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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지리산 선교사 수양관 이야기

  • 최한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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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선교사 수양관 이야기


지리산 노고단 왕시루봉에 선교사 휴양관이 있다. 미국.영국.호주.노르웨이 선교사들이 제각기 고향 건축양식에 아궁이와 온돌을 더해 지은 건축인데, 모두 12채로 건축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한다. 지리산에 선교사 수양관을 지은 데는 배경이 있다.  

지금 선교사 묘역인 양화진에 처음 묻힌 선교사는 존 헤런이다. 그는 선교하던 중 1890년 이질에 걸렸다.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당시 의술이 전무하던 때라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양화진에 묻힌 첫 선교사가 되었다.

1892년 미국 선교사 새무얼 뮤어 가족이 한강 나루 양화진에 내려 남대문까지 걸어왔는데 이미 성문이 닫혀버렸다. 하는 수 없어 어린 아들이 먼저 성벽 아래 개구멍으로 들어가고 선교사 부부는 6m 높이의 성벽을 로프로 걸고 넘어갔다. 그리고 지금 을지로 1가, 곤당골에 터를 잡고 백정과 천민에게 복음을 전했다. 양반과 천민이 함께 예배를 보게 했고 고종에게 신분제 철패를 탄원했다. 이를 계기로 그를 ‘백정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무어는 그리스도신문 사장이던 1906년 장티푸스로 숨져 양화진에 묻혔다.

이화학당 3대 학장 조세핀 페인은 기숙사 학생들을 위해 날마다 가마타고 장을 봐왔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외교권을 잃자 매일 오후 3시 전교생을 모아 주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학장에서 물러나서는 하루 수백리길을 걸으며 전도하다 1909년 해주에서 콜레라로 떠났다.

평양에서 복음을 전하며 광성학교를 세운 윌리엄 홀은 발진티푸스에 걸린 환자를 돌보다 발진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경신학교 교장이던 기포드는 이질로, 숭실대학교 설립자인 베어드는 장티푸스에 걸려 숨졌다.

1910~20년 대에 호남지역에서 선교하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가운데 67명이 말라리아를 비롯한 풍토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미국 본부에서 귀환 명령을 내렸지만 선교사들은 떠나지 않았다. 대신 지리산 노고단에 휴양관을 지었다. 전염병이 번지는 6~9월에는 깊은 산 속으로 피해 성경을 번역하며 기운을 차리고 다시 내려와 복음을 전했다. 1940년대에 56채이던 휴양관이 6.25 때 파괴되고 예배당 벽채 일부만 남았다.  

1960년대에 후배 선교사들이 그 뜻을 이어 왕시루봉에 수양관을 지었다. 그 중에 남은 12채를 자기 돈으로 관리해 온 선교사가 얼마 전에 한국인이 된 인요한 세브란스 병원 외국인 진료센터장이다. 그는 외증조부로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 4대 117년 동안 한국 사랑에 헌신하였다. 이 수양관이 문화재로 등록되기를 원하고 있다. 초기 청교도 정신으로 복음을 전한 그들, 무서운 풍토병에도 물러서지 않았던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그들을 한국 교회는 점점 잊어가고 있다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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