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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청교도의 감사신앙 (시 1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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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의 감사신앙 (시 107:1-9) 
 
 
❚추수감사주일을 맞으며

지난 한 주간 저는 개인적으로 꽤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목소리가 정상이 아닙니다만 감기가 아주 심하게 걸려서 몹시 힘든데 연말이라 이런 저런 교회 행사가 몰려 빠질 수도 없어서 설교를 할 때마다, 기도회를 인도할 때마다 여러분 앞에 지치고 힘없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했습니다. 목사로서 성도들 앞에 늘 강건하고 힘 있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는데 본의 아니게 여러분에게 저의 약한 모습을 보여드려서 참 미안하고 그 자체가 힘든 일이었습니다. 아직 완쾌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누워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오늘 주일에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이 무엇보다 감사한 일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정채봉 시인의 <첫 마음>이라는 시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이 구절처럼 오늘 저는 추수감사절을 맞으며 가장 감사한 일을 하나만 꼽으라면 제가 그리 강골 체질이 아닌데 그래도 하나님이 제게 한 해 동안 건강 주셔서 강단을 지키고 목회하는 데 큰 어려움 없었던 것을 꼽고 싶습니다. 새해에는 이 시처럼 좀 더 제 몸을 잘 돌보아서 더 건강하고 힘 있는 모습으로 여러분 앞에 서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저처럼 올 한 해 가장 감사한 일 하나만 꼽으라면 무엇을 꼽으시겠습니까? 잠시 생각해 볼까요?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방금 우리가 했던 것처럼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한 해 동안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추수감사주일의 유래에 대해 알려면 반드시 ‘청교도’라고 일컫는 사람들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이 ‘청교도’란 어떤 사람들이며 이들이 추수감사절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청교도, 그들은 누구인가?

‘청교도’(淸敎徒)라는 한자말은 “깨끗한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영어의 ‘퓨리턴’(Puritan)을 이렇게 옮긴 것이지요. 청교도, 즉 이 퓨리턴들에 대해 알려면 잠시 영국의 역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국 역사에는 몇 명의 여왕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으로 불린 메리 여왕이 있습니다.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영국을 철저한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 개신교도들을 탄압하고 학살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피의 메리’지요. 그런데 메리 여왕은 5년 만에 죽고 그 뒤를 이어 영국의 여왕이 된 사람이 바로 엘리자베스 1세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개신교도였지만 그 신앙은 메리 여왕처럼 독실하지는 않았나봅니다. 자신은 비록 개신교였지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톨릭 신자들의 감정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구교인 가톨릭과 신교인 개신교 사이에 중용의 입장을 지키면서 둘 사이를 절묘하게 조화한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가 이때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어서 엘리자베스 1세는 여왕이 교회의 최고의 통치자임을 선포하는 ‘수장령’이라는 것을 발표합니다. 또한 1559년 ‘기도방식 통일법령’을 제정하고 영국의 모든 교회는 국교회인 성공회의 예배와 기도 형식을 따르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도 성공회가 있습니다만 혹시 성공회 예배를 보신 적이 있는지요? 분명 성공회는 우리 장로교처럼 개신교입니다. 

그런데도 앞에서 설명한 배경 때문에 예배 방식은 거의 가톨릭, 천주교와 흡사합니다. 그러니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여왕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영국의 모든 교회는, 심지어 개신교도 다 성공회의 예배 방식을 따르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마치 우리 장로교회에서 천주교식 미사를 드리라고 명령한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여왕의 권력이 무서워 입을 다물었습니다. 바로 이때 등장한 사람들이 퓨리턴, 즉 청교도들입니다. 청교도는 칼빈주의(장로교의 아버지)의 철저한 원리를 따릅니다. 그들은 결코 여왕의 명령대로 성공회의 제도나 예배를 따를 수 없다고 저항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당연히 무서운 핍박과 박해를 받게 되지요. 특히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제임스 1세, 찰스 1세 때는 엄청난 박해를 받아 네덜란드와 기타 지역으로 피해 갑니다. 

바로 그들 중에 몇몇 용감한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마침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 신대륙(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어 영국에서는 신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그곳에 거주할 사람들을 찾고 있었는데 인디언들만 사는 그 미개척지에 누가 가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청교도들 중에는 이 신대륙으로 건너가면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102명의 청교도가 1620년 9월 16일 그 유명한 메이플라워 호(號)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해 갑니다. 이들은 석 달 간의 항해 끝에 그해 12월 21일 지금의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 지방에 상륙합니다. 바로 이들이 신대륙에 상륙해 정착하고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파종을 해서 이듬해 첫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첫 수확을 기념해 청교도들은 축제를 열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바로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된 것이지요.

❚청교도의 감사신앙

그런데 아마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이미 들어본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몰라도 대충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에 가서 첫 추수를 감사한 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라는 이야기 정도는 들어본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절반도 모르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시 청교도들의 상황이 정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추수감사절을 지킬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일까요? 당시 청교도들의 상황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우선 많은 분들이 청교도들이 타고 간 메이플라워 호를 생각하면 큰 돛을 단 멋진 범선을 생각하며 아주 낭만적으로 생각합니다만 결코 아닙니다. 지금도 이들이 처음 상륙했던 플리머스 항구에 가보면 이 메이플라워 호가 복원되어 있는데 그 모습을 처음 본 사람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합니다. 

무게 180t, 길이 27.5m의 자그마한 배로 원래는 포도주를 운반하던 상선(商船)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상선을 개조해 102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꾸역꾸역 태우고 갔으니 항해가 어땠겠습니까? 게다가 폭풍우로 9월에 떠난 배는 석 달 만에 도착했습니다. 이 끔찍한 항해 도중 무려 44명이 목숨을 잃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원래 이들은 따뜻한 미국 동부의 버지니아에 도착해서 정착할 계획이었습니다만 험한 폭풍우 끝에 배가 도착한 곳은 원래 목적지인 버지니아보다 훨씬 북쪽인 매사추세츠였습니다. 아주 춥고 살기 힘든 곳이었지요. 버지니아로 가고 싶어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들은 결국 여기서 삶의 터전을 개척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도착한 것이 12월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이 닥쳐왔습니다. 인디언과 전염병의 위협도 이어졌습니다. 

첫해 겨울에 추위와 질병 배고픔으로 정착민의 절반 이상이 사망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꾹 참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많은 분들이 청교도들이 정착 이듬해인 1621년에 큰 풍년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라고 알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설교하는 목사님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실제로는 청교도들이 큰 수확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참담한 흉작이었습니다. 

청교도들은 흉년과 식량난으로 고생했으며 신대륙에 올 때 배를 빌리느라 진 빚이 이자가 불어나서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렸습니다. 그렇게 맨주먹 불끈 쥐고 노력했는데 완두콩농사도, 보리농사도 다 망쳤습니다. 인디언들에게 경작법을 배워 거둔 옥수수도 이십 에이커의 밭에서 난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한동안은 한 사람 당 하루 옥수수 5개가 식량의 전부로 배급되었습니다. 지금도 미국 사람들은 추수감사절에는 옥수수 5개를 식탁에 올려놓아 그 때의 궁핍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참담한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추수감사절이 정말 감사할 제목이 많아서 추수감사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강단에는 풍성한 오곡백과가 차려져 있는데 첫 번째 추수감사절은 이렇게 풍성한 소출을 거두어서 드린 예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감사할 제목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처음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날 때 계획한 일 중에 지금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꿈꾸었던 아메리칸 드림이 다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따뜻한 땅에 가서 농사지으려 했는데 폭풍우에 시달린 끝에 엉뚱한 곳에 도착했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집이 있습니까? 기름진 옥토가 있습니까? 엄청난 추위와 배고픔과 전염병이 그들을 끊임없이 위협했습니다. 그래도 다 참았습니다. 이번 농사만 잘 되면, 이번 농사만 풍년이 되면 그동안의 모든 고통과 실패는 다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꾹 참았습니다. 그런데 첫 수확은 먹고 살기도 힘들 정도로 흉년이었던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결과는 참담한 실패뿐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럴 때 정말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정말 원망과 불평 대신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못 하지요.

정말 놀라운 것은 이처럼 실망스럽고 참담한 결과를 앞에 두고 청교도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과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그 모든 상황에서도 추수감사절을 지키며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그 답은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07편에 나옵니다.

❚시편 107편의 감사신앙

시편 107편 본문을 함께 봅시다. 먼저 시편 107편 첫 절은 감사의 노래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 감사의 이유가 2절부터 나옵니다. 2절과 3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대적의 손에서 우리를 속량하고 구원하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고통스러운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셨으니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합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곧이어 어려움이 닥치게 됩니다. 그 어려움이 바로 4절과 5절에 묘사되고 있습니다. 함께 읽을까요?

4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이것은 아마도 바벨론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대 땅으로 돌아오면서 겪은 고통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었다고 해서 편안히 가시라고 이스라엘까지 모셔다 드렸겠습니까? 우리나라도 8.15 해방 이후에 일본 땅에 끌려가 있던 많은 동포들이 다시 돌아오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알아서 돌아와야 했으니 말입니다. 실제로 그 때 조선으로 돌아오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꽤 많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기가 알아서 유대 땅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그 때 척박한 광야를 지나고 사막을 지나며 목말라 고생하고 큰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6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 근심과 고통 중에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십니까? 그들을 고통에서 건져주셨답니다. 할렐루야!

또 바른 길로 인도하셔서 그들이 거주할 성읍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시편 107편의 시인은 이렇게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8절과 9절입니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보세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청교도들은 그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예배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된 것처럼 자신들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자유의 땅인 신대륙으로 가는 길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험난한 일을 수없이 겪고 많은 희생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정말 참담한 상황입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9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지금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장차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미리 내다보며 감사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믿음대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들의 삶이 풍성함을 누리게 되었고 이 작은 청교도 신앙으로 시작한 공동체가 지금의 미국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미국이 어떤 나라입니까? 

지금 미국의 지위가 흔들리니 어쩌니 하는 분들도 있지만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대국입니다.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대국입니다. 지금 미국을 욕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미국은 지금도 여전히 대통령이 취임할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나라입니다. 바로 청교도 신앙 때문입니다. 이 청교도 정신이 살아있는 한 미국은 여전히 기적을 이루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바로 그들의 조상이 시편 107편의 감사신앙을 가진 청교도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설교 첫머리에 올 한 해 가장 감사한 일 한 가지씩만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혹시 “나는 올 한 해 정말 복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신 분 계십니까? 그런 분들은 정말 하나님 앞에 뜨겁게 감사해야 합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은혜입니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해서, 내 정성을 바쳐서 그 은혜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혹 반대로 “감사는 무슨 감사? 

한 해를 돌아보니 참 복도 지질이도 없는 한 해였다”고 생각하신 분 계십니까? 하는 일마다 안 되고, 계획마다 틀어지고, 뜻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되십니까? 건강, 가정, 자녀, 사업과 직장 등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까? 그래서 감사의 제목을 찾으려야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분 계십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하나님 믿고 섬겼는데도 아무 복도 안 주셨다고 생각되십니까?

이런 분들은 오늘 시편 107편의 감사신앙을 배우십시오.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된 청교도들의 감사신앙을 배우기 바랍니다. 그것은 고통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아는 신앙입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손에 쥔 것이 없지만, 계획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지만 이 고통과 실패 뒤에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따라 올 것이라고 분명히 믿는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 8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반드시 나에게 기적을 베푸실 것이라고 믿고 그분을 찬송할 수 있기 바랍니다. 9절 말씀처럼 어떤 실패나 역경에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감사할 줄 아는 영혼에게 하나님이 반드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만족을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주린 영혼, 사모하는 영혼에게 하나님이 반드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믿음입니다. 풍성한 복과 은혜 중에 감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것이 진짜 감사신앙인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바로 이 진짜 감사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흉작과 실패 가운데서도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었고 그 결과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그들 자신에게, 나아가 그들의 가정과 후손 대대에 큰 복과 기적을 일으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진짜 감사신앙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추수감사주일이 바로 이런 기적을 일으키는 감사의 시간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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