하는 정도에서 지나쳐 뒤에서 총 쏘는 비겁한 수단이 되면 안 됩니다.

 인터넷뿐만 아니라 어디서든지 의사를 표시할 때는 당당하게 자기 이름을 걸고 의사를 표시해야 합니다. 자기 이름을 걸고 말하고 행동할 때 자기 이름을 소중히 만들어가는 합당한 행동도 나옵니다. 악성 댓글은 보는 사람도 망가뜨리지만 쓰는 사람은 더 망가뜨립니다. 반대로 좋은 댓글은 보는 사람도 복되게 하지만 쓰는 사람은 더 복되게 합니다.

 인터넷에서 왜곡된 글이 보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그런 반대 주장을 하는 사람도 늘 있을 수 있다는 현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둘째, 침묵도 필요합니다. 즉시 반발하는 글을 달아서 ‘댓글’이 ‘대꾸’처럼 들리게 하면 안 됩니다. 셋째,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본 후에 꼭 의견을 피력하고 싶으면 당당하게 실명으로 글을 써서 의사를 피력해야 합니다. 자기 이름을 걸고 말하고 행동하려고 할 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일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 좋은 이름을 남기는 길 >

 성도는 자기 이름을 소중하게 가꿔 성도의 명예를 지켜야 합니다. 좋은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예수님의 이름을 앞세우십시오

 본문의 장면 전에 예수님은 전도의 사명을 주고 70명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기뻐하며 “주님! 주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17절). 예수님의 이름은 놀라운 능력의 원천입니다.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자신이 치유를 주고 귀신을 쫓아낸다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우면 참된 능력이 나타나지 않지만 신실한 성도가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우면 참된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때 70명의 전도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항복한 얘기를 하자 예수님이 바로 말슴했습니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18절).” 사탄도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앞세운 제자들 앞에서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존재란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탄을 밟고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셨다고 했습니다(19절). 그 약속의 말씀은 예수님이 선택하신 70명의 전도자들이나 능력 있다는 사역자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모든 신실한 성도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자신을 연약하고 무능한 자로만 알지 마십시오. 자신을 왜소화시켜 주눅 들어 살거나 패배자처럼 너무 소극적으로 살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앞세우면 자신으로부터도 놀라운 능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능력 있다고 소문이 난 사람을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안수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신실한 성도는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이 주어졌기에 어떤 귀신도 이길 수 있고 어떤 상황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항상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찬란한 내일을 꿈꾸며 사십시오. 성도는 이미 최종적인 승리가 예정된 존재로서 현재의 영적 싸움을 하는 존재입니다. 불신과 미움과 낙심과 절망으로 스스로 무너지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늘 앞세워 사면 하나님도 그의 이름을 소중하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2. 능력보다 은혜를 앞세우십시오

 70명의 전도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에 귀신이 항복한 사실로 인해 흥분하면서 말하자 예수님이 계속해서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20절).” 이 말씀은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은혜가 귀신 쫓아내는 능력보다 더욱 소중한 것이란 뜻입니다. 성도는 기본적으로 능력보다 은혜를 앞세워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에 더 끌릴 때가 많습니다. 귀신들이 항복하고 쫓겨나가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신비하게 보이고 자극적입니다. 반면에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별로 신비한 것도 없고 자극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길 귀신들이 항복하는 능력보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은혜가 훨씬 더 기뻐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능력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바른 신앙과 개념 안에서 능력을 추구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사실상 사랑하고 감사하기 힘들 때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도 능력입니다. 문제는 능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대개 신비한 능력만 능력으로 알고 추구하는 경향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기 믿음과 영성과 능력을 나타내고 과시하고 자랑하려는 경향을 많이 보입니다. 또한 전투적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자기 이름도 깎이고 인생의 연단과정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면에 은혜를 앞세워 사는 성도들은 삶이 여유가 있고 인성도 후덕합니다. 감사할 일도 넘치게 되지만 기본적으로 감사도 잘합니다. 늘 하나님의 은혜에 젖어 살면서 좋은 일만 있으면 자기 자랑은 감추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세가 탁월합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항상 능력보다 은혜를 앞세워 사십시오. 큰 기적과 신비와 축복의 주인공이 되어도 자기 믿음과 능력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려고 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워 사는 심령의 이름을 누구보다 높여주실 것입니다.

3. 내면적인 가치를 앞세우십시오

 예수님은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축복에 대해 말씀한 후 그런 진리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21절). 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하늘의 진리가 숨겨졌을까요? 하나님이 숨기신 것이 아니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자기 지혜와 슬기를 믿고 스스로 진리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고 스스로 영안이 열렸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가장 분별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습니까? 예수님이 병자를 치유하고 로마를 정복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식으로 화려하게 사역했으면 배척하지 않고 숭배했을 것입니다. 거짓 종교인들은 축귀나 치유의 기적이 벌어졌으면 열심히 선전하기에 바빴겠지만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이 쫓겨나가도 그런 것을 기뻐하지 말라고 하면서 오히려 자제시켰습니다. 그처럼 화려한 사역을 멀리해서 겉으로 보면 초라해 보이니까 “저런 사람이 어떻게 메시야인가?”라고 하면서 배척한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내면적인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모든 권세를 주셨기에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22절). 더 나아가 하나님과 예수님은 속성과 권위에서 동일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속성과 위대성을 볼 줄 아는 눈이 복된 눈이라고 하면서 그 전에 많은 선지자와 임금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메시야를 직접 뵙는 특권적인 복을 누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24절).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의 겉모습이 아닌 참된 속성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잘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복된 존재가 되려면 내면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나 보여주는 삶에 매여 살지 마십시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진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앞모습의 나’도 중요하지만 남에게 느낌으로 전달되는 ‘뒷모습의 나’도 중요합니다. 그처럼 뒷모습도 잘 가꾸려고 할 때 영혼도 풍성해지고 하나님의 안목과 은혜도 얻게 되고 결국 자신의 이름도 빛나게 될 것입니다.

< 이름을 소중하게 지키십시오 >

 자기 이름을 소중하게 지키십시오. 찬란한 내일을 꿈꾸고 인물의 길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현실이 어려워도 포기하지 말고 찬란한 내일을 향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나가면 이름을 얼마든지 빛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영혼의 빈곤을 느끼는 이유는 자기 이름을 소중하게 만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명예욕은 버려야 하지만 자기 이름을 소중하게 만들려는 명예심은 가져야 합니다.

 명성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명성을 잘 활용하면 멋진 역사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자기 이름을 끊임없이 감추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유명해지려고 안달하는 것은 명예욕이지만 유명해지려고 안달하지 않아도 저절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명예심은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분야에서 인물의 길을 감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이름이 된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유럽 귀족들의 작위에는 남작, 자작, 백작, 후작, 공작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개념으로 쉽게 설명하면 면 단위의 성주가 남작입니다. 백작의 아들이나 백작의 대리인은 자작입니다. 군 단위의 성주는 백작입니다. 도 단위의 성주는 후작입니다. 그리고 왕의 친인척이나 정승급 이상의 최고 관리는 공작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지역과 문화의 기본 단위는 백작(count)이 다스리는 땅인 ‘백작 영지(county,카운티)’입니다. 백작은 몇 만 명의 농노를 거느린 봉건 영주로서 자기 영지 내에서는 거의 왕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룰 수 있었던 이면에는 수많은 독일 봉건 영주들의 보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작 영지들의 연합체가 나라로 발전하면 가장 강력한 영주(백작) 및 제후(후작) 가문이 왕가로 등극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봉건 영지로 출발해서 나라가 된 나라 중에 모나코란 아주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나라지만 인구가 4만 명도 되지 않고 크기도 우리나라 한 개 동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모나코 왕을 대공이라고 호칭해 공작 반열에 올려놓지만 중세 개념에 의하면 모나코는 백작 영지 정도이고 모나코 왕은 백작 정도의 위치에 있는 왕입니다.

 모나코는 프랑스 니스 해변 인근에 있는 작은 나라인데 그런 나라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2차 세계대전 후 그 나라는 쉽게 프랑스로 편입될 수 있었지만 그 나라가 지금까지 잘 존속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1956년에 그레이스 켈리란 미국 유명한 여배우가 모나코 왕실의 왕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유명한 여배우가 왕비가 되면서 전 세계의 이목을 받게 되니까 프랑스도 함부로 모나코를 자기 영지로 편입시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여배우의 명성이 한 나라의 존속에 활용된 것입니다.

 이름의 유명함이 좋게 사용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옛날에 연예인은 아무리 유명해도 딴따라란 편견을 가지고 대했습니다. 그러나 요새는 연예인의 명성이 활용되어 좋은 일도 많이 이뤄질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면 얼마든지 그 성공과 명성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름이 빛나게 되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이름이 빛나면 삶의 의미와 보람도 커집니다. 또한 빛나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최대한 자기 이름을 감추고 은밀하게 선을 행하면 그 행복감과 만족감은 무엇보다 클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은밀하게 이름을 감추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데 힘쓰면 천국 상급도 클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하고 기뻐할 것은 우리의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에 최대 기쁨과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속도에 맞춰 살면서 좋은 이름을 남기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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