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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구하라 (약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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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구하라 (약 1:1-8)


믿음과 행위라고 하는 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참 어렵습니다. 이미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행위로서는 구원받을 자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를 얻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믿는 자에게 행위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에 따르는 행위가 있습니다.

야간열차를 타고 부흥회인도를 위해 목포로 가야하는 목사님이 마침 표가 없어서 부산행 열차를 타고가다 대전역에서 목포행으로 갈아타게 되었습니다.
잠이 많은 목사님은 지나가던 차장을 붙들고 간곡하게 부탁을 합니다. 새벽 3시에 대전역에서 목포행으로 갈아타야 하니 대전이 가까워지면 자기를 꼭 깨워서 대전에서 내리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잠버릇이 고약하여 자다가 깨면 엉뚱한 소리를 할지도 모르니 상관하지 말고 반드시 대전역에 내려놓고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마침 차장도 교회에 다니는 성도여서 목사님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목사님이 눈을 떠 보니 대전이 아니라 부산이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목사님은 차장 멱살을 붙잡고 흔들며 왜 깨워주지 않았느냐고 노발대발 화를 내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개찰구를 빠져 나갔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차장이 말했습니다.
“참 대단하네. 어떻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참을 수가 있나!”
“말도 말게, 오늘새벽 3시에 대전에서 내려드린 목사님의 난동에 비하면 저 목사님은 얌전하신 편이네.”

착각은 자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착각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의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합니다. 오직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바른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본문을 기록한 야고보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야고보가 예수님이 살아계시던 당시에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는 전혀 믿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7장 5절에 보면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능력과 비범함은 인정을 했지만 예수가 ‘그리스도 구세주’라는 것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예수를 섬기는 기독교인으로 탄생하게 되는가하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여러 사람을 만나셨지만 집단적으로만 만나고 개인에게는 나타나지 않으셨는데 예외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7절에 보면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그러므로 직접 예수님을 일대 일로 만난 사람은 야고보입니다.

야고보에 관한 전설을 보면,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야, 너는 나를 한평생 따라다녔지만 내가 구세주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제는 받아먹으라” 하실 때에 야고보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저를 이다지도 사랑하십니까?” 그리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한 다음에 감사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서 떡과 포도주를 받아먹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부터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한평생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야고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하면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감독이 됩니다. 베드로가 아니라 야고보입니다. 왜 야고보인가 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 야고보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밑의 동생으로 30년을 같이 살았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그 야고보! 그가 이제 깨어져서 예수가 그리스도라 확실하게 고백한 다음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또한 기독교 대적자들이 가장 미워한 사람이 야고보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동생이니 예수님의 인간성에 대한 증거를 가장 잘 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야고보는 요세프스에 의하면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별명이 무엇이었냐 하면 ‘낙타 무릎’이었습니다. 사막을 여행하다보면 다른 짐승들은 눕거나 서 있는데 낙타만은 무릎을 꿇고 앉습니다. 일어날 때도 무릎을 확 펴면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무릎을 많이 꿇기 때문에 무릎이 튀어 나와 있습니다. 야고보가 워낙 무릎을 꿇고 기도를 많이 해서 그 무릎이 낙타처럼 툭 튀어 나왔다고 해서 ‘낙타 무릎’이라고 하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영성이 깊은 사람이었고, 또한 영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분별력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야고보가 초대 감독이 되어서 예루살렘 공의회를 인도할 때(행 15장) 공의회 주제는,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믿음이냐, 행함이냐? 이방인도 유대인이 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였습니다. 이것은 초대 기독교계에 가장 큰 이슈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도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유대인도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 이 진리가 바울 선교로 인해 표면화되었을 때, 당시의 초대 감독이 바로 야고보였습니다. 야고보가 회의를 주재했습니다. 주재하면서 바울의 증언도 듣고, 마지막으로 베드로의 증언을 듣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 사건을 예로 증언합니다. 자기가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는데 보자기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말라고 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보면 베드로도 결정권자가 아닙니다. 증인일 뿐입니다. 베드로까지 증언을 마친 후에 다 듣고 나서, 의장이 되는 야고보가 결론을 내립니다. 사도행전 15장 19절에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그러므로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대표로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라는 교리를 교회의 고백으로 확정지은 사람입니다. 

육신적으로는 예수님의 친동생입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하고 오늘 본문 1절에서 이렇게 자기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주님은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주시요, 나의 왕이시다’ 그런 말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야고보는 무슨 관계입니까? 나는 아우다. 그런 말은 없습니다. 나는 종일뿐입니다. 그의 신앙 고백 속에서는 혈연관계, 인간관계가 깨끗이 사라지고 그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자신은 그분의 종일뿐임을 고백하면서, 절대순종․ 절대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편지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오직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전제입니다. 이제는 성도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이제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며 그 믿음을 어떻게 온전케 할 수 있는가? 성숙하고 온전한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것을 밝혀 주는 것이 바로 야고보서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가르쳐서 더 온전하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 하기 위한 그의 사랑의 고백이 바로 야고보서가 되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들 가운데 여러 가지 시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18세기 중반, 아일랜드 출신의 스크라이븐이라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약혼식 전날 마차전복사고로 약혼녀가 죽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낙심한 채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에 고향 집에는 어머니가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는 시편 55:22의 말씀에 위로를 얻고 어려운 현실을 극복했습니다. 이때 그는 크리스천들이 가장 애창하는 찬송가 “죄짐 맡은 우리 구주”를 작사했습니다. 그는 그 이후에 평생을 과부와 고아와 병자들을 돌보며 지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더욱 믿는 사람들도 어려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작거나 크거나 간에 우리들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사람들은 절망하고 방황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에게도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믿음을 가진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질병, 사고, 좌절, 심지어는 외견상 비극이라는 시험거리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살림살이에 걱정, 자녀문제로 걱정, 건강에 적신호가 오기도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그 만난 현실을 승리한다는 것이지 어려움이 없어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사는 일로서 더 큰 어려움도 있을 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을 당했을 때 이 시험이 왜 올까, 고민, 염려하지 말고, 그 어려움을 참고 견디라고 하지 않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온전히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그 시험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험거리가 생겼을 때 어떤 어려움이 우리들에게 닥쳐올 때 처음에는 그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하다가도 그 어려움이 정말 견디기 힘들 때 자칫 원망하기 쉽습니다. 한데 야고보는 우리들에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험이라는 것은 믿음의 시련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을 훈련시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유혹이지만 하나님의 시험은 시련 다시 말해서 인내하는 믿음을 키워내기 위한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에게 닥쳐오는 어려움을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시험으로 만들지 말고 믿음의 시련으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험을 당할 때 믿음으로 반응하면 인내를 만들어 내게 되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게 될 때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는 되돌아온 소포가 많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만 더 참고 기도했으면 응답을 받았을 터인데 참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응답이 되돌아왔다는 뜻입니다. 조금만 더 참고 말씀대로 지켜 살았으면 복과 약속의 응답을 받았을 터인데 참는 믿음이 없어서 복을 못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러워도 사탄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싸웠으면 큰 승리를 거두고 면류관을 받았을 터인데 참고 견디지 못하고 항복했기 때문에 실패하고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을 조금만 더 참고 견디었으면 큰 승리를 얻었을 터인데 인내가 부족해서 승리도 복도 놓쳐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오래 참고 기다릴 수 있느냐에 따라 믿음이 좋다고도 할 수 있고 나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남보다 얼마나 오래 더 참을 수 있느냐에 따라서 그 만큼 큰 승리를 거두고 그만큼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인내는 쌍둥이와 같습니다. 강한 인내심이 없이 강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가 없고, 믿음이 없이 참된 인내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 하루 돌아도 무너지지 않고 두 번 돌아도 무너지지 않고 엿새 동안 돌아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참지 못하고 그만 두었다면 여리고 성은 함락되지 못했을 것이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끝가지 인내하면서 7일 동안, 마지막 날에는 일곱 번을 돌아 일곱 번째 마지막 바퀴를 돌고 난 다음 다 같이 성을 향하여 외치고 난 다음에야 여리고 성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눈으로 보고 감각으로 느끼는 대로 행동했다면 실패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험이라는 것은 당시는 힘들지만 우리가 온전히 기뻐하면서 인내를 이루게 되면 온전하게 되고 모든 것이 갖춰지게 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끔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험을 믿음의 시련으로 여겨 온전히 기뻐함으로 하나님이 뜻하신바 온전하여 구비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당할 때 참아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당장 너무 힘이 듭니다. 어떻게 견뎌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믿음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것 잘 압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참으로 비참합니다. 암담합니다. 자존심도 상합니다. 길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뭔가 길이 보여야 뭘 해도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너희에게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힘들어만 하고 있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케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기지 못할 시험이 없어요. 그런데 어려움이 닥치고 시험이 닥칠 때 큰 탈났다고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먼저 감사하십시오. 시험에 합격한 다음에 누리게 될 기쁨과 영광을 생각하십시오. 하지만 혼자서는 아닙니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이 훈련을 잘 받을 수 있을지를 의논하십시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왜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가 하면 우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대저 주께는 능치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습니다. 대형 물류 창고에 가보면 각종 필요한 자재와 부품들이 다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물품 청구서가 들어오게 되면 그 청구서대로 물품들을 준비해서 내주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그 길도 알려주시고 친히 함께 동행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는데 필요한 모든 안전장치도 다 마련해 주시고 필요한 사람도 물질도 다 마련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도 꾸짖지 아니하시고 주신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게 될 때 도움을 들어주기는 하지만 막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막 투덜거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도움을 청하기 싫을 만큼 그럴 때가 있습니다. 한데 하나님은 결코 꾸짖지 아니하신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후히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코 쩨쩨하신 분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아니 사실은 우리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해하지는 못해도 우리를 속일 수는 있습니다. 

그 사탄이 속삭입니다. 네가 이런 어려움 당한 것이 무엇 때문인 줄 아니? 그런데 그런 너를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 같아? 어림도 없지 네 주제를 먼저 생각해봐.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뭔가 내게 문제가 있어서 이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듭니다. 그래 더 자신이 없어요. 하지만 시험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자격을 얻도록 만들어주기 위한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떳떳하게 자격을 갖춘 사람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 시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시련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920번이나 운전면허 시험에 떨어졌던 차 할머니 연세도 자그마치 69세입니다. 그렇지만 그분에게는 이제는 운전 면허증이 하나의 훈장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운전을 잘 해도 운전면허가 없으면 그는 무면허 운전자일 뿐입니다. 그래 자격을 갖추도록 시험을 보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혼자서는 안 되니 운전 교습을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남편에게 교습을 받아보십시오. 정말 힘듭니다. 

하지만 교습학원에 등록해서 받게 되면 아주 편하게 교습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꾸짖지도 아니하시고 아주 후하게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더군다나 거기에 무슨 자격을 말씀하시지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신다고 했습니다. 단지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는데 왜 그럼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받지 못했느냐 하면 구하지 아니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혼자서 힘들어 하지 말고 세상 다른 곳에서 도움의 찾지 말고 하나님께 구하심으로 모든 시련을 이기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라는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미 살펴본 것처럼 그것은 우리를 속이는 악한 마귀의 계략에 우리가 넘어간 것입니다. 심지어는 우리 마음에 정말 하나님이 계실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런 건 왜 그렇고 저런 건 또 왜 그러냐는 생각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합니다. 

보십시오. 어떤 꽃은 며칠이면 활짝 피기도 하지만 어떤 꽃은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도 100년에 한 번밖에 꽃을 피우지 않는 꽃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꽃은 내 평생에 한 번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꽃이 피는걸 보지 못했다고 그건 꽃도 없는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급해요. 참고 기다리질 못합니다. 남들은 벌써 왔는데 하지만 누구는 더 기다려야 오기도 합니다. 서울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가도 어떤 열차를 타느냐에 따라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부산에 도착이 안 된다고 하면서 중간에 내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거야 말로 요즘 유행하는 말로 집을 떠나면 개고생이 아니겠습니까?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부산도 못가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인내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된다고 하는 믿음 하나님이 이루어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이게 정말 부산 가는 열차가 맞나 싶어서 중간에 내린다면 그건 보나마나 아닙니까? 더군다나 우리는 아주 세계적인 최고의 특산물이 있는데 그게 바로 빨리 빨리입니다. 뭘 하든지 빨리 빨리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때가 되어야지 기차는 떠나고 때가 되어야지 도착하는 겁니다. 단지 끝까지 의심치 않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모든 자에게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신다고 했는데 우리는 자꾸 “나 같은 사람에게도 주시나요?” 그럽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잘 났든 못 났든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실 때 무언가 자녀 삼을만한 구석이 있어서 자녀를 삼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우리가 믿었을 때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도 약속을 따라 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자녀 되었는데 왜 구하는 것은 믿음으로 구하지를 않습니까? 하나님은 구하면 주신다고 했는데 그것도 구하는 모든 자에게 주신다고 했는데 어찌해서 우리 스스로 거기에 조건을 붙입니까? 나 같은 사람도 될 수 있냐고요? 당연히 되고말고요. 아니 목욕탕에 들어가는데 너는 너무 더럽고 냄새도 나니까 들어오지 말라고 합니까? 아니요. 돈만 내면 다 들어갑니다. 아무리 거지라도 표만 있으면 들어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받을 줄로 믿고 구해야 합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의심하면 될 것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다는데 나 같은 사람에게 뭘 주시겠어 하고 스스로 주저 않는 이유가 뭡니까? 그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우리를 속이는 우리 안의 소리 악한 마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했습니다. 바다 물결이 요동하게 되면 목적하는 곳에 다다를 수가 없습니다. 마치 풍랑 가운데 밤새 갈릴리 바다에서 애를 쓰고 있던 제자들처럼 그렇게 갖은 애를 다 쓰고도 한 걸음도 못나가는 형상이 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구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느냐 하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 자체는 그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구하는 것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셔도 그만 안 주셔도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무얼 주시겠습니까? 아이들은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주어봤자 잠시 관심을 갖는 듯 하다가 아무데나 내 던져버립니다. 

그렇게 되고 말 것을 알면서 또 주겠습니까? 안 주죠. 그래서 의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음으로는 간절히 구하십시오. 정말 주실 줄 믿는다면 더욱 간절함으로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믿고 안 믿고 이전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구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저할 이유도 없습니다. 중간에 실망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믿음에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운전을 하다가 딴 생각을 하게 되면 사고 나기 십상입니다. 하물며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이 어찌 주께 얻기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주님의 때를 참고 기다림으로 온전하고 모든 것을 갖추어 부족함이 없는 귀한 복된 삶을 우리 모두가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은 더 이상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그 정체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시험이라고 해도 그 어떤 어려움이라고 해도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기만 하면 오히려 그것은 믿음의 시련이 되어 우리로 온전하여 구비하고 부족함이 없게 될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 귀한 계기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기도하십시오. 먼저 우리의 믿음 없음을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불러 믿음의 자녀 삼아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시작하십시오. 아울러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 앞에 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넘쳐나는 귀한 삶을 날마다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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