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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노중에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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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33절-37절: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가버나움’이란 ‘위로의 촌’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이 위로의 촌에 도착하여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길을 오면서 서로 토론한 게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 이것은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바로 깨닫게 해 주려고 묻는 것이다.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을 했기 때문에 이것을 아시고 물으시는 것이라서 제자들이 아무 말도 못했을 것이다.


왜 서로 ‘누가 크냐’ 하며 쟁론을 했을까? 예수님께서 분명히 고난 받고 죽었다가 3일 만에 살아난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그것만 생각이 나서 ‘예수님이 죽으면 누가 예수 다음이 될까’하고 쟁론을 한 것일까?


내가 아직 젊은데 그래도 공동묘지가 가까워지다 보니 의례히 숙덕숙덕 하는 말이 ‘목사님이 돌아가시면 그 다음 후임이 누굴까’ 한다. 나 다음이 누구냐? 사람은 어차피 한 번 죽을 테니까 내가 죽으면 그 다음이 누구냐? 아무도 모른다.


스승목사님 살아계실 때 스승목사님이 어느 제자목사님에게 ‘어디 가서 설교를 하라’고 하면 의례히 그 목사님이 수제자라고 생각들을 한다. 그런데 지금 후임일 것이라고 하던 그 사람이 어디서 어떻게 하고 사는지 좋은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반드시 주님이 사랑하는 자라야 된다. 내가 깨닫는 대로 가르치다가 나 다음에 어느 목사님이 우리교회를 가르칠지 나는 모른다. 성경에 밝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세우실 것이다. 아무리 말을 잘한다고 해도 그걸로 세우는 게 아니다.


모세 다음에 여호수아인데, 표면적으로 역사적으로 보면 이 여호수아가 모세 뒤를 늘 따르고 보고 배웠는데, 은밀하게 하나님께서 보시는 입장은 말씀을 바짝 따르는 그 사상을 가진 자를 하나님께서 세우신다. 여기저기서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그건 아니다. 말이 많아도 죽은 말이 있고, 말을 더듬어도 산 말이 있다.


누가 예수님에게 제일 처음 부름을 받았느냐? 베드로다. 그렇지만 누가 항상 예수님의 옆에서 대화를 하고 있느냐? 요한이다. 이걸 보면 예수를 먼저 믿었어도 예수님의 가슴에 대고 귀를 기울이는 자는 사도요한이다. 이런 것도 볼 줄 알아야 한다.


예수를 먼저 믿었다고 앞선 자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나중 믿었어도 먼저 된 자가 있다. 이건 말씀으로 앞으로 달리는 자다. 아무리 신학대학을 나와도 어떻게 보면 교인들보다 못한 목사도 있다. 열리지 않은 목사도 있다.


‘누가 제일 크냐’ 하는 여기에서 깨달을 것은 ‘누가 나이가 제일 많으냐? 누가 제일 처음 부름을 받았느냐? 누가 항상 그 옆에 앉아 귀를 기울이느냐?’하며 이런 것을 기준으로 해서 ‘누구는 이래서 되고, 누구는 저래서 안 되고’ 목사님 세계에서는 그런 발상조차 가지지 말라. 예수님이 그 뒤에 해석을 해 놨지 않느냐?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어간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을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느냐? 제자들 중에서 넘겨준다. 누구냐? 누가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게 되느냐? 멀리 있는 사람이냐, 가까이 있는 사람이냐, 아니면 예수님의 부모형제들일까, 아니면 늘 같이 다니는 제자들일까? 서로 모두가 자기 자신을 살펴봐야 할 일이다.


그때나 오늘이나 언제든지 보면 성경에 있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세상에서 다 벌어지고 있다. 시간적 역사적으로 과거에 있어났던 것만이 아니라 신앙 정신 사상적으로 보면 지금도 여전히 성경에 있는 그대로 연속되고 있다.


지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천국복음이 어떤 상황에 처해지느냐? 예수님이 어떤 상황에 처해지느냐? 예수님께서 그렇게 되듯이 교훈적으로 볼 때 오늘날도 천국복음이 어떻게 처해지느냐? 요즘 천국복음을 알아주느냐, 지상복음을 알아주느냐? 그걸 보면 답이 나온다. 그걸 보면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계시나 성령님의 보혜사로 계시나 마찬가지다.


요즘 보면 ‘예수님이, 진리복음이 어떤 상황에 처해지느냐’ 그런 염려 걱정이 아니고 모두 다 ‘내가 장으로 되어야지. 나를 밀어 달라’ 하며 모두는 자기 피알이다. 기독교 신문을 보면 전부는 자기 피알이다. 이건 ‘누가 크냐’이다.


자기 피알을 하는데 그 방편이 예배당 건물에 자기 얼굴을 내놓지, 그 다음에 자기가 어디 어디 나왔다는 거 내놓지. 그게 다 지기 피알이다. 이건 다시 말하면 ‘나는 손가락질 받는 이단이 아니다’ 그런 말이 되기도 한다. 주님이 보시는 중심은 그걸 말하는 게 아닌데 오늘날 교회는 ‘누가 크냐’ 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누가 크냐, 작으냐’ 하는 걸 건물을 보고 말하느냐, 교인 수를 보고 말하느냐? 한국에서 누가 크냐? 세계적으로는 누가 크냐? 오늘날 한국에서 제일 크고 이름난 사람과 세계에서 제일 크고 이름난 사람을 예수님과 함께 세워놓고 보면 누가 세계에서 제일 크고 이름이 난 사람이냐? 누가 학력과 경력이 제일 많으냐? 누구의 배경이, 교권 세권 지권 재권이 든든하냐?


예수님은 무슨 권이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권이다. 하나님의 본질권 하나뿐이다. 그런데 유명하다는 다른 분들은 권이 상당히 많다. 많다고 하는 것은 가르치는 교훈 속에 딴 것을 끼워 넣는다는 말이다. 이러면 말씀이 깨끗하지 못하다. ‘누가 크냐’ 하는 이 발상들은 세상성질의 사상과 정신과 마음이다.


서로가 ‘내가 크다’ 하면 몇 년짜리 큰 것이냐? 그게 세상에서 아무리 오래 가봐야 몇 년짜리 큰 거냐? 10년? 100년? 만 년? 그런 발상은 세상에 속한 육의 생각이지 영의 생각은 아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서 어느 교회에 가도 그 교회 목사의 설교를 비판이 아니고 잘 구별 분별을 한다면 그런 성도는 그런 데 안 속는다. 자기가 어리석으면 속게 된다.


35절-37절: 일반적 연령적으로 말할 때는 유아기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등으로 구분하여 말을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큰 자, 작은 자’란 나이에 관계없이, 성별에 관계없이, 활동 이력과 업적에 관계없이 무엇보다도 영인성장 면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 실상화로 성장되고 장성된 자를 큰 자라고 한다. 큰 자가 아니면 작은 자라는 의미가 된다.


물질세계에서는 키 재기를 하는데 어린아이는 키가 작다. 또 일반세계에서는 공부를 많이 하고 훌륭한 인물이면 ‘그 사람 참 큰 사람이다’ 라고 한다. 또 ‘아, 그 사람 높은 자리에 앉았지만 되게 졸자야’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장날에 시골장터에 가면 할머니들이 듬뿍듬뿍 주면 ‘아, 손 크다’ 라고 한다. 또 ‘아, 그 사람 참 통이 크다’ 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큰 자, 작은 자’를 알지 못해서 교회 다니는 시간이나 활동의 업적을 가지고, 또는 무슨 신비스런 일을 가지고 ‘믿음이 크다, 작다’ 라고 말을 한다. 이런 잘못된 지식에서 권위의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첫째 즉, 으뜸자가 되고 싶으냐? 그렇다면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한다’ 라고 말씀을 했다. 즉 인간의 것, 세상의 것을 내세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맨 마지막 끝의 사람이다.


너는 어떤 자가 되고 싶으냐? 영이 눈으로 보는 정신활동을 말하는 거다. 큰 자가 되고 싶으면 먼저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것으로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맨 마지막 끝의 사람. 이런 사람은 자기에게 있어도 사람 앞에 내세우지를 않는다.


또 큰 자가 되려면 뿐만 아니라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자기가 맨 끝에서 섬기면 점점 으뜸자로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있고, 백 날 섬겨도 맨 끝에 그대로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의 이치와 하나님의 본질이 있는 거기서 맨 밑에서부터 섬겨서 올라가면 계속 올라가진다. 그곳에서 신앙생활의 시간에 따라서 계속 숙달이 되며 한 단 한 단씩 올라간다.


사람이 맨 밑으로 안 떨어져본 사람은 자꾸 위로 올라가려고만 하고 왕 노릇을 하려고만 한다. 이건 안 된다. 사람이 배우고 다듬어져서 올라가야 고상해진다. 여기 저기 다니면서 ‘어느 교회에서 무슨 회장을 했네, 뭘 했네’ 한 그것을 가지고는 안 된다. 주님의 집에서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어떤 면으로 보면 부자보다도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예수 믿기가 참 쉽다. 왜 그러냐? 맨 밑에서부터 올라오기가 참 쉽기 때문이다. 학박사들이 자기가 그 동안 배우고 알던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면 잘못된 그것을 다 버리고 밑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오려고 하겠느냐?


비진리 육적인 교회에서는 죽도록 배워도 재간은 늘지 몰라도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은 성장이 안 된다. 그럴 경우 날마다 바닥이다. 하나님의 온전으로 올라갈 수 없는 그냥 바닥이다. 사람이 많이 알아갈수록 자기가 참 사람으로 여물어져 가야 한다. 참 사람이 안 되고 말만 할 것이냐?


세상과 교회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에서 으뜸 되기를 좋아하고 섬김 받기를 좋아한다. 이건 세상에 속한 생각들이요, 임시성에 속한 것이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수준의 생각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첫째 즉, 영원히 천국에까지 들어갈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성장된 으뜸자를 말씀하시는 거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오셨으니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서의 으뜸자를 염두에 두신 말씀이다. 세상에서의 말이 아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자기가 천국에서 으뜸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세상 소원 목적을 가진 그 밑으로 들어가서 섬겨야 하느냐? 이러면 절대로 천국에서 으뜸자가 안 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구원의 이치가 있는 교회에서 주님의 일에 수종들고 섬겨야 자기가 커진다. 자타의 구원을 위한 일이 주님의 일이다. 자기가 그 일에 섬겨야 커지지 그 진리본질을 떠나서는 섬김도 아니고 커지지도 않는다.


당시에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불러서 이 말씀을 주심은 계시적으로 이들은 교회의 대표들이니 오늘날 전 세계 교회들에게도 주시는 말씀이다.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의 모든 언행심사는 세상이라는 육에 속한 개념은 없다. ‘하늘로부터 오신 분’ 할 때는 세상에 속한 개념은 없다는 말이다.


‘뭇 사람의 끝’이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가장 볼품없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고, 또 ‘세상조건으로 볼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신앙중심은 ‘나 잘났소’ 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그 어떤 권이나 물질의 요소로 배경이나 힘을 삼지 않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의 예수님 밑에서 수종들고 섬기는 자이다.


예수님 밑에서 수종들고 섬겨야 만이 영능의 실력으로 커질 수 있는 것이다. 세상적인 면으로 커지고 싶다면 세상적으로 큰 데 가서 섬겨라. 그러나 거기서는 속사람이 커진다는 보장은 없다.


자기가 주님의 원하심으로 주님의 눈에 합격되게 커지려면 빨리 낮아져서 주님께 순종하여 수종을 들어라. 자기가 커질 수 있는 교훈, 자기가 커질 수 있는 장소에 가서 빨리 내려가서 그 일에 수종들 때 빨리 커진다. 안 내려가면 안 커진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가 없는 곳에서 충성봉사 하는 자들을 제일 첫째라고 할지라도 그 자는 실상적 실속이 없는 믿음들이다. 다시 말하면 전부는 헛노력이다. 본인들이 다 그런 식으로 교회생활을 했으니까 이것이 증명이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교회생활을 하면서 뭘 깨달았느냐? 뭘 알았느냐? 깨닫지를 못하니 자기 성격 성질을 못 고치지, 그러다보니 예수를 믿으면서도 가정파단이 되지, 가정파탄이 되니 자녀들 교육이 안 되지. 이건 큰 실수다.


바로 못 배우고 바로 못 깨달으면 멸망이다. 예수 믿어도 멸망이다. 이렇게 되면 안 믿는 사람 중에 일반적으로 잘 사는 자들이 그렇게 예수 믿는 자기에게 뭐라고 하겠느냐? 자기 얼굴에, 자기의 등에 하나님의 얼굴이 있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서 제발 헛노력하지 말고 헛 믿지 말라. 이것은 예를 들어서 한 달 내내 힘들여서 일을 했는데 돈 줄 자가 도망을 가서 돈을 한 푼도 못 받는 것과 같다. 세상에는 그런 원통성이 있듯이 예수를 믿어도 영적인 면에서 원통성이 있는 거다.


주님의 구원운동에 섬김이란 일반 세상 사회적 봉사적인 개념이 아니다. 교회의 섬김은 자기가 커지는 곳에서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셔서 우리를 섬김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서 영원히 존귀 영광자로 만들어지게 되는 효력이 있는 섬김이었다. 섬김의 도를 예수님께서 먼저 보여주셨다.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먼저는 하나님의 일에 섬김이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가 세상적으로 나갈 때는 그거는 섬기지 말아라. 그거는 헛노력이다. 거기에서는 너는 안 커진다. 멸망이고 교만이다. 모든 기독자들은 이 섬김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목사님들은 더 그렇다.


교회 안에서 겸손하고 순종하여 수종들 줄을 모르고 서로 높임을 받으려 하고 대우를 받으려고만 한다면 그 사람은 신앙 믿음이 커지지를 않는다. 인격이 성품이 커지지를 않는다. 자기가 낮아져서 섬기지 못하면 그 사람은 천국복음 구원의 일에 섬기지 못하니 커지지를 않는다. 이치가 그렇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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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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