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실패자의 신앙 고백 (욥 23:10-17)

첨부 1


실패자의 신앙 고백 (욥 23:10-17)

 
내 용 

11월은 모든 개신교회들이 감사의 달로 지킵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교회들과 세계 모든 개신 교회들이 다음 주일인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이 추수감사주일이 생기게 된 원인을 가지고 있는 미국은 11월 넷째 목요일을 ‘Thanks giving day’라고 하여 국가공휴일로 정하고 있습니다. 감사라는 것은 어떤 좋은 결과에 갖는 표현 감정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내가 소원했던 일에 현실적 성취가 나타날 때 그 기쁜 마음을 감사라고 표현합니다. 내가 부자 되기를 원했는데 부자가 되었다든지, 원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이루어졌다든지, 자녀 출산이 잘 되었다든지, 원하는 학교의 입학이나 취직, 당선, 당첨, 건강 회복 등등을 감사로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가난하게 되고 몸은 약해지고 소원했던 일은 하나도 소식이 없고 어려운 일만 반복되고 희망은 안 보이는데 그럴 때는 믿음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감사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욥기는 그 반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욥기서 성경에 아주 놀라운 힘이 있고 인간의 가장 어려운 문제 해결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욥기 성경은 내용이 아주 단순합니다. 

욥이라는 한 개인의 문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나옵니다. 이 사람은 유대 땅 동남쪽 우수 지방에 살던 3,500년 전 실제 인물입니다. 욥기 성경은 전체 제목을 하나 정한다면 “의인의 고난”이라고 붙일 수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다르게 생각하면 인간 고난의 훌륭한 해결책이라고 볼 수 있는 성경입니다. 

먼저 우리가 이 욥기서를 이해하기 전에 마음 정리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 구원 계획이 특별히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고,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이나 야곱의 일대기라든가 요셉 이야기, 모세와 유대 민족의 민족 이동 역사, 나아가서는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들,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다 똑같습니다. 그들은 모두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성경 인물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그 많은 핍박 역사에서 그 많은 순교자, 그 많은 성도들은 한결같이 나의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 역사가 아주 확실합니다. 욥도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합니다. 욥은 성경에 소개된 대로 말하면 모든 소원이 다 성취된, 하나도 나쁜 것이 없는 사람으로 소개가 됩니다. 가족 관계도 아주 건강한 가족입니다. 

아내와 더불어 10남매의 자녀를 둔 행복한 가장이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아들이 7명이고 딸이 3명이라고 했습니다. 이 많은 자녀들이 부모 마음에 걱정거리가 되고 문제가 된다면 불행인데 욥의 자녀들은 다 거룩합니다. 말썽거리가 하나도 없다고 성경에 나옵니다. 1장 5절에 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며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이렇게 철저한 신앙 교육 속에 아주 빈틈없는 거룩한 생활을 하는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가 성경에 나타납니다. 또 이렇게 좋은 가족들도 생활이 너무 빈궁하면 불행이 될 수 있으나 욥은 아주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의 재산의 규모를 구체적으로 성경이 밝혔습니다. 가축이 재산인 유목민 나라에서 그는 7천 마리의 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천 마리의 약대를 가지고 있었고, 1천 마리의 소가 있었고, 5백 마리의 나귀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떤 축산 농가도 가지고 있지 못한 현대 개념으로도 재벌 수준의 부자로 잘 살았습니다. 거기다가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목표로 하나도 잘못된 데가 없었습니다. 욥의 신앙이나 삶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보증하셨습니다. “욥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다. 동방의 의인이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욥이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하고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가장 참혹하고 고난스러운 지경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욥기서가 밝혀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욥의 주변의 좋은 것은 모조리 다 소멸되는 아픔을 겪었고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 욥기서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욥은 별안간 완전 실패자가 된 것입니다. 철저한 실패자의 자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욥기서는 지금 어떻게 욥을 조명하고 있느냐 하면 가장 좋은 곳에서 가장 처참한 자리로 떨어진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철저하게 실패한 실패자의 신앙 고백은 무엇인가? 우리들은 삶의 정서적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어떤 고난이 닥칠 때 마음이 넓은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액운이라고 말을 하고 불교문화에 젖은 사람들은 ‘아! 이 고난은 전생의 죄 때문이다.’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우리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을 합니까? 죄의 문제를 제일 먼저 기억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 고난에 대한 경보성으로 이 고난을 내가 주신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습관적으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만나는 많은 어려움은 내 책임이 제일 큰 자업자득이 될 때가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을 원망하게 됩니다. ‘아! 나는 이런 고통을 당해도 아주 싸다. 이것보다 10배나 더 고난스러워도 할 말이 없다.’ 이렇게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욥의 제일 큰 고민이 뭐냐? 이유를 모르는 겁니다. 비슷하기라도 해야 그쪽으로 생각을 할 텐데 아무리 찾아도 이유가 없습니다. 이렇게 고민이 너무 깊어지니까 욥이 성경에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 같은 사람은 세상에 출생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출생해서 그렇게 좋은 자리에 있다가 이렇게 나쁜 자리, 고난의 자리에 떨어지니 사람들이 나를 보고 하나님 잘 믿는 사람이 저렇게 되나? 이렇게 말할 거 같다.’ 그래서 뭐라고 말합니까? “나의 어머니가 왜 나를 낳아서 양육했으며 나에게 젖을 먹여서 키웠느냐? 차라리 낳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이런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예전에 금지곡이 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맹인 가수 이용복 씨가 부른 ‘43년 4월 3일생’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이 노래는 맹인 가수가 자신의 처지를 배경으로 불러서 가수로 데뷔하는데 성공한 노래였습니다. 그전에는 제가 부를 줄 알았었는데 “♬ 바람이 휘몰던 어느 날 밤에 떨어진 꽃잎처럼 나는 태어났다네” 이런 가사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그가 맹인이 되었잖아요? “♪ 내 눈에 보이던 아름다운 세상 잊을 수가 없어 가엾은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그런 노래이니 슬픈 일이 많은 시절에 이 노래는 대중적 호응을 얻어서 아주 인기가 높았습니다. 지금은 이런 노래를 아무도 안 들으려 합니다. 

그러면 욥은 무슨 고난이 왔는가?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첫째가 재산 몰락입니다. 성경에는 스바의 도적떼가 떼강도로 나타나 모든 가축을 몰고 가서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는 유목민이 없습니다. 유목민들의 제일 큰 걱정거리가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는 겁니다. 움직이는 재산이라 도둑떼가 와서 말 타고 와서 싹 몰아가면 한 마리도 안 남습니다. 이것은 미국 텍사스의 목장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났던 일입니다. 성경에도 보세요. 

누가복음 2장에 “그 지역의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목자들의 제일 큰 고민은 도둑떼가 한번 오면 그 날로 끝나는 겁니다. 싹 몰고 가는 겁니다. 욥은 지금 평생 쌓아온 자신의 행복 터전이 송두리째 소멸되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모두 몰고 가버린 겁니다. 남자와 여자의 마음 차이가 있습니다. 남자들의 최대 슬픔은 성취 의욕의 좌절입니다. 여인들은 사랑의 좌절이 제일 슬픕니다. 어떤 남자도 욥과 같이 되면 인생이 끝났다고 절망하게 됩니다. 세상 모든 남자들의 공통점은 성취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생명과 같이 여깁니다. 

이 욥은 점차적으로 망한 것이 아니라 일순간 망했습니다. 여러분! 의학적으로 판명을 했는데 도둑, 강도짓을 하는 사람들은 뇌의 구조가 다르답니다. 우리는 지렁이 한 마리 밟아 죽이려 해도 끔찍한데 이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잖아요? 그런데 거기서 쾌감을 느낀답니다. 뇌의 구조가 다르답니다. 보통 사람은 절대로 못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저도 강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아르바이트 할 때 어떤 사람이 들어와서 가슴에 총을 대고는 돈 내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때 충격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아픕니다. 덜덜 떨면서 ‘내 인생이 강도한테 끝나는 구나!’ 그래서 캐시박스 열어서 다 주고 죽지는 않았습니다. 마음에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회할 때 나 같은 일을 당한 사람들을 모이라고 해서 위로예배 같이 상처 치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여서 자기가 당한 일을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집사님 한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침 9시에 여는 가게인데 10시가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점잖게 넥타이를 매고 와서 하는 말이 “나 강도다. 돈을 내라.” 아주 점잖게 말해서 농담인 줄 알고 웃었더니 “나 진짜 강도이다. 나 이 속에 총이 있는데 이것을 꺼내면 네가 너무 놀랄까봐 안 꺼내고 있다. 

그러니 빨리 돈을 달라.” 그러더랍니다. ‘이런 강도가 다 있나?’ 속으로 생각하고는 자기도 점잖게 말했답니다. “시계를 봐라. 10시다. 나는 9시에 문을 열었다. 1시간 동안 돈 100불도 못 팔았다. 돈이 있겠냐? 어제 판 것은 다 가지고 갔다.” 그랬더니 잠시 생각하더니 “아, 그렇겠구나. 그럼, 내가 오후 5시에 오겠다.” 그러더니 정말 5시에 왔답니다. “아까 내가 말한 것 사실이니 빨리 돈을 달라.” 그러니 까딱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잖아요? ‘뺏기는 것이 낫겠다.’ 그래서 하루 종일 장사한 돈을 주었답니다. “고맙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가족사진을 꺼내서 보여주더랍니다. “내 아내, 아들, 딸 여섯 식구다. 나는 직업이 없다. 

우리 가족 밥 먹여주어야 하는데 아버지로서 어떻게 하느냐?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이니 이해해 달라. 그리고 내가 한 달 후에 또 오겠다.” 이런 강도도 있습니다. 집사님 한 분은 한 자리에서 13번 똑같은 강도를 만났답니다. 욥은 지금 한명이 아니라 떼강도가 말을 타고 와서 동물을 싹 몰고 간 것입니다. 그때 경찰서가 있습니까, 파출소가 있습니까? 유목민의 고민은 이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식 고통이 왔습니다. 10남매가 큰 아들 집에서 잔치 하다가 거기도 지진이 있었는지 좌우간 무너져서 다 죽었다고 했습니다. 이 욥기는 인간 최대 비극으로 꾸며가고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 거기까지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진국에서는 재벌 집 자녀들 신변이 제일 위험합니다. 마피아들이 그들만 잡으면 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들 가운데 그러한 소재들로 영화들이 많이 나오는 겁니다. 진짜 재벌 집 자녀들은 경호원이 붙습니다. 

그러니 그 자녀들이 자유롭게 살겠습니까? “이게 뭐냐? 친구들과 마음대로 놀아야지! 캠핑 가서 밤새도록 천막치고 놀아야 할 텐데.” 선진국은 이 문제가 보통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 어떤 희생도 다 지불하는 게 아버지,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 죽었습니다. 우리가 장례식에 조문객으로 많이 가게 됩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사실만큼 사시다가 소천하신 경우 호상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장례식은 상갓집도 조문객도 마음이 어렵지 않습니다. 

훌륭하게 사시다가 훌륭하게 가셨으니까 어떤 면에서는 반가울 수도 있습니다. 먼 친척들이 와서 알게 되고 인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녀 장례식은 어떻습니까? 이런 경우에는 우선 사람 만나기가 싫습니다. 괜히 내가 죄 지은 거 같고 부끄럽고 할 말이 없고 어떻게 보면 깔보는 거 같고 비웃는 듯 싶고 조문객도 당사자도 서로 어렵습니다. 목사들도 사실 이런 장례식은 너무 어렵습니다.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는 큰 상처를 줍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래보십시오. ‘자기 자식 죽어도 저렇게 감사 기도를 할 건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장례식은 다 똑같은 말을 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실제로 할 말이 없습니다. 

어떤 말도 위로가 안 됩니다. 괜히 그런 장소에 가서 믿음 좋은 거 같이 “할렐루야! 천국 가셨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천국 간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인간이기에 슬픈 것은 인정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누는 사랑도 있고 인간끼리 나누는 사랑도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모든 자녀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지구상의 최대 슬픈 존재로 떨어지는 것을 지금 조명하는 겁니다.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인간 최대의 슬픔을 욥이 경험하고 있는 것을 여기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과연 인간이 어떻게 해결해야 되나 그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아내에게 버림을 당했습니다. 왜 버림을 당했느냐? 아내가 와서 합리적으로 따졌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나님 잘 믿고 그렇게 하나님 믿으라고 자식들과 나한테도 가르치더니 그 결과가 이거냐? 그러면 하나님의 공의는 이런 거냐?”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 그리고 도망가 버립니다. 남성도 여러분! 남자로서 제일 자존심 상할 때가 언제입니까? 아내에게 무시당할 때입니다. 남들에게 듣는 소리의 10배나 더 기분 나쁩니다. “어휴! 못생겼다. 무능하다. 쪼다 같다. 좁쌀영감! 해준 게 뭐냐? 새끼들 때문에 할 수 없이 산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남자들은 죽을 거 같습니다. 남자들도 조심할 말이 있습니다. “이 놈의 부엌데기야! 여편네야!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 되냐?” 이런 소리는 하지 마세요. 욥은 자기 부인한테 자존심 상할 대로 상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살맛이 안 났습니다. 
그 다음의 고난은 신체적 고난입니다. 아플 때입니다. 얼마나 상처가 많은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성한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하도 가려워서 온 몸을 긁었다고 했습니다.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육신적 최고의 복이 무엇입니까? 저는 건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이 건강하셔서 예배 나오실 수 있게 된 것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오신 분들은 주머니에 있는 돈은 다 감사헌금으로 내고 나가십시오. 참 이상한 통계가 있습니다. 감사할 조건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헌금을 잘 안합니다. 이것은 통계입니다. 이상합니다. 잘 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래도 헌금을 정성스럽게 합니다. 어느 교회나 다 똑같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가? 자신이 좋은 조건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언제 알게 되느냐? 잃어버릴 때입니다. 잃어버리기 전에 감사 생활해야 합니다. 욥기는 지금 그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 다음에 욥의 마지막 고통이 나옵니다. 친구들이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웃집 방문도 내가 자랑할 것이 있고 좋은 조건에 있을 때 사람 찾아오는 게 반갑지 다 망했을 때는 보기도 싫습니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자식 보는 것도 싫습니다. 우리 인간 본능 가운데 자랑 본능, 과시 본능 무시 못 합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 오실 때 다 예쁘게 하고 오셨잖아요? 그런데 예쁜 것이 보입니까? 남에게 보이려고 예쁘게 하고 오신 겁니다. 

여러분! 명품을 왜 가지고 싶어 합니까?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입니다. 전에 제가 수요일에 한번 이야기 했는데 평생 제가 가져본 물품 가운데 제일 비싸고 좋은 거 언제 가졌냐면 우리교회 취임식 하는 날 교인 여러분이 선물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지금 제가 차고 있는 이 시계입니다. 제가 평생 이런 가격의 물품을 처음으로 우리교회 올 때 선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선물 받고 고민을 얼마나 했는지 모릅니다. ‘목사가 이런 것 차고 다니면 욕먹고 그게 뭐가 행복해? 시계는 시간만 맞으면 되는 거지. 교인들 몰래 어떻게 해야 되겠다.’ 

그래서 미국 갔을 때 우리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이거 좋은 시계이니까 차고 다녀라. 너는 목사 아니니까 차고 다녀도 괜찮다. 아빠는 욕먹는다.” 1년 후에 가보니까 안차고 다니는 거예요. “너 왜 안차고 다니냐? 아주 좋은 시계인데….” “미안해요. 아빠가 주신 건데 이 시계를 보니까 노인들이나 차고 다니는 거예요. 젊은 사람인 나더러 어떻게 이런 시계를 차고 다니라는 거예요?” 그러니 취임 선물 받은 것을 내가 가져야지 교인들도 좋아하지 누구 줄 수도 없고 아들도 안 갖는다고 하고 ‘에이! 모르겠다. 

욕먹어도 할 수 없다.’ 그리고서 시계를 찼는데 이 시계를 차고 다니는 날부터 저는 신체상에 고난이 왔습니다. 머리가 자꾸 아픈 겁니다. “어휴! 골치야!” 계속 골치가 아픈 겁니다. 사람은 자꾸 좋은 게 있으면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지금 욥은 아무도 보고 싶지 않은데 초청도 없는 엘리바스, 빌닷, 소발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와서 무엇을 합니까? 고통을 줍니다.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만 아시는 죄가 있다. 고백하라. 그것 때문에 네 고통이 온 거다.” 인과응보적 죗값을 욥에게 질문하는 겁니다. 욥은 순전하고 거룩한 동방의 의인이라고 하나님이 이미 인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와서 “너 죄를 지었어. 빨리 말해.” 무엇과 같은가 하면 경찰이 죄수 한명을 잡아왔는데 잘못 잡았습니다. 

그 사람은 죄수가 아닙니다. 저는 재판석에도 많이 갔는데 억울한 사람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두드려 패면서 “빨리 말해.” 욥은 지금 그렇게 된 겁니다. “나는 지금 죄가 없는데?” “잔소리 마! 빨리 말해. 회개해.”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도 때리니 허위 자백을 합니다. 또, 공산당들은 자아비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네가 잘못한 것을 네 입으로 말해!” “잘못한 것이 없는데요?” “빨리 말해!” 자아비판입니다. 지금 욥은 자아비판에 넘어간 겁니다. 얼마나 괴롭습니까? 이제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든지 아예 죽어버리고 말든지 자취를 감추고 사라지든지 배 째라 하고 내밀든지 어떤 것을 결정해야 되는 위치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정했습니다. 

그 결정하는 말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내가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사람이 살아가면서 복을 누릴 때도 있고 화가 찾아올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이렇게 첫 번 말을 합니다. 두 번째는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어다.” 거기다 주석을 붙였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은즉 알몸으로 돌아갈 것이다. 자식도 재물도 건강도 아내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하나님이 거두어 가실 것이다.” 이것이 결정입니다. 그 다음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순금같이 나오리라.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는 나의 신앙을 위해서 하나님이 단련하실 때가 있다는 것을 내가 믿는다. 괜찮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찬송을 받으옵소서. 알몸으로 나와서 알몸으로 돌아간다. 주변이 다 없어져도 하나님 말씀 믿는다. 더 이상 묻지 말라. 끝!” 지금 이 욥기는 이상하게 됩니다. 욥을 가운데 두고 사탄과 하나님이 내기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다 좋은 것만 주시니까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아니야. 욥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한번 빼앗아 보지요.” “그래라.” 다 빼앗았습니다. “봐라. 어떠냐?”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욥과 같이 하나님도 욥을 믿고 계십니다. 욥기서의 마지막은 회복으로 끝납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잃어버려도 손해가 없습니다. 그것을 말해줍니다. ‘추수감사절인데 어떻게 할까?’ 하나님이 다 주신 겁니다. 우리 욥을 생각하면서 11월 달에 감사가 풍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부끄러운 우리들의 신앙을 욥에 조명하였습니다. 너무 부끄럽고 이기적이고 영혼이 깨어나지 못한 저희들 자신을 원망합니다. 성령님이여! 우리들의 영 가운데 임재하셔서 내가 하나님께 받은 복이 무엇인가 이 감사의 달에 더 많이 생각하며 마음으로 물질로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