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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 충만한 인생 (롬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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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충만한 인생[롬2:1~11]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신이 체험하고 일평생 생명을 걸고 증거한 복음에 대해 아주 사실적으로 밝히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유대인의 모습을 부각시키면서 역으로 우리가 왜 복음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본질적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복음으로 충만한 삶을 살면서 천하 만민 가운데 명성과 칭찬을 얻는 변화의 증거를 얻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불의한 판단과 정죄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롬 2:1)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을 시작하면서 복음으로 충만하지 않은 인생의 특징을 아주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자기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일차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율법적인 눈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비단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남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창세기 3장의 현장을 살고 있는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사실 창세기 3장에서 발생한 인간의 범죄 이전에는 이러한 판단과 정죄가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필요에 따라 개성 있게 창조하셨고 그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발생한 인간의 범죄 즉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부터 이러한 축복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고 죄와 저주 가운데서 사단 종노릇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사단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남을 이간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대적자라는 의미를 가진 존재입니다. 사단의 또 다른 이름인 마귀는 이간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단의 습성을 창세기 3장 사건으로 타락한 인간이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2~4절을 보면 이렇게 판단을 일삼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에는 판단과 정죄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진노를 쌓게 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판단과 정죄가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생명을 살리는 데 있는데 판단과 정죄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소망을 짓이기는 아주 악하고 교만한 행동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중국의 주자는 “남의 험담을 하는 자는 경만한 자요, 더불어 맞장구를 치는 자는 비겁한 자요, 이를 엿듣고 전하는 자는 간사한 자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가타부타 알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교만‧비겁‧간사함이 그 마음에 깔려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과 티가 보이더라도 그것을 말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기도 속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모든 판단과 정죄의 시각을 버리고 복음으로 수용하여 많은 영혼을 품고 살리는 복음 체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은혜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롬 2:2~4) 사도 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에 있는 것이므로 그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하신데 왜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를 멸시하는 삶을 사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온전히 방향을 맞추면 됩니다. 잘못된 것,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즉시로 갱신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 7, 10절을 보면 ‘선을 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선을 행하는 삶’에 대해 오해를 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나온 유대인들이 그렇습니다. 바울은 12절 이후로 유대인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을 오해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사실 율법의 조항을 모두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자신이 율법을 다 지키며 의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이들의 이런 잘못된 의식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발전했습니다. 

바울도 이전에는 이렇게 율법을 지키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것이라 오해했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율법으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여전히 율법주의적 삶에 얽매인 유대인을 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을 행한다는 것을 단순히 일반적인 선행으로 오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구제와 봉사 등 다양한 박애주의적 활동을 합니다. 물론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것에 대한 본질은 여기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을 이룬다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핵심은 요 5:39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음으로 하나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바로 믿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은혜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 바로 성경적인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 은혜의 풍성한 단비를 맞고 사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살고 남도 살리는 전도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이러한 복음의 생명력을 충만히 누리며 현장을 변화시켜 나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장점도 생겼지만, 사이버 상으로 타인을 공격하는 일도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특정인을 집단적으로 공격하는 일도 생겨났는데 이를 가리켜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이로 인해 자살하는 청소년들이 다반사일 정도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습니다. 

인터넷 상에 한번 올라온 욕설과 비방은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보고 이를 퍼 나르기 때문에 눈 깜짝할 사이에 확산되어 피해자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게 됩니다. 특히나 대중 앞에 드러나 있는 정치인과 연예인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잘못하면 네티즌이 벌떼처럼 일어나 공격을 해댑니다. 이런 사회적 현상 속에서 우리 사회가 너무나 메말라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파멸 속으로 몰아가는 불링(bullying)의 삶이 아니라 상대방을 축복하는 블레싱(blessing)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판단과 정죄의 말은 상대방을 죽이지만 복음적인 말과 위로의 말은 사람을 살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끔 하는 축복의 길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이 복음 충만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의 말, 생각, 중심, 삶이 복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를 통하여 다른 이를 치유하고, 격려하고, 세워주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복음 증거의 주역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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