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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사마리아 문둥병자의 감사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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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문둥병자의 감사 (눅 17:11-19)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런 말씀을 먼저 드리고자 합니다. 손뼉은 두 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납니다. 한 손으로는 아무리 휘둘러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두 손이 마주칠 때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 말씀드리자면 결혼예식에 우리들은 당사자들로부터 초청을 받습니다. 와서 축하하며 함께 기뻐해 달라고 하는 초청입니다. 그 청첩은 대단히 열을 내고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결혼식이 끝나고 나면 아무런 인사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괜찮은 가문이라면 일일이 다시 찾아 뵙고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전화로나 편지로 대신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에 참여하고 축하해 준 일에 대하여 결혼식만 끝나고 나면 감감무소식입니다. 도무지 감사가 없습니다. 
  
이런 두 가지 점들을 생각해 보면 오늘 본문에 대한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다음 주일은 교회력을 따라 추수감사주일로 교회가 지킵니다. 그래서 오늘은 누가복음의 사마리아 나병환자의 감사를 통해서 ‘감사’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누가복음의 주제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라고 이미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누가복음은 이 주제를 어떤 구조를 통해서 말할까요? 그건 누가복음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고 역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도행전 1:1-3절입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그래서 누가복음은 1장과 2장에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을 따라 주님께서 나시고 그 언약을 기다리던 자들에게 보이셨음을 말함으로 그 언약을 이루셨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3장부터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택하시고 성령으로 행하셔서 가르치심을 9장50절까지 말합니다. 

그 후에는 9장51절부터 19장27절까지 사도들에게 명령하신 말씀을 말하고, 19장28절부터 23장56절까지는 예수께서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심을 말하며, 24장1절부터 53절까지는 예수께서 다 이루시고 승천하심을 말합니다.
  
옛 언약을 따라 오셔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행하시며 가르치셨고, 사도들을 불러 제자들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행함과 가르치심을 따라 고난을 받으시고 영광에 들어가셔서 모든 일을 다 이루시고 승천하셨다고 누가는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누가복음 전체를 볼 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명령하신 말씀 중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행하시며 가르치신 것을 따라 제자들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제자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주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누가복음 9:51-62절에 이 제자도가 무엇인지 그 원리를 말씀합니다. 6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고 한 말에 대한 답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럼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요? 어떤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에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따를 때 아버지를 장례하는 문제, 가족을 작별하는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따른다고 했는데, 주님께서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주님을 따르기 때문에 세상의 질서, 땅의 나라에 속한 것에 매여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죽은 아버지의 장사 문제, 가족을 작별하는 문제는 모두 땅의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손에 쟁기를 잡고 주님을 따라간다고 하는 제자가 이 땅의 질서에 매여서는 안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명령하신 누가복음의 단락 맨 끝에 다시 결론으로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입니다. 누가복음 18:28-30절입니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그럼 승천하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어떤 일을 하면서 주님을 따르는가? 이에 대하여 누가복음 10:1-24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일꾼들을 부르시고 파송하여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며, 귀신들로 항복케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말을 듣고 받는 자들은 주님을 영접하는 자들이며, 제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은 주님의 나라 백성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그 나라의 백성을 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70명의 제자들을 파송함으로 나타냈습니다. 귀신들이 항복함으로 승천하시는 주님의 나라 권세가 나타났습니다. 그럼 제자들에게 명령하셔서 제자들로 하여금 주님을 따르게 할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군대에서도 상관의 명령을 부하가 복창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상관의 명령에 죽고 살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명령이 무엇인지 듣기를 좋아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참된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일을 말함으로 봉사하는 것보다 오히려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했던 마리아를 칭찬하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결론으로 11장2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제자들은 어떻게 이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킬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11장에 주기도문과 멀리서 온 벗의 간청에 관한 본문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면서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말합니다. 즉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복을 받기 위하여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을 듣고 지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고 지킬 때 주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 주님의 명령이며 가르침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즉 성령의 말씀과 바리새인의 가르침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12:1절에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12:1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그러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율법 선생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하면 그들의 가르침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곳간에 곡식을 가득 쌓아 둔 부자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 부자는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생각하는 자입니다. 자기 영혼의 생명이 먹고 마심이 넉넉하면 평안하고 즐거우리라고 생각하는 자인 것입니다. 재물에 대하여는 부요한데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아 사는 자들은 승천하시는 주님의 나라 백성으로 합당치 아니합니다. 즉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제자들은 이런 가르침을 주의해야 하고 항상 주님의 말씀에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깨어 있는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승천하신 나라를 바라며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요? 산상설교의 가르침과 같이 하늘에 있는 보화를 발견하고 땅의 소유를 다 팔아 하늘의 밭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12:33절입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럼 이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주님의 승천하시는 나라에 참여하는 백성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예루살렘이 주님의 말씀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이제 이방인들이 들어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누가복음을 받는 독자도 이방인 데오빌로 각하임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13:34-35절에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제 예루살렘은 황폐하게 되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들어와 떡을 먹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럼 승천하시는 주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백성들은 어떻게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까? 14:25-27절입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마가복음의 제자 원리와 같습니다. 또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자가 주님께 합당하다고 하신 말씀과도 같습니다. 즉 세상의 것에 매이지 말고 승천하시는 하늘 나라를 바라보고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백성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누가복음 14:33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렇게 주님의 제자로 또한 그의 백성으로 주님을 따를 때에는 항상 왕이 기뻐하심이 무엇인지 알고 행해야 합니다. 승천하시는 주님의 나라는 무엇을 가장 기뻐하실까요? 그 기뻐하심이 무엇인지 알고 제자들을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에는 거의 동일한 주제를 세 번에 걸쳐 반복하며 주님의 나라의 기쁨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잃은 양 한 마리, 한 드라크마, 그리고 돌아온 탕자 비유를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이 주님의 나라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여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는 나라이라고 증거합니다. 

15:7, 10절, 32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렇게 왕을 기쁘시게 하는 일꾼들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잘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6장에는 지혜로운 청지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청지기였습니까? 주인에게 쫓겨날 줄 알고 주인의 재물로 자기의 앞날을 준비한 자였습니다. 16:9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도 충성하는 자가 참된 일꾼입니다. 또한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는 자가 참된 일꾼입니다. 
  
지혜로운 청지기가 사는 원리는 이것입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습니다. 이게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재물로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나쁜 짓을 해서 돈을 벌었다 하는 의미로 불의의 재물이 아니라, 세상 나라에 속한 재물이기 때문에 불의의 재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의 가르침을 바리새인들은 멸시하고 조롱할 것입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14-15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아니 현재 세상 사람들이 돈을 좋아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다 사람 앞에 높임을 받으려는 것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잘 분별해서 주님을 따르는 자가 주님의 제자요 그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돈을 좋아한 부자와 부자 집 앞에 거지 나사로를 대비시켜서 주님의 나라에 누가 합당한 자인지 누가복음 16장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세례 요한까지가 마지막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 가르침을 따르면 안됩니다. 신명기의 복은 이미 주님 나라가 도래함으로 끝났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성취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혜로운 청지기로써 주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일꾼들은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용서와 충성, 그리고 믿음입니다. 

17:5-6절입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이제 승천하시는 주님의 나라는 죄인을 격리시키는 나라가 아닙니다. 죄인을 용서하는 나라입니다. 일흔 번에 일곱 번의 용서는 완전한 용서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들도 이런 용서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나라는 주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이루십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들을 때에는 당장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떤 귀인이 왕권을 받으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자기 종 열 사람에게 각기 한 므나씩을 주고 떠났습니다. 그 한 므나로 장사하여 이익을 남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왕위를 받다 가지고 와서 주인이 종들을 불러 얼마를 남겼는가를 물었습니다. 어떤 이는 열 므나를 남겼고, 어떤 이는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한 므나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그 때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온 주인은 그 종을 악한 종이라고 하면서 그 한 므나를 다른 종에게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판을 행했습니다. 

19:27절입니다.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이렇게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왕권을 받아 가지고 올 때까지 자기에게 주어진 것들을 일하여 남겨야 합니다. 그것이 왕되심을 인정하는 신하의 자세입니다. 여하튼 이제 주인은 승천하시고 여기 계시지 않을 것이며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때 제자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믿음일까요? 왕권을 받아 다시 오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결산을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럼 그 믿음이 무엇인지 보다 더 자세히 오늘 설교본문을 통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로 지나 가셨습니다. 한 마을에 들어서니 나병환자 10명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청하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 섰다는 것은 레위기의 율법 때문일 것입니다. 나병환자와 접촉한 자는 더러운 자가 되기 때문에 이들은 가까이 오지 못하고 소리를 크게 질렀습니다. 이 간구에 대하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그랬더니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만이 돌아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며 감사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천하게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율법에 문둥병자가 나음을 입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자기 몸을 보이고 그 병의 나음을 확증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이스라엘 진 중에 들어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거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호소하였던 10명 중에 한 사람만이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나머지 9사람은 아마 제사장에게로 갔고 돌아와 감사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돌아온 한 사람은 비천한 사마리아 사람, 곧 이방인으로 여김을 받았던 자였습니다. 
  
이 돌아온 사람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했던 것을 주님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처음에 열 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소리를 질러 호소했던 것도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들이 소리를 질러 호소했던 것은 주님이 긍휼함을 바랐던 것이고 그 긍휼함은 자기 몸이 깨끗케 됨을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나가시는 길 앞에 비록 멀리 섰지만 그들은 큰 소리로 원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낫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여기까지의 믿음은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자기의 개인적인 어려움과 형편을 호소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낫고 나면 그냥 옛 제사장에게로 돌아가고 맙니다. 저는 이 모습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본 것이라고 봅니다. 한 사람의 천한 사마리아인만이 돌아와 경배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자기 몸의 나음을 알고도 제사장에게로 가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경배하고 자기 나음을 감사했습니다. 저는 여기까지가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땅히 왕에게 드려야 할 경배와 감사까지가 믿음입니다. 믿음과 감사가 서로 마주쳐야만 소리가 나는 손뼉치기가 될 것입니다. 예수 선생님께 호소할 때와 돌아와 감사하는 것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이는 믿음과 행함을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믿음만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믿음과 행함이 함께 해야 소리가 납니다. 입으로는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누구나 잘합니다. 그러나 행함과 진실함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죽은 믿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고 가르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아는 것이 결국 자기 것으로만 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옛 제사장에게 가버리고 돌아와 감사를 하는 것이 없었던 것처럼, 복음을 잘 깨닫는 자들이라고 하면서 그저 옛 질서에 속하여 자기 가족과의 작별문제, 장사지내야 할 부친에게로 돌아가 버립니다. 
  
고치지 못할 질병에 걸려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 때는 천지를 다 줄 것처럼 하나님께 의지하고 바친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그 소원이 만족되면 여전히 세상 나라에 속한 것들로 돌아가지 주님께 와서 경배와 감사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아야 하겠다고, 배워야 하겠다고 호소하며 열심을 내지만 어느 정도 알았다고 하는 때에는 자기 것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단순히 질병을 고침받게 하는 것이 우리 왕되신 주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나병이 나았어도 그들은 다시 죽을 것입니다. 온전한 구원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단지 문둥병자의 나음을 확인하고 땅의 나라 이스라엘에 참여케 하는 구원을 줄 뿐입니다. 그러나 이 천한 이방인과 같은 사마리아 사람은 돌아와 참된 제사장인 주님께 경배하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를 믿었습니까? 하늘의 백성으로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에 참여하게 되었습니까? 그 일에 경배와 감사로 손뼉을 쳐서 소리가 나게 하십시오. 
  
여러분과 저는 아마 주님을 보고 멀리 서지도 못했을 죄인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여기의 문둥병자들처럼 소리를 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천한 사마리아인보다 더 비천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여기까지가 다가 아닙니다. 이제 주님께 돌아와 경배와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에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청지기처럼 불의의 재물을 받고 이것을 사용해서 자기의 앞날을 예비했던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에게 맡기신 것으로 봉사하고 감사하며 경배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날 구원하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감사의 삶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실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믿음과 감사 이것은 둘이 서로 마주쳐 소리를 냄으로 이루는 구원의 필수요건입니다. 
  
아무쪼록 이런 믿음과 감사의 삶으로 하나님께 귀한 열매를 맺으며, 그리스도의 왕되심과 제사장되심을 인정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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