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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깨달음 (행 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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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깨달음 (행 10:9-16)


한 교인이 상담 차 목사님을 찾았습니다. 자기 아내가 가는귀가 먹었는지 자기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와 대화가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나름대로 방법을 알려줬습니다. 조금씩 아내에게 가까이 가면서 말을 해 보고, 아내가 듣고 반응을 보이는 거리를 기억해 두었다가 그 거리에서 대화를 시도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 분이 집에 들어가면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오늘 저녁 반찬이 뭐요?” 아내가 말이 없습니다. 거실을 지나며 또 물었습니다. “여보! 반찬이 뭐요?” 역시 아내가 말이 없습니다. 주방에 들어서며 또 물었습니다. “반찬이 뭐요?” 또 말이 없습니다. 이제 가까이 다가가서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또 물었습니다. “여보! 오늘 저녁 반찬이 뭐요?” 아내가 고개를 돌리며 소리치며 말했습니다. “김치찌개요! 아니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이게 네 번째예요!”

사실 가는귀 먹은 사람은 아내가 아니라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내가 가는귀가 먹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남자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실제로 문제는 자기에게 있는데 문제가 남에게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엉뚱한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잘못된 판단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을 올바로 살 수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하나 되어 살아갈 수 있고, 공동체 안에서 덕을 세우며 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자기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하나님 보실 때는 그렇지 못합니다. 자기는 교회 안에서 누구보다도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그렇지 못합니다. 더더욱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은 다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런 영적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신앙공동체 안에서 덕을 세우며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영적 착각 속에 빠져 있던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에 집에 여러 날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세우시기 위해 욥바에 있던 베드로를 보내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고넬료가 이방인이라는 점입니다. 아직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복음은 선민인 유대인에게만 전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생각을 바꿔주시기 위해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베드로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제 6시에 기도하기 위해 그 집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 6시는 유대인들의 정규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아마도 평소와 달리 이 시간에 기도할 마음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기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기도하던 도중 환상을 보게 됐습니다. 하늘에서 한 그릇이 내려왔습니다. 그 그릇에는 유대인이 부정하다고 여겨온 여러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시장하던 차에 음성이 들립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 하였나이다” 다시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뒤 그 그릇이 하늘로 올려 져 갔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베드로가 몇 가지 착각을 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는 착각입니다.

14절을 보면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베드로는 율법에서 정결하지 않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한 먹거리를 먹은 일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잘 살펴보면 이미 베드로는 율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바로 그가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러있는 것 자체가 율법을 어기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무두장이란 가죽을 다루는 사람을 말합니다. 유대 율법에 가죽을 다루는 사람들은 죽은 짐승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이 무두장이라는 직업은 그 자체로 부정합니다. 더 나아가 유대인들에게 경멸의 대상입니다. 마치 옛날 우리나라 백정처럼 취급당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무두장이들은 성읍에서 격리되어 살아야 했고, 한 여자가 상대방이 무두장이인 줄 모르고 약혼을 했으면 파혼을 선언해도 무방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지금 이런 부정한 사람의 집에 여러 날을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베드로마저도 율법으로 볼 때는 부정한 사람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일은 율법이 금하는 일을 범한 꼴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 자기가 신앙이 좋은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신앙이 좋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 주장에 동의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정결 여부를 판단하는 자로 아는 착각입니다.

15절을 보면 이런 음성이 들렸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먹으라 하신 것을 정결하지 못해서 먹지 못하겠다고 거절하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먹으라면 먹어. 그것이 깨끗한 지 부정한 지를 결정하는 게 누구냐? 너냐 하나님이냐?” 

그런데 중요한 것은 16절을 보면 이 승강이가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말씀하신 것을 베드로가 정결치 못해서 못 먹겠다고 거부한 것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네가 정결 여부를 판단하는 자냐고 야단을 치시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마치 자기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자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사에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자기와 다른 주장은 비판합니다. 그리고 자기주장을 결코 양보하지 않고 고집을 부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는 착각입니다.

베드로는 전통과 관습에 사로잡혀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피해 온 음식들은 여전히 부정하여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온 것입니다. 이런 고정관념이 하나님께서 새로운 구원역사를 펼쳐 가시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이런 자기의 고정관념을 그 자체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겨 온 것입니다. 정작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었을 때 이 고정관념이 사이비 하나님의 뜻이 되어 참된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역할을 해 온 것입니다. 바로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것이 중대한 착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 자기가 지켜온 고정관념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있어서 좀처럼 물러서지 않습니다. 정작 하나님의 뜻이 전해져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런 착각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 34-35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 모든 착각에서 벗어나게 됐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영적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어떻게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 영적 깨달음을 얻게 되었을까요?

첫째, 기도했습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시더라” 베드로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러 있을 때 기도하기 위해 지붕으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기도가 베드로의 영적 깨달음의 첫 걸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깨달음의 가장 중요한 계기 가운데 하나는 기도입니다. 기도하면서 자기를 돌아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주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기독교 잡지 [Christianity Today]가 지난 50년간 복음주의 교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책 50권을 선정했습니다. 그 중에 1위에 오른 책은 어찌 보면 무명에 가까운 로자린드 링커의 [대화식 기도 - 기도 :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책입니다. 그리고 이 책이 선정된 이유는 복음주의 교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책이 나오기 전 복음주의 교회에서 기도는 쓰여진 기도문을 읽는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영향을 받고 난 뒤 기도는 구어체가 되었고, 하나님과의 친근한 대화 형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 책이 복음주의 교회의 기도 형태를 바꾸어 놓았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책으로 선정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여기서 대화란 의사소통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도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비밀을 터득해야 합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사실 많은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 자리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 만의 독백이 될 때가 많습니다. 찬양하고, 신앙고백하고, 감사를 드리고, 그리고 자기의 소원을 아뢰는 일로 채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는데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더욱 열심히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가 되도록 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안에서 영적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여러분이 변화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경청했습니다.

본문 13을 보면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거늘”이라고 되어있습니다. 15절을 보면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라고 되어있고, 16절을 보면 이런 일이 세 번 있었다고 되어있습니다. 기도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음성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베드로가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눈에 보이는 사람은 없는데 이 귀에 어떤 소리가 들렸다는 것일까요? 마치 요즘 이어폰을 꼽고 있는 사람들이 음악소리나 전화에 들려오는 상대방의 말소리를 듣는 것처럼 들었다는 것일까요?

본문 19절에 그 답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베드로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물론 성령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귀로 들리는 공기 진동을 통한 음성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의 영이 성령의 감동으로 영적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우리 귀를 통해 음성이 들려오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영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전해진 것입니다.

오늘도 분명히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듣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아서 우리가 마음속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성령께 집중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저는 뉴스를 보면서 일기예보를 보는데 많은 경우 보고도 내일 날씨에 대해 다시 확인하곤 합니다. 그런데 기상변화가 심하다든지 태풍이 오고나 한파가 몰아칠 때는 일기예보를 다시 확인하지 않습니다. 일기예보 시간에 잘 듣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경우  기도 시간에 성령의 음성에 집중하지 않아서 듣지 못합니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성령의 음성과 내 마음의 생각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인지 아니면 내 생각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이것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께서 오늘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경청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영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셋째, 순종했습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나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베드로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그대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마침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왔는데 말씀에 순종하여 그대로 따라 나섰습니다. 그랬더니 고넬료의 집을 찾게 되었고 거기서 이방인인 고넬료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사건이 일어나게 됐습니다. 베드로가 이 일에 귀한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일로 그가 환상을 보게 된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환상을 통해 말씀하신 내용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을 보면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모세 뒤를 이은 지도자로 세우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2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가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아갈 때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모든 말씀을 머리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요단강을 건넌 뒤에 하나님의 뜻을 체험했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즉 체험적 깨달음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다운 깨달음은 순종을 통해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깨달음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말씀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착각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 착각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특히 영적 깨달음을 얻게 하셔서 그 착각을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이런 영적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내게 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나아가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온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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