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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 (합 3: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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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 (Thanksgiving in the Day of Distress)
성경 : 합 3:16-19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감사가 사라진 메마른 세상입니다. 감사란 약에 쓰려고 찾아도 찾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감사에 대해 자주, 그리고 강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요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옛 성현들도 감사의 삶을 강조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공자님은 자신이 싫어하는 인간상이 있는데 첫째는 타인의 실패를 기뻐하는 자이며, 둘째는 윗사람을 헐뜯는 자, 곧 앞에서는 굽신거리고 뒤에서는 욕하는 자이고, 셋째는 용기는 있으나 예의가 없는 자, 그리고 넷째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 곧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가장 싫어하는 자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못박았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진정한 감사를 드리는 사람을 만납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사람 하박국 선지자에게는 감사할 조건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혼자 아무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감사가 아닙니다. 19절 끝부분에 있는 것처럼 수금에 맞추어서 악단장의 지휘를 받아가면서 만백성이 보는 가운데 큰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각자의 감사생활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 옛날 하박국 선지자에게 있었던 이 감격과 감사가 우리 모두에게도 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선지자는 어떠한 상황에서 감사의 찬미를 드렸습니까? 그가 그토록 감사했던 이유는 무엇이며, 감사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1. 바벨론의 침공 위협 앞에서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함 (= 극한 절망 중에 드리는 감사)

16절=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3장의 15절까지는 이스라엘의 대적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 그리고 선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였습니다. 이어지는 16~19절은 심판을 당하는 자로서 진솔하게 두려움을 토로하면서, 동시에 심판으로 인한 황폐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환란을 이겨낼 것이라고 다짐하며 구원의 신앙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감사의 찬미를 드리고 있을 때는 결코 평안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 환난날이 올 것을 내다보고 있다 했습니다. 선지자는 바벨론이 곧 유다를 침공하러 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유다를 치기 위해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지금 극한 절망 가운데서 감사 찬미를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어떤 나라입니까? 갈대아의 군사들은 또 어떻습니까? 그들은 무섭고 잔인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1:8).
바벨론의 기병들이 유다를 치러 곧 몰려올 것인데, 유다에는 그들과 맞붙어 싸울 만한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1:9). 
하박국 선지자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고 입술이 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3:16).
선지자의 몸 안에 있는 창자가 뒤틀리는 듯했습니다. 온 몸의 뼈마디가 썩어 문드러지는 듯한 아픔이 있었습니다. 여기 ‘목소리’는 하나님의 목소리 즉 3:2절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말하고, ‘입술이 떨렸다’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야 하는 선지자로서의 고충과 괴로운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바는 선지자 자신의 두려움 보다는 그 두려움의 원인이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선지자는 이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으며 스스로 감당조차 할 수 없지만, 그것은 반드시 실현될 수밖에 없는 여호와의 말씀이란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박국 선지자는 환난을 눈앞에 두고서도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걱정, 근심, 두려움을 거룩하게 승화시켰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린 것입니다. 
천로역정을 저술한 존 번연(John Bunyan)은 아버지가 가난한 땜쟁이였습니다. 그가 16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그 다음해에 사랑하던 여동생 마가렛이 죽어 어머니와 나란히 묻혔습니다. 여동생이 죽고 한 달이 못되어 계모가 들어왔습니다. 얼마 후 가장 사랑하던 친구가 전쟁터에서 총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죽었습니다. 번연은 매년 큰 충격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가난한 집 처녀 메리와 결혼합니다.
첫 딸은 태어나면서부터 시각장애아였습니다. 4남매를 낳고 아내가 죽었습니다. 번연은 견디다 못해 술과 도박 그리고 춤과 여자로 세상을 멋대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잘 살기를 아예 포기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화살이 박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죄악에서 떠나 하늘에 속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지리라.”
영적인 충격을 받은 번연은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때 또 하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네가 살아 있는 것이다. 너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평화를 얻었다. 내가 너를 영원히 사랑하노라.”
그는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일생을 걸려 하늘 가는 길을 주님께 대한 감사의 심정으로 소설로 썼습니다. 이리하여 탄생한 것이 ‘천로역정’ 입니다. 이 책은 120개 이상의 나라말로 번역이 되어 성경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많이 읽히고 많이 팔린 책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어떤 어려운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벨론 군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던 하박국 선지자처럼 우리 또한 극한 절망 중에도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의 내공을 키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2. 유다가 폐허가 되어버릴 것을 알고도 하나님 때문에 찬송함 (= ‘~가 없을지라도’의 감사)

17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는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환난날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곧 갈대아인들이 유다를 짓밟을 것입니다. 유다는 폐허가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 땅에는 무화과 나무도 포도나무도 감람나무도 남아나지 못할 것입니다. 밭의 식물도 외양간의 소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현실은 비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위대한 접속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7절 끝부분에 있는 ‘~없을지라도’ 입니다. 이것은 모든 상황을 역전시켜 놓는 참으로 위대한 단어입니다. 선지자의 감사는 ‘~없을지라도’의 감사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1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누구 때문에 즐거워했습니까?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했습니다. 선지자는 무화과 포도 감람나무, 밭의 식물, 외양간의 소가 없을지라도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선지자 하박국은 조국 유다가 폐허가 되어버릴 것을 알고도 하나님 때문에 찬송했습니다. 그의 감사는 ‘~없을지라도’의 감사, ‘~할지라도’의 감사였습니다. 본문을 좀더 살펴봅시다.
본절에서 먼저 언급된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는 팔레스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유실수들이며 가장 흔한 나무들입니다. 상징적으로 보면 세 나무는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이 나무들이 무성하지 못하거나 열매도 소출도 없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에 이른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한 마디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선민 사회가 식생활, 종교, 의료, 의복, 농사 등 삶의 모든 부문에서 피폐하게 되고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게 될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없을지라도’의 감사는 참으로 대단한 신앙의 발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18절). 선지자는 ‘나의 구원의 하나님’ 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주변의 상황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고 끝내 붙들어야 할 것은 바로 ‘나의 구원’ 입니다. 물질적 필요를 채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 구원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박국 선지자의 모습은 오늘 참된 신앙인이 어떤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없을지라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삶을 말합니다. 
노아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에 찌들어 살 때 당세에 완전한 의인으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불신과 인본주의, 우상숭배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은 또 어떠합니까?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처절한 고난을 감수하면서도 하나님과 끝까지 동행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없을지라도’ 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계속하여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과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불신하며 가나안 정복이 불가능하다고 절망하는 현장에서도 오직 여호와 신앙으로 맞섰던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러하며, 아합 왕의 때에 온 이스라엘이 바알 앞에 무릎 꿇고 입맞추는 와중에서도 여호와 신앙을 고수한 칠천의 남은 자들이 그러하며, 풀무불과 사자굴에 던져질 위기 상황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킨 다니엘과 세 친구가 그러했습니다.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통조차 선한 것이라는 확신, 하나님께서 비록 자신을 환난 가운데 처하실지라도 궁극적으로 자신을 구원하시고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 없이는 ‘~없을지라도’의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평생 나환자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8.15 광복과 함께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3년 후 여순 반란사건 때 두 아들 동인, 동신을 공산주의자의 손에 의해 잃었습니다. 그는 애양원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중에 이 소식을 듣고도 태연하게 집회를 끝까지 인도하였습니다. 
손목사님은 두 아들의 장례식 날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서 몇 말씀 드립니다” 라고 하면서 감사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는 나같이 허물 많은 사람의 혈통 중에 순교자 자식이 나왔다는 사실을 감사합니다.
둘째는 수많은 성도 중에서 이 보배들을 하잘 것 없는 우리 집에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셋째는 3남과 3녀 중 가장 늠름하고 아름답고 잘난 장남과 차남을 하나님 앞으로 바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넷째는 한 아들 순교하기도 어려운데 두 아들이 순교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다섯째는 예수 믿다가 와석종신(臥席終身)하는 것도 큰 복인데 복음 전하다가 순교하는 영광을 누리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여섯째는 저들이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가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일곱 번째는 두 아들을 총살시킨 그 원수를 내 아들 삼을 수 있는 마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여덟 번째는 내 아들들 순교 열매로 인하여 무수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속출하게 될 것을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아홉 번째는 역경 속에서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 은혜를 생각하며 깊이 기뻐할 수 있는 마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열 번째는 이렇듯 과분한 축복 누리게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3.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실 하나님 때문에 노래함 (= 내일을 바라보며 드리는 감사)

19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본절은 하박국 선지자가 내일을 바라보며 감사함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고백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문제도, 어떤 역경도 근본적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참된 문제 해결자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상황과 형편을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하심에 대한 확신은 모든 성도가 가져야 할 확신이기도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됩니다.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사슴은 험한 산악 지역에서도 민첩하고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동물로 들노루(삼하 2:18)와 더불어 민첩함을 상징합니다. ‘높은 곳’은 17절에 제시된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극복한 자리를 의미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도에게 오는 모든 시련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선지자는 자신을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실 하나님 때문에 노래했습니다. ‘하박국’ 이라는 말은 ‘껴안은 자’ 라는 뜻을 갖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껴안고 계십니다. 그분이 껴안고 있는데 누가 해칠 수 있겠습니까! 
동두천에 사는 어떤 여인이 해산하기 위해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진찰 결과 정상 분만은 할 수 없고 수술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수술하려면 피가 필요한데 그 여인은 공교롭게도 한국인에게 드문 RH-AB형이었습니다. 
조선일보 기자가 이 사실을 신문에 알렸습니다. 아이도 산모도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모두가 안타까워 할 때였습니다. 마침 외출 나온 미군 병사가 이 사실을 알고 자기 피를 조금 빼어주려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환자 옆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병원측에서 피를 지나치게 빼는 바람에 그 병사는 죽고 말았습니다. 
산모가 해산하고 깨어보니 자신과 아기를 위해 미군 병사 한 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생 갚아야 할 은혜의 빚을 진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주님께 평생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롬 8:31-32=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서울의 영락교회 앞에 김응락 장로님의 순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영락교회가 김장로님을 그렇게 기리며 잊지 못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6.25 전쟁 중에 공산당들이 다 물러간 줄 알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김장로님은 교회당을 제일 먼저 찾았습니다. 그때 교회당 안에 숨어 있던 인민군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교회 정문에서 장로님을 총살하려고 하자 장로님은 공산당원에게 말했습니다. “죽기 전에 마지막 청이 있습니다.” 그들이 마지막 청이 무엇이냐고 묻자, “긴 시간이 아닙니다. 잠간만 교회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나온 후에 죽이십시오.”
김 장로님은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 마지막 기도를 간절히 드렸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흩어진 성도들을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기도드렸습니다. 어떤이의 말에 의하면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가게 된 것을 감사 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당당하게 공산당 앞으로 나와 장렬히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피난 후 가장 먼저 교회를 찾아와 순교하신 그 장로님을 영락교회는 영원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든 일이 있습니까? 지금 환난 가운데 있습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습니까? 
그럴수록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처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움에 처했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변함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묵상하십시오. 우리의 감사는 “비록 ~없을지라도”의 감사 수준으로 성숙되어야 합니다. 
올 한 해도 주님께서 우리를 평안과 건강함으로 인도해 주심을 감사하면서, 금년을 멋지게 마무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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