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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전한 복음, 자유케 하는 진리!

  • 류공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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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복음, 자유케 하는 진리!
2011년 3월 12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갈라디아서 2:1-5

  오늘은 갈라디아서 강해 다섯 번째 시간이다. 2장인데, 여기서 우리는 먼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미 첫 번째 시간에 말씀을 드렸는데, 이 배경을 아는 것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제 1차 전도여행 때 갈라디아 지방에까지 가서 복음 전하고 그래서 세워진 교회들이 갈라디아 교회들이다. 그런데 후에 어떤 일이 생겼는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교사들이 그릇된 가르침을 주었다.

  이들은 바리새파 출신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된 이들인데, 여전히 할례와 율법을 준수해야지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이방인 신자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준수해야지만 온전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바울은 예수님의 직계 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도가 아니며, 그가 전하는 복음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서 받은 복음과 다르다고 거짓 비방을 일삼았던 것이다.

  그들의 거짓 복음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미혹되어 따르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참된 복음과 자신의 사도성에 대해 바르게 가르쳐줄 필요를 느꼈고 그래서 쓴 서신이 바로 갈라디아서이다.
  
  이러한 배경이 바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가게 된 이유가 된다. 지난주에 우리는 바울이 회심한 지 삼년 째 되는 해에 예루살렘에 가서 게바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2:1에서는 두 번째 방문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1절을 우리말 성경으로 읽어보자.

  “그 후 14년이 지나서 나는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여기서 14년은 첫 번째 예루살렘에 방문한지 14년이 지나서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을 말한다. 바울이 회심한 해가 주후 32년이었으니까 이때는 17년이 지난 49년으로, 1차 전도 여행을 마친 다음해로 여겨진다.

  이때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갔다. 바나바와 디도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이 둘은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서 곳곳에 등장하는 중요 인물이기 때문에 잠시 이들이 누구인지를 볼 필요가 있다.

  바나바는 유대인일까 이방인일까? 유대인이다. 구브로 섬, 그러니까 지금으로는 사이프러스 출신 유대인이다. 그의 본명은 요셉이다. 바나바는 헬라식 이름이다.

  부유한 지주 출신이었는데, 시도행전 4:37에 따르면 자신의 재산을 교회 앞에 내놓아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데 사용하게 했고, 11:24에 보면 착하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바울과 바나바의 인연은 사울(바울의 본명)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 이후였는데, 제자들은 사울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유대교 행동대장이었고, 그때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다마스커스)으로 가던 중이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을 했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사울을 도운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다. 사울이 제자들을 만나 교제하고자 했으나 제자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믿지 못하자, 바나바가 나서서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겪은 일들을 설명해 주고 변호해줌으로서 사도들과 성도들이 비로소 사울이 회심한 것을 믿게 된다.

  그리고 바나바는 인디옥 교회에서 사역을 했는데, 바울을 데리고 와서 함께 무리를 가르쳤고, 1차 전도 여행을 함께 했던 동역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로서 존경 받는 인물이었고, 예루살렘의 사도들과도 친분이 있었기에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게 된 것이다.

  디도의 경우는 헬라인이다. 그는 바울에 의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헬라인이다. 이후 디도는 바울의 좋은 동역자로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협력했다. 디도는 그리스 아래에 있는 그레데 섬, 오늘날 크레테 섬에서 바울과 함께 전도했고 그곳에 남아 장로들을 세우고 교회를 돌보는 일을 한 그레데 교회의 초대 목회자였다. 디도가 그레데 교회에서 목회할 때 바울이 보낸 편지가 바로 디도서이다.

  디도를 데리고 간 이유는 무엇일까? 바나바와 동행한 이유는 그가 자신의 동역자이며 신앙적으로 존경 받는 인물이었고 사도들과 친분이 있었기에 자신의 사역을 설명할 때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인 디도는 왜 데리고 갔을까? 이후에 보겠지만 그가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이 온전한 복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증인으로 데리고 간 것이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2절을 봐도 마찬가지다.

  “내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따른 것으로 나는 이방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도 제시했습니다. 다만 유명하다 하는 사람들에게는 개별적으로 복음을 제시했는데 이는 내가 달음질하고 있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따른 것임을 밝히고 있다.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소환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은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하셨을까? 그 내용이 다음에 있다. 무엇을 위해서? 이방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도 제시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말한다. 아마도 공식적인 예배나 모임에서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제시했을 것이다.

  그리고 유명하다는 하는 사람들에게도 개별적으로 복음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유명하다는 하는 사람들, 개역개정성경에는 유력한 자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유명하다, 유력한 자란 표현은 당시 사회에서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을 말한다. 9절에 다시 반복되는데,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와 제자인 게바 베드로와 요한 등을 따로 만나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에 대해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시한다는 말은 상의하려고 의견을 교환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제시했고 무엇을 상의하려고 의견을 교환했을까? 자신이 이방인에게 전한 복음이다.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복음이다. 할례나 율법 준수 등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내용의 복음을 자신이 전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사도들과 공유하고 협력을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비록 바울은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복음을 받았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가 보다 더 효과적으로 이방인 선교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사도들도 이를 받아들이고 함께 공유하며 보조를 맞추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방인 선교에 있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공유하고 협력할 것을 명하셨다는 뜻이다. 바울 홀로 사역할 수 있지만, 보다 더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함께 공유하고 협력하는 동역의 관계를 명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동역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각각 다른 환경과 다른 때에 부르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함께 뜻을 모으고 협력하여 일할 것을 원하신다. 혼자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 전파를 위해 모든 성도들과 사역자들이 함께 마음과 뜻을 모아 공유하고 협력하여 동역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다.

  지난 섬김이 세미나 첫 시간에 나눈 것처럼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이것이 곧 우주적인 교회, 보편적인 교회, 가톨릭의 의미이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이며, 이단이 아닌 한 모든 교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함께 마음과 힘을 모아야 하고 특별히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복음을 전하며 구제하는 일에 함께 공유하고 동역해야 한다.

  우리 교회에 주신 비전이 바로 이것이다. 이스라엘 선교에서의 협력사역이다. 이스라엘 선교에 순수하고 열정이 있는 한인 선교사들과 메시아닉 유대인 사역자들과 이스라엘이든 한국이든 이스라엘 선교에 대한 비전과 열정이 있는 교회라면 함께 마음과 뜻을 모아 협력하여 사역하라고 주님께서 주신 비전이다.

  그 첫 발을 작년 12월에 내딛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유대인 사역팀이다. 선교단체 파송으로 캠퍼스 사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손요셉-김마리아 선교사 부부와 우리 교회에서 유대인 지체들을 양육하며 섬기고 있는 정황일-송은숙 집사님 부부가 함께 마음과 뜻을 모아 유대인 선교를 공유하고 협력하는 사역이다.

  나는 이 사역이 주님께서 주신 비전이기에, 또한 주님께서 기뻐하실 협력이기에 더욱 부흥할 것이고,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 믿는다. 더불어 주님께서 주신 비전대로 앞으로 더 많은 선교사들과 유대인 사역자들과 교회들과 함께 이스라엘 선교 협력 사역을 해나갈 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신다. 바울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방인 선교에 있어 예루살렘 교회와 지도자들과 공유하고 협력을 명하신 하나님께서 그 뜻을 친히 이루신 것이다. 9절이 그것이다.

  “기둥같이 여김받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청했습니다. 우리가 이방 사람에게로, 그들은 할례받은 사람에게로 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 같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과 교제의 악수를 했다는 것은 이들이 바울의 이방인 선교와 이방인에게 전한 복음을 그대로 인정했고, 함께 협력할 것을 약속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만약 반대가 있었다면 바울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가 2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달음질하고 있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된 수고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사람들의 인정과 상관없이 그는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달음질을 계속하겠지만, 반대가 있다면 그 수고가 힘든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도 같은 복음이었겠지만 이들 교회의 멤버들이 유대인들이었기에 자칫 이방인들도 우리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따라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고 어떤 반대도 없이 이방인에게 전하는 바울의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인정했으며, 이방인 선교에 있어 협력하기로 뜻을 모은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 일이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같은 마음을 주시고 그래서 함께 공유하며 인정하며 협력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원리 중에 하나이다.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해서 그 뜻에 순종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신뢰하고 인내하며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고 신앙의 정도를 걷는 일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신다.

  그 뜻이 분명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게 여기시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신다. 나는 주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기도하고 인내하며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께서 그분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일하신다. 이것이 신앙의 원리이다. 내가 해야 할 일과 하나님이 하실 일을 잘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두주 전에 서울광염교회 조현삼 목사님이 부교역자 둘과 함께 성지답사를 왔다. 우리 가정을 만나고 싶어 하셔서 네게브로 갔었다. 그날 밤에 대화를 나누면서 유대인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중에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나 예수님을 믿게 된 메시아닉 유대인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리히라는 유대인 자매를 소개해드렸고, 다음날 바르일란 대학교 내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 궁금해 하시는 것을 물으며 인터뷰와 촬영을 했었는데, 통역을 해드렸다. 그때 조목사님이 리히 자매에게 한국에 돌아가서 천불을 보내겠다고 하셨다. 전도 사역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내게 보내셨는데, 그 돈을 세켈로 인출해서 지난 주중에 만나 전달해주었다. 리히 자매가 천불에 대해 너무나 감사해 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자매는 성경 구절을 보석에 새겨서 만든 것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보석 회사에 팔아 생활도 하고 전도 사역을 했었는데, 그 회사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리히 자매 역시 판로가 막히게 되어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생활은 어찌 하겠으나 더 심각한 문제는 전도 사역이었다. 이 자매는 인터넷과 라디오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재정적인 문제로 이 사역을 중단하게 될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 중에 조현삼 목사님을 만나 갑작스런 인터뷰를 하게 되었고, 천불 지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니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 이 천불로 인해 다시 사역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께 이 문제로 기도를 했고 하나님께서 이런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응답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면서 사는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일하시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리히 자매뿐이겠는가?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다. 우리 교회는 늘 멤버가 바뀌기에 잘 모르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 교회는 2007년도 세워졌다. 4월 첫 주에 내가 부임했고 5월 첫 주에 창립예배를 드렸다.

  내가 부임하기 전에 하나님께 주신 비전이 이스라엘 선교이다. 그리고 부임한 후 청년들이 오기 시작했다. 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찾아왔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금요일 오후부터 안식일이 시작되기에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교회에 오려면 금요일 오후에 와서 어디선가 잠을 자고 다음날 교회로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숙소가 없으니 청년들이 해변가에서 침낭에서 자고 오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집사님들이 자기 집에서 재웠다. 점점 인원이 많아지니 이도 어려워졌고 그 상태로는 오래 지속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때 우리가 내린 결정이 청년들을 위한 숙소를 렌트하자는 것이었다. 그때가 5월 19일이었다. 그때 우리 교회 재정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결정을 했다. 회의 때 내가 그런 말을 했다. 청년들이 교회로 오는 것은 청년들을 말씀과 사랑으로 양육하고 섬기라는 주님의 뜻이니, 우리는 순종하면 된다. 그 다음은 주님께서 하실 일이다. 이 말에 모두 동의를 했고 숙소를 렌트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결정을 내리고 나서 바로 후원이 연결이 되었다. 그것도 두 군데에서!

  이스라엘 선교도 마찬가지다. 교회 창립 때부터 이스라엘 선교를 주님께서 주신 비전이자 사명으로 삼고 하려 하니까 주님께서 순수하고 열정적인 메시아닉 유대인 사역자들을 연결시켜 주셨고, 재정적인 부분도 채워주셨다. 수단교회 지원 역시 수단 난민들 교회에 대해 알게 되면서 주님께서 주신 부담에 순종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땅의 강도만난 자들이며 우리가 그들의 이웃, 곧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는 부담이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미자립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지원을 결정했고, 매달 500불의 지원을 하고 있으며, 생각지도 못한 서울광염교회와 연결시켜 주셔서 수단 교회의 예배처소 2년간 렌트비와 두 명의 리더의 신학교육을 해줄 수 있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렇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깨달아 그 뜻에 순종하고,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올바르게 가면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신다. 교회적으로도 그렇고, 여러분 개인적인 문제에서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라.

  예루살렘 방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을 경험한 바울은 이어서 디도의 이야기를 하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바리새파 출신 거짓 형제들에 대해 거론한다. 3절을 보자.

  “나와 함께 있는 디도는 그리스 사람이었지만 억지로 할례를 받도록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 헬라 사람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도록 강요하지 않았다고 하고 있다. 이 말은 디도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압력을 가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거절하고 다도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디도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압력을 가한 그들이 누구인가? 4절을 보자.

  “그 이유는 몰래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를 엿보려고 몰래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몰래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유대인들, 곧 바리새파에 있었다가 믿게 된 유대인들 중에 일부를 말한다. 이들이 할례와 율법 준수 문제로 교회에 어려움을 준 일이 생긴 것이다. 그 내용이 사도행전 15장에 나온다. 강해 첫 시간에 설명을 했는데, 이를 참고해서 읽으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보자. 왜 이들은 이방인들에게까지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방인들에게 찾아가 그렇게 하도록 압력을 가했을까?

  할례가 무엇인가? 의학적으로는 남자의 성기 앞부분의 살을 잘라내는 것이다. 요즘의 포경수술과 비슷한 것이다. 히브리어로는 할례를 ‘브릿 하밀라’(ברית המילה)라고 한다. ‘브릿’은 계약이란 뜻이고 ‘하’는 정관사, ‘밀라’는 완곡어법으로 남성의 성기를 뜻한다. 즉 무슨 뜻인가? 남성의 성기에 새겨놓은 계약이란 뜻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계약을 남성의 몸에 새겨놓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할례는 단순한 포경수술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계약이고 언약 백성의 표징이다.

  이 할례는 창세기 17:11에 처음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과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셨다. 그러면서 할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의 표증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선택되어 언약을 맺은 백성이라는 상징이며, 동시에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헌신하겠다는 약속의 상징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할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할례는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신체적인 증거였다. 문제는 이방인들의 경우다. 이방인들 가운데서 유대교로 개종을 원하던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할례였다.

  안식일 준수나 음식법 등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할례는 달랐다. 당시는 그리스 로마 시대였는데, 그 시대에서 할례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도자기 등에 그려진 남성의 모습을 보면 할례 받지 않은 모습인데, 당시 사회에서는 할례는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따라서 할례 받은 유대인들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강림 이후 교회가 시작되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되었다. 이들에게는 할례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만 그들은 유대인들이기에 할례는 당연한 것이었다.

  문제는 이방인들 신자들이 늘어나면서였다. 이방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많아지자 일부 유대인들이 할례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왜? 전에도 이방인들이 유대교를 믿을 경우 할례를 해왔기 때문에. 그리고 할례는 언약 백성의 표징이고 교회도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니까 이방인들도 언약 백성이 되려면 당연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미 말한 것처럼 당시 그리스 로마 시대에 할례는 수치스런 일로 여겨졌기에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 바리새파 출신 유대인들의 끈질긴 주장에 넘어간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마치 할례를 받지 않으면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유대인이었다. 그도 할례를 받았고 그의 제자인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풀었다. 디모데의 경우는 아버지는 헬라인이지만 어머니가 유대인이었기에 유대인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디모데가 살던 지역의 유대인들에게 전도를 하기 위해 그리 한 것이었다.

  하지만 디도의 경우는 달랐다. 디도는 헬라인이었고, 바울이 전한 복음은 할례나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이신칭의의 복음이었다. 굳이 할례를 행할 이유가 없었다.

  예루살렘에 방문했던 이때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바리새파 출신 유대인들이 이방인인 디도에게 할례 받을 것을 주장하고 압력을 행한 것이었다. 상당히 격렬했을 것이다.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만 우리와 같은 언약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즉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단호했다. 유대인으로서 할례를 받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유대인이라는 신분을 나타내는 관습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며 주장할 때는 달랐다. 그것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할례는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주장이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 이것 하나만이 유일한 조건일 뿐이다.

  게다가 할례를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흐리게 만드는 행위인 것이다. 바리새파 출신 유대인들이 깨닫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자 하신 신앙공동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6:1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배경을 잘 알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고나서 하신 말씀이다. 이 반석, 예수님을 주님으로 그리스도,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믿음을 말한다. 그 믿음 위에 나의 교회, 원어의 뜻으로 하면 나의 공동체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공동체는 이전의 유대교 신앙공동체와는 성격 자체가 다르다. 유대교의 기초가 할례와 율법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기초는 오직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을 구주로,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믿음이 그 기초이다.

  할례나 율법의 준수로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다. 할례는 그저 유대인들의 관습일 뿐이다.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율법도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로 즐겁게 지키는 것이다.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우시고자 했던 신앙공동체의 모습인데, 바리새파 출신 유대인 신자들 중 일부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할례를 통해 언약 백성이 될 수 있으며, 율법 준수를 통해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고 이방인 신자들에게까지 할례를 강요하고 율법을 준수해야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며 압력을 가했던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복음을 받은 바울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의 뜻을 거스르는 죄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음을 부인하는 결과를 낳게 하기에 성령을 훼방하는 죄이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기에 율법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는 자유가 무엇인지도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율법은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다. 율법은 언약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일 뿐이지 그것을 다 지켰다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속박에 갇혀버리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았던 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 그들은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를 엿보려고 몰래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그들의 주장과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고, 이는 복음의 진리가 예수 믿는 이들에게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복음의 진리란 다른 말로는 진리의 복음이다. 참된 복음이라고 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온전한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온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 복음이다. 여기서 더하거나 덜하면 그것은 온전한 복음이 아니다. 거짓 복음이고 이단적인 가르침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 복음만이 온전한 복음이고 이 온전한 복음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준다.

  온전한 복음이 주는 자유가 무엇인가? 죄로부터의 자유다. 이전에는 죄에 종노릇하면 살았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용서 받았고 그분의 도움으로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죄를 이길 수 없으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죄에 끌려 다니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용서 받는 자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자유하다. 비록 내 안에는 죄성이 있고 죄의 유혹이 항상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의지할 때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죄에 질질 끌려 다니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죄로부터의 자유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해야 하는가? 그 피로만 죄용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성령 충만을 구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하는가? 그래야만 죄에 끌려 다니지 않기 때문이고 죄를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은 자신의 노력으로 죄를 이기겠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가능하고 한다한들 자기 공로, 자기 의일 뿐이다.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분의 성령이시다.

  온전한 복음이 주는 자유는 사탄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다. 죄에 종노릇 했다는 말은 사탄에게 붙잡혀 종노릇했다는 뜻이다. 죄의 삯은 죽음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 승리하심으로 사탄을 굴복시키셨고, 죽음에서도 승리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사탄은 힘을 잃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탄의 손아귀에서 빼어내서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다. 우리는 사탄 소속이 아니라 예수님 소속이다. 그래서 자유하다.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라. 에베소서 6장에 있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사탄의 유혹과 공격을 능히 이겨낼 수 있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한다. 무슨 뜻인가?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고 우리들은 그 이후에 생길 열매들이다.

  우리가 죽어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품에 안길 것이기에 자유하고, 우리의 몸도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기에 죽음으로부터 자유한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자유한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음에 대해 자유했기에 온갖 핍박과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된 것이다.

  온전한 복음은 우리를 온전케 한다. 죄로부터, 사탄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온전케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상처와 쓴 뿌리로부터 온전케 하고, 우리의 모난 성품과 인격으로부터 온전케 하고, 우리의 거짓과 탐욕으로부터도 온전케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샬롬이다. 샬롬은 단순한 평화가 아니라 완전함이다. 온전해지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해지고, 우리의 영혼과 육체와 심령과 인격과 삶과 가치관과 인간관계까지 모든 것이 온전해 지는 것이다. 이것이 온전한 구원이다. 그래서 구원은 완전함이다. 샬롬이다. 자유함이다. 온전해져야 자유해진다.

  온전한 복음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는 것이다. 온전한 복음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이 온전한 복음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 온전한 복음을 더욱 더 굳게 붙잡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라. 그분의 용서 안에 거하라. 그분의 손길이 나의 상처 난 심령, 쓴 뿌리가 있는 깊은 곳까지 닿게 해야 한다. 그분의 숨결이 나의 딱딱하고 고집 세고 모난 성품에 닿도록 해야 한다. 그분의 치유하시는 능력이 나의 육체의 질병에 닿게 해야 한다. 그분의 지혜와 전능하심이 나의 안과 나의 삶 구석구석을 채우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온전케 하시고 온전함이 주는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다시 한 번 권면한다. 온전한 복음을 붙잡으라. 오직 예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를 힘쓰라. 그분을 붙잡고 의지하고 신뢰하고 오직 예수만을 구하라. 그분의 온전하심이 당신을 온전케 하실 것이고, 그분의 한없는 자유가 여러분들을 자유케 하실 것이다.

* 기도:

1.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 됨과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교회임을 기억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복음 전파에 연합하게 하소서. 우리 교회에 주신 이스라엘 선교 협력 사역이 더욱 더 부흥하고 열매 맺게 하시고 유대인 사역팀 가운데 갑절의 은혜를 더하소서.

2.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나는 다만 하나님의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잘 분별해서 그 뜻에 순종하며,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며 인내하며 믿음의 길을 가게 하소서.

3.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나를 온전케 하시고 자유케 하옵소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온전한 복음을 붙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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