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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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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40절-47절: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고 우리를 위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이냐? 냉수 한 그릇이라도 우리에게 주는 자다. 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느냐? 그것은 예수님께 속한 자라고 준 것이다.


여기서 ‘물 한 그릇이라도’ 라고 한 이 물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 라는 그 말을 집중해서 생각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란 천국복음의 일에 수종을 드는 자이니, 이 사람은 천국복음을 귀하고 존경스럽게 여기는 자이다. 곧 믿는 우리와 마음을 같이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과 같이 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일을 멀리서 또는 가까이에서 수종을 드는 자들이다. 이 일에 반대를 하고 핍박을 하고 훼방을 하는 자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구원의 일에 훼방을 했다.


지금도 성경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창조의 목적대로 성경기록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이룰구원의 교훈을 반대하는 자들이 많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이 일에 반대는 하지 않으나 마음을 같이 하지 않고 자기 주관적으로 따르는 자가 많고, 따로 가는 자들이 많다. 이것이 다 천국복음의 일에 훼방자들이다. 우리를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주님의 일에 같이 수종드는 자이다.


물 한 그릇을 가지고 올 때는 가까이 있는 사람이 가지고 온다. 그러니까 같은 노선의 신앙자들이다. 마음을 같이 하고, 생각을 같이 하고, 활동을 같이 하고, 소원 목적을 같이 하는 자들이다. 가까이서 같이 일을 하면서 같이 땀을 흘리고 목마른 것을 보고 옆에서 같이 수종드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기뻐 보시고 어떤 모양으로 건 보상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구원의 일에 동참도 없고 참여도 없고 협조도 없다면 안 하느니만큼 거기에 대한 적절한 보응이 왜 없겠느냐?


42절: ‘나를 믿는 이 소자 중에.’ 소자는 글자대로는 작은 자이지만 그러나 이 소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기 때문에 앞으로 미래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영능의 능력자로 존귀 영광자로 성장할 수 있는 자이다. 이런 소자를 실족 즉, 넘어지게 만들면, 진리본질로 생명 길로 못 가게 육적 비진리적 세상적 옛사람 부패성적으로 가르치면 이는 그 하는 짓이 마귀적이다. 마귀가 시험을 걸어서 넘겼듯이 사람의 가르침이 그렇게 들어가면 마귀가 하는 짓을 하는 거다.


비진리적 가르침에는 인정정실이 들어가고, 물질적 소원 목적이 들어가고, 공갈 협박이 들어가고, 신비적 체험도 들어가고 강조하고, 현재적 물질축복도 들어가고, 종교적 행사적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이 많이 들어간다. 그런 위주로 되니 종교적인 부흥목적으로 나가게 된다. 이런 곳에서는 예수님을 열심히 믿게는 해도 깨닫는 면에서는 생명의 구원이치에서 이탈을 시킨다.


우리가 가는 길은 생명 길 좁은 길인데 왜 좁은 길이냐?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나가니 그렇다. 그런데 세상적인 여러 가지 가르침이 되면 이것은 넓은 길이므로 생명 길 좁은 길에서 실족된 상태가 된다.


‘실족케 하는 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으리라.’ 그러니까 사람을 하나님의 설계대로 바로 세우기 위해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또 사건 환경 물질을 동원시키고, 또 하나님의 신에 감화 감동을 시켜서 깨닫도록 하시는 건데 거짓 종들 이단자들 사단 마귀의 종들은 그 면이 안 되도록 하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큰 연자 맷돌을 목에 달아서 깊은 바다에 던지면 사람이 물에서 떠오르지를 않는다. 세상이 끝난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하심은 영원히 보기 싫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를 실족케 하는 자는 영원히 꼴도 보기 싫다는 것이다. 그림자도 보기 싫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목적에서 완전히 멸망자로 만들었으니, 사람을 못 쓰게 만들었으니, 사람을 영원히 망하게 만들었으니, 사람은 영원에 속한 것인데 이런 사람을 영원히 망하게 했으면 영원히 보기가 싫은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런 짓을 했다. 대표적으로 말하자면 구약 여로보암 왕 때도, 아합 왕 때도, 모세 때도, 그리고 신약의 예수님 때도, 사도시대 때도,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거짓된 자들과 이단성을 가진 자들과 세상 속화된 인도자들이 생명 길 좁은 길로 못 가도록 여러 가지로 계속 유혹과 미혹을 하고 있다.


이방 불신세상은 불신세상대로 우리의 눈을 유혹하고, 비진리로 나가는 자들은 교회에서의 가르침이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못 듣도록 완전히 세상소리로 유혹 미혹을 하고 있다. 이게 미혹의 영, 거짓의 영이다. 이들은 바른 길을 못 가게 한다.


43절: 두 손을 주신 것은 일을 하라는 것이고, 손은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손이다. 또한 무엇을 만들기도 하는 손이다. 그리고 일을 할 때는 어떤 소원이나 목적을 가지고 일을 한다. 여기서 구별해야 할 것은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하늘에 소원 목적을 둔 일이 있고, 땅에 소원 목적을 둔 일이 있다는 것이다.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고 하는 것은 땅에 소원과 목적을 둔 그 정신은 자르라는 말이다. 일은 하되 소원 목적을 그렇게 갖는 정신을 자르라 그 말이다. 손을 자르라는 것은 그 정신을 자르라는 것이지 자기 육체의 손을 자르라는 말은 아니다. 말씀의 뜻을 모르는 자들은 문자 그대로 말을 한다. 그럴 경우 ‘손이 범죄 하거든 한쪽 손을 잘라라’ 한 이 말씀을 어떻게 실행을 할 것이냐?


자기 손을 자르면 아픈 고통이 있지만 잘라야 하듯이 세상을 목적한 삶은 자기 육신에 손해가 나더라도 잘라라. 예수 믿는 자로서 이걸 안 찍으면 살아갈수록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이다.


손은 일하는 손인데, 믿는 자로서 생계유지를 하려고 일을 하는 것은 예수를 잘 믿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목적적으로 세상에 소원을 둔 그 일 그 역사 그 손 그 정신이면 그 면을 자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일은 하되 세상을 목적으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의 삶의 목적을 세상에 두고 있으면 예수 믿는 자로서 고통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소원 목적을 두고 우리를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드셨고,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우리로 천국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지라고 사건진행 역사진행을 하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는 신령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는 소원 목적을 두고 세상에서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 소원 목적을 두고 살면 그 결과는 꺼지지 않는 불이다. 이 말은 영원히 지옥이라는 말이 아니라, 죽어서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애정권 치리권 생명권 밖으로 쓰레기처럼 버려져서 고통의 연속으로 살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두 손을 가지고 사느니 즉, 소원 목적을 세상에 두고 사느니 한 손의 사역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처럼 세상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는 것과 같아서 편하겠느냐, 힘이 들겠느냐? 힘이 든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는 거냐? 자기 마음속에서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면 되겠느냐? 힘든 거다. 쉽게 말해서 한 집안에서 시어머니도 섬기고 친정어머니도 섬기면 잘 될까? 며느리 쪽에서는 한다고 할지라도 두 어머니의 마음은 안 그럴 것이다.


한 손을 가지고 천국에 가는 게 훨씬 낫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세상에서 먹고 마실 일은 하지만 천국에 소원 목적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소원 목적으로 한 그 쪽은 자르고 일을 하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세상 일과 천국의 일 두 가지를 놓고 어느 것을 먼저 할까?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는 없다. 어떻게 사는 것이 편하겠고, 어느 게 하나님의 뜻이겠느냐?


45절: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려라.’ 두 발은 무엇을 하라는 발이냐? 발은 길을 가는 발이다. 두 발로 길을 가는데, 가야 될 길이 있고 안 가야 될 길이 있다. 가야 될 길은 하나님의 길, 영생 길, 생명 길, 좁은 길, 가지 말아야 할 길은 넓은 길, 저주의 길, 심판의 길, 멸망의 길이니 어느 누가 그 길로 가길 원하겠느냐?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느 길로 가신 분이냐?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가신 생명 길 좁은 길을 따라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한 평생 하나님의 의사단일의 길로 갔다.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넓은 길과 좁은 길을 알면서도 어느 새 넓은 길로 빠져들기 쉬운데 이걸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어느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 조차 모른 채 넓은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 소원 목적적 누림성으로 가고 있으면 그 사람은 고통의 연속이다. 절대로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누리려고 할수록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맨 그렇다.


만일 한 발을 찍으면 한 발로 가는 것이 고통스럽겠지만 그래도 비교를 한다면 한 발을 가지고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원 목적을 세상 넓은 길에 두고 가는 그 정신의 발을 찍으라는 것이다. 그 삶의 길로 가는 그 정신을 찍어라 그 말이다. 그렇게 가면 시간낭비 물질낭비 노력낭비 일생낭비가 돼버린다. 그 쪽으로 가는 그 정신을 찍고 생명 길 좁은 길 영생 길 한 길로만 가는 것이 자기의 사는 길이다. 이렇게 사는 게 쓰레기 취급을 받아 고통적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


실족은 사람이 영생 길 생명 길에서 이탈되어서 세상 넓은 길로 가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딴 길로 넘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영생 길이 아니면 사망 길이니까 이렇게 되면 사람이 사망 길로 넘어졌구나. 길이 아닌 길로 가는구나. 신앙 믿음이 아닌 길로 가는구나. 예수를 믿어도 넓은 길로 가면 그건 예수 믿는 길이 아니다 그 말이다. 영생 길에서 사망 길로 넘어졌구나.


영의 눈으로 보는 눈이 없어서 영과 육을 구별을 못하면 그는 실족된 자이다. 실족된 상태로 온 세상을 얻었다고 해도, 넘어진 상태로 온 세상을 얻었다고 해도 그에게는 전부는 멸망이고 사망이고 심판이다.


47절: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두 눈은 보라는 눈이요, 이 눈으로 잘 보고 판단하고 구별하여 손해 보는 쪽으로 선택하지 말고 영원히 사는 쪽으로 선택을 해서 살아야 한다. 눈으로 보고 천국을 천국만큼, 세상을 세상만큼 그 가치를 알아야 한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기가 어디를 보는 눈을 가지고 가치판단을 하고 평가하고 선택을 하고 사느냐? 그 결과가 자기에게 영생으로 다가올지, 존귀 영광으로 다가올지, 아니면 쓰레기더미로 다가올지? 자기가 본 그대로 자기에게 다가온다.


오늘날 모든 인생은 늙고 젊고 간에,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전부는 눈으로 보고 귀고 듣고 발로 길을 가고 손으로 일을 한다. 안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다 길을 가고 있다. 그런데 어떤 소원 목적을 가지고 어떤 길로 가고 있느냐? 그것에 따라서 얼마 안 가서 자기는 존귀와 영광으로, 또는 처절로 심판으로 나타난다. 간 것만큼 나타난다.


그러면 안 가고 가만있으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냐? 안 가고 가만히 서 있어도 심판이다. 길을 빨리 가는 사람에게 해가 떴다가 지나가는데,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사람에게는 해도 안 뜨고 안 지고 그런 것이냐? 일을 하는 사람도 하루해가 지나가고, 노는 사람도 하루해가 지나가고, 잠자는 사람에게도 하루해가 지나간다. 그런데 그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 (계속)


*************************

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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