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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숙한 사랑의 특성 2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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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사랑의 특성 2 (고전 13:4-7)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지난주에 이어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의 4절부터 7절에 나오는 ‘성숙한 사랑의 특성’ 열다섯 가지를 하나씩 살펴봅니다. 지난주에는 4절에 나온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를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이어서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이 세 가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성숙한 사랑’의 네 번째 특성은 무엇이냐? 시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시기는 나쁜 것이다, 죄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성경에는 아주 좋은 시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시기’라고 번역된 헬라어가 ‘젤로오’인데 이 말은 본디 “아주 열정적이다, 열심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열심인 것과 시기가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시기나 질투는 뭔가에 열심을 품고 집착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한 가지만 시험해 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질투가 나냐, 안 나냐 하는 것입니다. 가끔 이런 일이 있지요. 어떤 아가씨가 애인 앞에서 일부러 다른 남자에게 잘 해줍니다. 일부러 그러는 겁니다. 질투 나게 하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질투를 안 한다, 그러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젤로오’라는 낱말은 본디 부부 사이에 질투하는 것을 뜻합니다. 

부부 여러분, 내가 진정 내 아내를, 남편을 사랑한다면 질투가 나고 시기가 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내 아내한테 누가 나보다 잘 해준다던지, 내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인다든지 할 때 말이지요. 그런데 아무 느낌도 없고 덤덤하다, 질투나 시기가 전혀 안 난다, 그러면 이미 사랑이 식은 것이지요. 오늘 집에 가서 한 번 실험해 보세요. 우리 남편이 우리 아내가 질투하나 안 하나 말이지요. 사랑할 때 질투가 나는 것은 그 사람의 사랑을 독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정말 뜨겁게 사랑하고 ‘열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도 나만 사랑하기 원해서 질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과 ‘시기 혹은 질투’가 같은 어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낱말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질투하신다’고 할 때 사용됩니다(출 34:14 등). 이런 말 들어보셨지요?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구약에 여러 번 나오는 말이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이 질투하십니까? 좀 이상하지요? 못난 인간이나 질투하는 줄 알았는데 왜 하나님이 질투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뜨겁게 열심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만 사랑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아닌 다른 존재를 사랑한다, 이게 바로 우상숭배고, 그러면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구약에서 이 낱말은 주로 우상숭배를 금지할 때 사용됩니다. 우리가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다른 신을, 다른 존재를 더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좋은 시기, 좋은 질투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시기’는 나쁜 시기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시기, 질투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하거나 잘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상하는 것”을 뜻합니다. “남이 잘 살거나, 출세하거나, 행복한 것을 보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boil)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남이 잘되는 것이 싫고 나보다 남이 못 되어야 편안해 지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정말 큰 죄지요. 

인류의 죄의 역사 자체가 이 시기와 질투에서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도 뱀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유혹했기 때문인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시기와 질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내가 못 가진 것을 불평하며 남의 것을 탐내는 것입니다.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도 동생의 제물만 하나님이 받아주시자 시기해서 죽인 것이요 요셉을 팔아넘긴 형들도 결국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시기와 질투는 인간이 죄를 저지르는 가장 흔한 이유가 됩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는데 의학자들이 연구해보니 이럴 때 정말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사촌’(四寸)이란 나와 먼 사람, 별로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라(사실 이런 사람 잘되는 것은 별로 스트레스가 안 되더군요) 친척이나 친구처럼 아주 가까운 사람을 뜻하는데 그들이 잘 될 때 시기질투로 스트레스 받아 소화계에 질환을 일으켜 정말 배가 아파진다는 것이지요.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다 죄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어땠습니까? 시기했습니다. 질투했습니다. 시기나 질투의 특징이 뭡니까? 끊임없이 나와 남을 비교하며 내가 조금이라도 잘 난 것이 있으면 지나치게 내세우고 뻐기며 남이 조금이라도 잘 난 것이 있으면 애써 부인하고 인정 안 해줍니다. 고린도교인들이 파당을 지어 서로 우리 파가 더 잘났다고 싸운 것도, 또 은사를 내세우면서 내가 받은 은사가 더 크다고 다툰 것도 결국은 이 시기와 질투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시기와 질투가 고린도교회를 어지럽히고 분쟁을 일으킨 것을 알고 사도 바울은 사랑장에서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기의 반대말, 질투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물론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나 우정은 시기와 질투를 극복하고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게 만듭니다. 요나단은 친구 다윗이 자신의 경쟁자로 왕의 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는데 오히려 친구가 인기를 얻고 잘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정말 잘 되기를 축복합니다. 왜요?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무엘상 20장 17절입니다. “요나단이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다윗을 사랑함이었더라.”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 사람을 인정하게 되고, 그 사람의 행복을 나의 행복으로 여기며 그 사람이 잘 되었을 때 모든 시기와 질투를 극복하고 진심으로 기뻐하게 됩니다. 내가 비록 그 사람보다 잘되지 못해도 얼마든지 이해합니다. 이 사랑을 갖지 못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처럼 아등바등 다투고 싸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교회 다니는 사람끼리 형제요 자매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정 서로를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교회 처음 나온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 다니는 분들은 피 한 방울 안 나눈 남남인데 정말 다른 사람의 슬픔을 내 슬픔처럼 여기고 위로하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내 행복처럼 여기며 축하해 주는 모습이 정말 좋습니다.” 그렇지요. 세상에는 이런 일이 없거든요. 어떻게든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진짜 성도요, 진짜 형제자매라면, 정말 성숙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우리의 죄성, 인간의 본성 속에 들어있는 시기와 질투를 극복하고 진정으로 서로 인정하고 함께 기뻐하고 축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지요. 그래야 교회가 세상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지요. 여러분 속에, 우리 교회 속에 이 사랑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이제 ‘성숙한 사랑’의 특성 다섯 번째를 살펴봅니다. 무엇을 안 한다고 했습니까?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랑’과 ‘사랑’은 발음이 비슷하지만 정반대의 뜻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앞서 설명한 ‘시기’와 이 ‘자랑’이 상당히 연관성이 깊다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시기’는 초점이 남에게 있지만 ‘자랑’은 초점이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시기’나 ‘질투’는 남의 장점이나 업적을 최대한 줄이려는 태도입니다. 남이 아무리 잘 나고 잘 해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랑’은 나의 장점이나 업적을 최대로 부풀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가 잘 한 탓이고 내가 하는 것은 뭐든지 옳고 좋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남은 어떻게든 깎아내리고 부정하는 것이 ‘시기’고 나는 어떻게든지 치켜세우고 내세우려는 것이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저를 포함해서 누구에게나 있지 않습니까? 다 우리의 죄성(罪性)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자랑’하려는 마음이 우리의 본성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요즘을 자기 PR시대라고 합니다. PR이 무슨 약자냐고 했더니 “피터지게 알리는 것”이랍니다. 어떤 사람은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것”이랍니다. 어쨌든 이 시대는 자기 PR시대라 자기를 잘 드러내고 잘 자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이력서를 화려하게 장식해야 하고 스펙을 쌓아가야 합니다. 이런 시대에 ‘자랑’은 죄나 허물이 아니라 오히려 꼭 해야 할 필수사항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어땠습니까? ‘자랑’이 지나쳐서 “우리 파가 최고다, 내가 받은 은사만 크다” 하다 보니 분쟁이 생겼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랑하지 말아야” 진정한 사랑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 자신은 어땠습니까? 자랑하려고 생각하면 사도 바울처럼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도 드믑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자신의 이력서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5~6절) 어디 그뿐입니까? 당대의 최고 율법학자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하고 모든 철학과 학문에 정통하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엄청난 스펙입니다. 이 정도면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 최고 수준의 이력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화려한 이력서를 우리에게 보여준 뒤 “제가 이렇게 잘났습니다. 나를 써주세요”라고 말하지 않고 빌립보서 3장 7~8절에 아주 엉뚱한 결론을 내립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그래서 이 모든 세상적인 자랑과 화려한 이력은 다 배설물, 고상하게 말해서 배설물이지 실제로는 ‘똥’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 까닭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세상적인 조건이나 화려한 이력이 아닌 오직 예수님과 그분이 달리신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음을 깨달았기에 그 깨달음을 가지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교훈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주님 한 분 뿐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PR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도 삽니다. 

그래야 그 분이 나를 책임져 주시고 나를 끌어주고 밀어주고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랑은 결국 내 힘으로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뜻이고 내가 내 인생 책임지겠다는 뜻이지만 그게 뜻대로 절대 안 됩니다. 어떻게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고 내 힘으로 뭘 합니까? 못 합니다.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만 자랑하고 그분께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나를 책임져 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정말 성공하고 잘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절실하게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나아가 자랑의 반대말은 ‘사랑’입니다. 나를 자랑하고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남을 인정하고 앞세워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의 대상을 나 자신이 아니라 남에게로 옮겨갈 때 그 사랑은 진정 빛을 발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의 대상을, 그리고 자랑의 대상을 나에게서부터 주님께로 옮기기 바랍니다. 나에게서 남에게로 옮기기 바랍니다. 그래서 남을 인정하고 세워주며 자랑스럽게, 대견하게 여기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진짜 사는 사람은 나입니다. 남을 세울 때 내가 서게 되고, 남을 앞세울 때 내가 높아집니다. 이 진리를 못 깨달은 사람은 자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깨달은 사람은 존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마지막으로 ‘성숙한 사랑’의 여섯 번째 특징입니다. 무엇을 안 하는 것입니까? “교만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살펴본 세 가지 요소, 즉 ‘시기’ ‘자랑’ ‘교만’ 다 비슷한 말입니다. 시리즈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이 ‘교만’이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헬라어로 ‘퓌시오’인데 ‘풀무’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풀무는 불을 피울 때 바람을 불어넣어 불이 잘 붙게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교만은 마음에 ‘바람 드는 것’입니다. 부풀려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자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고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교만한 자 아닙니까? 

왜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는 말씀처럼 교만은 모든 죄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참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속한 파당을 앞세우고, 자기 지혜를 자랑하고, 은사를 자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만한 자들에게 경고합니다.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범죄이며 풍선처럼 마음이 부풀어 오르면 언젠가 반드시 뻥 터지고 만다는 것을 말입니다. 특히 교만은 상대방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기 때문에 바울은 교만이 사랑의 반대말이라고 한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만 잘 난 줄 알고 자기만 앞세웁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의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고집이 셉니다. 자기 생각이 최고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을 무시하고 남의 말을 잘 안 듣습니다. 그러니 상처를 주고 분쟁이 일어나지요. 고집은 우리를 영적으로 죽게 만듭니다. 불 뱀에 물린 후 장대 위에 달린 놋 뱀을 본 자들은 살았지만(민 21:9) “내가 죽어도 보나 봐라” 고집 부리며 끝까지 안 본 자들은 결국 죽었습니다. 고집 부리지 마세요. 똥고집 말입니다. 또 교만한 사람은 말이 많습니다. 자기주장이 강하기 때문이지요. 말을 줄여야 합니다. 

몰라서, 못나서 말 안하는 것 아닙니다. 나도 알지만 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왜요? 그래야 평안하고 그래야 덕이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깊은 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잘난 사람, 성숙한 사람은 조용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 중에 말을 딱 10%만, 혹은 절반만 줄이면 참 성숙해 질 사람들 많습니다. 입은 하나 만들고 귀는 두 개 만드신 창조주의 뜻을 깨달아 내 말 하는 것보다 남의 말 듣는 것을 더 잘하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교만한 사람은 희생하지 않습니다. 왜 희생을 합니까? 내가 제일 잘 났는데, 남이 나를 위해 희생해야지 내가 왜 희생합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 가지가 다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적인 마음 같아서는 죽기 싫었지만 자기주장 꺾고, 고집 꺾고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 예수님, 정말 말씀 잘하는 분인데,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지만 아무 말 없이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는 말씀처럼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희생해 모든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주님이 이런 길을 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사랑의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랑은 너무 흔한 말이지만, 특히 교회 안에서 제일 많이 쓰는 말이지만 사랑이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적어도 교만으로부터 자유롭고 자기 고집 대신 남을 인정하고 품으며, 내 말 하는 대신 남의 말을 들으며, 나를 희생하고 죽일 줄 아는 사람 정도는 되어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리 쉬운 것 아닙니다. 헌데 어렵지만 실천 불가능 한 것도 아닙니다. 가능합니다. 아주 작은 우리의 태도와 습관에서부터 바꾸어 가면 이 사랑이 가능합니다. 내 하기 나름입니다. 내가 사랑으로 바뀌고 성숙해지면 됩니다.

여러분은 꼭 이 사랑을 배우기 바랍니다. 시기도 자랑도 안 해야 합니다.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할 줄 안다면 반드시 우리 교회가 변할 것입니다. 가정이 변하고 이 사회가 변할 것입니다. 왜요? 사랑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시기할수록 마귀를 닮게 되고, 자랑할수록 마귀를 닮고, 교만할수록 마귀를 닮게 되지만, 반대로 우리가 겸손하고 사랑하고 남을 인정하면, 이해하고 품으면 품을수록,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이 바로 그런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꼭 빼어 닮은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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