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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를 위한 고난 (벧전 3: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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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위한 고난 (벧전 3:13-22)
      

‘의롭게 살려고 하다가 핍박을 받은 사람은 자는 복이 있으니 천국이 저희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핍박하고 온갖 악한 말을 할 때 너희에게 복이 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처럼 핍박을 받았다’(마5:10-12). 

이 말씀은 산상보훈의 팔복 중에 마지막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고난을 받을 때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 소동하는 것처럼 겁을 내지 맙시다. 마음에 그리스도를 거룩하신 주인으로 삼아 여러분의 마음에 담은 소망을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며 대답할 때는 온유함으로 하고 두려움으로 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면 여러분의 선한 행실을 욕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도리어 부끄러움을 느낄 것입니다.  선을 행하다 받는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쁜 일 하다 고난 받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입니다.” 

고난이라고 다 같은 고난일까요?  어떤 고난은 순전히 나의 잘못과 욕심 그리고 게으름의 결과로 오는 어려움이고, 어떤 고난은 선하게 행동함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어려움입니다. 고난의 원인이 서로 다른 것처럼 고난을 통과하는 사람들의 반응 또한 다양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 어떤 이는 원통한 마음으로 불평하며 억지로 견디어 냅니다. 어떤 이는 고난을 은혜의 기회로 삼아 감사함으로 견디어 냅니다. 감사와 소망 가운데 고난을 통과하는 사람은 심리적으로도 훨씬 안정된 상태일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훨씬 성숙한 훈련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으십니까?  잠시 받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소망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소망의 하나님께서 지금의 고난을 넉넉히 이기도록 도우실 줄 또한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당신에게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기대하기에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느냐? 그런 질문이 정말 궁금하고 부러움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믿을 수 없고 한심스럽다는 투로 던지는 질문입니다.  조롱과 비웃음으로 아픈 상처를 더 자극하여 고통을 주려는 악한 의도에서 묻기도 합니다.  그럴때 이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내 마음에 가득한 소망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항상 준비하고 있다가 주저말고 나눌 수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고 하나님의 최후의 보상에 대한 소망이 분명하다면 있는 그대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려고 악한 뜻으로 던지는 질문에 답할 때 얼굴을 붉히며 맞서 욕하고 소리 지르는 방식으로 한다면 내 안에 있는 소망을 진심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요?  온유함으로 대답하라는 말은 온유하신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라’ 하셨던 주님의 마음을 품고 계십니까?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변증할 때 나는 아는데 너는 왜 모르느냐는 식으로 무시하듯 대답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겸손한 자세가 아닙니다.  토론과 논쟁으로 불신자들을 이겨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안에 불어넣어주신 산 소망을 공손한 태도로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논쟁이 목적이 아니라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고픈 사랑에서 나오는 친절한 대답이 온유한 자세입니다.  

두려움으로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으로 대답하라는 말씀입니다.  천국 소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소망을 주시지 않았다면 나 역시 세상의 썩어질 것에 소망을 두고 그것만 바라보며 늘 걱정과 염려 속에 살아야 했던 사람입니다. 작은 일에 소동하고 불안해 하며 당장에라도 세상이 끝장날 것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했던 나에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산 소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전하는 사람은 소망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마음으로 삽니다. 그런 마음으로 형제를 대할 때 내가 전하는 복음이 복음답게 됩니다.  

그리고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우리의 대답에 거짓이 없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는 마음의 창문입니다.  그 창문이 까만 칠로 덮혔다면 안에서 밖을 볼 수 없고 밖에서도 안을 볼 수 없습니다.  양심이 더러워지면 진리에 대한 갈망도 없고 진실에 대한 책임도 없습니다.  선하지 못한 양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진실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양심불량으로 살며 태연하게 천국을 꿈꾸고 있다면 그 천국은 하나님이 왕으로 계시는 나라가 아니라 내가 상상하며 그리고 있는 꿈의 나라 이상향일 뿐입니다. 

네 마음 속에 있는 소망이 무엇이냐?  묻는 사람에게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내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진솔하게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있지도 않은 것을 억지로 꾸미거나 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허세 부리지 않아도 됩니다.  상대방이 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굴복하리라는 자신감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나의 고난의 길에 나와 동행하신 하나님, 나를 알아주시고 나의 위로자와 다정한 친구가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나에게 삶의 분명한 목적과 의미를 주신 주님, 슬픔과 염려와 기쁨과 감격 속에 함께 하시며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나누시기만 하면 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나의 유창한 말 솜씨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주님십니다.

‘희망’으로 불리는 사람 이지선 자매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어보셨지요?  어느 일간 신문 기자와 나눈 인터뷰에서 이지선 자매가 담담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털어놓은 그의 이야기는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다시금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는 감동입니다.  10년 전 술에 취한 운전자의 실수로 7중 추돌사고가 발생하였을 때 얼굴을 비롯하여 전신 55%에 3도 중화상을 입고 죽음에서 살아난 여학생의 특별한 이야기입니다.  

살아 숨쉬는 것이 기적이라 했고 살았지만 까맣게 타서 일그러진 얼굴로 어떻게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주위의 탄식과 절망을 자아내게 했던 대학 4학년 여학생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기적처럼 다시 살았습니다.  그것도 환하게 웃으며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고 후 처음 쓴 글에서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지만 살아 있어서 흰 눈도 보게 하시며 추운 겨울을 다시 맞게 하시니 나는 축복 받은 사람’ 이라 고백했답니다.  이후 이지선 자매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희망의 메신저가 되어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삶을 지켜보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희망 전도사’라 불리던 한 방송인이 불치병으로 고통을 받다가 남편과 동반 자살을 하여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희망 전도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희망을 전하는 이지선 자매에게는 그 희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십니다.  말 잘하는 사람이 재주껏 표현하는 희망 메시지와는 다른 정직한 메시지가 그에게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불편한 신체조건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 속에 계시며 그를 붙잡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희망이며 삶의 주인이십니다.  

이지선 자매는 지금까지 10년 동안 일그러진 얼굴을 치료하기 위하여 피부이식 수술을 30번 넘게 했습니다.  타지 않은 다리 쪽 피부를 떼어다 이식하는데 이젠 더 이상 갖다 쓸 피부도 없을 정도랍니다.  그런데도 그런 자기 얼굴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고 낙천적으로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기자가 질문하였습니다.  대답은‘원래 얼굴처럼 편하지 않지만 지금은 눈도 잘 감기고 입도 다물어지고 발음도 잘 나온다. 사고 나기 전에는 예쁜 것 좋아하고, 화장하고 거울 보는 거 좋아했던 공주과 여학생이었던 자신이 사고 직후 일그러진 자기의 얼굴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된 것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마음을 갖게 된 것부터가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이지선 자매가 쓴 책에 사고 운전자에 대한 대목이 있습니다.  자신의 불행보다 가해자인 운전자의 심적 고통을 염려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사고 후 도망치려다 경찰에 붙잡힌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었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사고가 난 날이 일요일 밤이다. 가족들과 따뜻하게 보내야 할 시간에 혼자서 소주를 다섯 병이나 마시고 운전했을 그분의 곤고하고 마른 가슴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프고 불편하지만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그 사람에 비하면 내가 훨씬 낫지 않은가. 사고 당시 우리 가족은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할 정신이 없었다. 그냥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처럼 사고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지난 주일에 읽은 3장8절, 9절에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했는데 이지선 자매가 양의 꼭 이 말씀을 따르는 좋은 예입니다.  사고를 낸 만취 운전자의 곤고하고 마른 가슴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 마음이 다른 사람의 형편을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며 그것이 체휼한다는 말입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그 사람을 악으로 갚지 않고 복을 비는 이지선 자매는 이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미국 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 공부를 하는 자매가 가끔 향수를 느끼거나 공부하기 싫고 가족들이 보고 싶으면 음식을 만든답니다.  사고로 마디가 짧아진 이 손으로 큰 불편이 없이 요리를 할 수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밥 한 그릇이 주는 따뜻한 위안에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하는 자매에게 기자가 또 질문합니다.  ‘지금도 그렇고, 다른 인터뷰에서도 그랬고, '감사'라는 말을 아주 많이 사용하는데 감사의 표현이 지나치면 의심이 갑니다’ 

"맞다. 조심해야 하는데. 나더러 '연기하냐'고 묻는 사람도 있더라. 아까도 말했지만 나처럼 밑바닥,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서 하게 됐다. 그렇다고 거짓말할 수는 없지 않나. 진짜 감사한 일들뿐인데. 땅만 보고 걸어야 했던 내가 등을 꼿꼿이 펴고 사람들과 눈 마주치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 고개를 들면 하늘을 볼 수 있는 여유를 누리게 되었다. 눈을 감고 잘 수 있고, 말할 때 침을 흘리지도 않는다. 10년 전 사고 직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다."  말끝마다 나오는 감사가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쇼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자칫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기자의 질문이었지만 자매의 대답이 참 온유하고 겸손하여 오늘 베드로의 말씀과 딱 맞아떨어진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욕망의 동물이다. 하나에 만족하면 더 좋고 큰 것을 원한다. 작은 것에 대한 감사도 하루 이틀 아닐까.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기자의 말에 "별것 아닌 일들에 감사하는 것이 습관이 되고 일상이 되어서 그런 것 같다. 습관이란 게 원래 무섭지 않나. 하나씩 감사할 때마다 신기한 힘이 마음에서부터 퐁퐁 솟아난다”고 대답했습니다.  작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습관이 새 힘을 솟아나게 한다고 말한 자매의 감사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토록 감사해하는 하나님이 당신을 정말로 사랑했다면 애초 이런 사고를 피하게 해줬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또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당연히 원망했다. 통증이 심할 땐 나를 살려주셨다는 하나님이고 뭐고 다 싫었다. 그때 엄마가 하루 한가지씩 감사할 거리를 찾자고 제안하셨다. 내 발로 걸어서 화장실 간 날, 내 손가락으로 환자복 단춧구멍 하나를 채우게 된 날,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겨우 닿아 오빠를 '오까'라고 부르게 된 날 등등 '감사 찾기'를 했더니 진통제가 결코 줄 수 없는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더라. 그러면서 고난 자체가 가장 큰 축복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평생 가질 수 없었던 보물들이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사랑이 얼마나 따뜻한지, 절망이 얼마만큼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기쁨과 감사는 얼마나 작은 것에서부터 비롯되는지, 내가 앞으로 마음을 쏟고 시간을 바쳐야 할 영원한 가치는 무엇인지 지난 10년의 시간이 내게 알려주었다." 

누군가 내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저와 여러분도 이렇게 대답할 수 있기 바랍니다. 이지선 자매는 오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던 중 사고를 만났습니다.  무슨 의로운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고를 당한 후 나에게 닥친 고난을 억울함이나 분노로 받아들여 자신을 학대하고 세상을 비관하는 대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예수 그리스도께 산 소망을 두며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그의 삶이 곧 의를 위한 고난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고난을 당하더라도 선을 행하다가 받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받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라면 거기에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담겨 있습니다. 예수 안에 살며 고난을 받는 한 사람의 감사와 소망이 고난 속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놀라운 희망과 삶의 목적을 선물하고 그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있으니 한 사람의 고난이 많은 사람에게 큰 복이 됩니다.  주님의 은혜와 위로가 일평생 사랑하는 딸에게 머물며 자매의 아름다운 삶을 통해 더 많은 영혼들이 주 앞으로 이끌림 받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18절 이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로 들며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만나는 고난을 소망 중에 견디고 이길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에게 모든 면에서 모델이 되십니다.  고난도 죽음도 그리고 부활과 최후의 승리로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사람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고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  그들은 전에 노아가 홍수 심판을 대비해 방주를 준비하는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끝내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이다’하며 죽임 당하신 예수께서 영으로 노아 시대의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은 해석하기에 아주 어려운 부분입니다.  성경을 주석하는 신학자들이 베드로가 어떤 의도에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의견이 분분한 신학난제입니다.  물론 탁월한 신학자들의 주장 중에는 그럴 것 같다고 여겨지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가지고 깊은 토론이나 논쟁을 벌이기 보다는 의를 위하여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델로 삼고자 하는 베드로의 의도를 이해하는 정도로 만족하고 말씀의 촛점을 고난과 영광 혹은 고난과 승리에 맞추기로 합니다.  

예수께서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성도들의 본보기가 되신 것처럼 노아 역시 의를 위해 고난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운 노아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할 때 귀를 기울이고 회개하는 사람들은 없고 도리어 비웃고 거절하였습니다.  노아를 조롱하며 소위 왕따를 당하게 했으니 노아는 그 시대에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실 때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24:37) 하셨습니다.  세상의 끝이 언제 임하겠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에 정신이 팔려 홍수가 나서 다 죽기까지 깨닫지 못한 노아의 때와 같이 세상 끝날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은 안중에도 없고 땅의 일에만 몰두하다 순식간에 심판에 이를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은 노아와 그의 식구 겨우 여덟 명이었고 그 외는 모두 물로 심판을 당하였습니다.  베드로가 하고픈 말씀이 무엇일까요?  노아가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였으나 사람들이 거절하고 멸망을 자초한 것처럼 예수님이 천국복음을 전하셨지만 믿고 영접하는 사람은 적은 무리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육신으로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그 육체의 죽음은 파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고난과 죽으심이 곧 생명의 부활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죽음에서 살리심이 되었으며 부활하신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홍수 심판은 죄인들을 멸하였지만 반대로 노아의 여덟 식구를 구원하였습니다.  홍수가 죽음을 상징하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표시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나의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50)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받으실 세례였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노아시대의 불순종한 죄인들은 물로 심판을 받았지만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물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심판의 물은 이처럼 세례를 알리는 구원의 표시가 되었습니다.  홍해의 물과 요단강의 물은 죽음이었지만 순종하며 그 물을 통과한 구약의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표시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물을 통과하며 다함께 세례를 받은 셈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죄씻음의 표시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은, 다시 말하여 그리스도의 세례는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표가 되지만 구원얻을 자들에게는 죄씻음입니다.  육체의 더러움을 씻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힘입어 우리의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의 썩을 것을 따르지 않고 생명의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하는 구원의 표시입니다. 주님과 연합되어 고난의 때를 통과하며 주의 약속을 의지하고 의를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건짐을 받을 것입니다.  바울의 말씀처럼, 피곤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리니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갈6:9).  

베드로의 시대 초대교회 성도들이 세례를 받는 것은 주님과의 연합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고난을 각오한 세례입니다.  물같은 시험과 불같은 고난을 통과할 때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가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영광과 위로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영광과 승리를 바라보며 나그네 형제들에게 의를 위한 고난을 달게 받으며 주님 오실 그날을 기쁨으로 기다리자 합니다.  우리의 고난은 종류와 무게가 서로 다르지만 그것이 주 안에서 당하는 의를 위한 것이라면 낙심하지 맙시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승리와 영광이 성도들에게도 주어질 것을 믿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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