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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 (사 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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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받으시는 것 (사 1:10-17)    
 
 
심리학자로서 예일대학과 하버드 대학 교수인[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이라고 하는 사람이 현대인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그 하나가 현대는 내향적 세대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극단적 개인주의라는 말입니다. 자기 외에는 다른 생각을 전혀 못하고 사는 세대라는 것입니다. 그 개인주의가 지나쳐서 어느 정도냐 하면 이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기 부모도, 자기자식도 생각하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남편도 아내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시대적 위기요, 질병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도 무너지고, 세상도 무너지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현대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부성상실의 세대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없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없다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한 마디로 질서가 없는 제 멋대로의 시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윗사람이 없습니다. 선후배도, 어른도 없는 시쳇말로 막 돼먹었습니다. 존경이 사라지고 있단 말입니다. 

언젠가 장로님들이 그래요. “도대체 교회에서 마주치면서 인사도 안하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그래 가만히 봤더니 정말 그렇습니다. 빤히 쳐다보고 인사 안합니다. 결국 먼저 인사하니까 마지못해서 고개 까딱하고 지나갑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이거 안 됩니다. 기본적인 질서마저 무너지면 큰일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그렇다고 해도 교회에서 마저 그러면 안 되지요.

그런가하면 세 번째는 강박적인 세대라 그랬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에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습니까? 학생들은 입시스트레스, 직장인들은 승진에 대한 스트레스, 성공에 대한 강박감이 얼마나 큽니까? 이렇게 많은 강박 관념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다보니까 무슨 일에 반응하여 나오는 말은 거칠고 행동은 거의 경련과 발작적인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즉각적으로 되받아치는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순간적이고 우발적으로 저질러 버리는 돌이킬 수 없는 사고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사건이 터지면 끔찍하고도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현대인의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시대는 발전하고 문명은 발달하는데 인간성은 소멸 되어간다는 아이러니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고 누가 그랬습니다. 죄인도 죄인이요, 죄인을 잡는 사람도 죄인이요, 죄인을 심판하는 사람도 죄인인 시대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총체적 타락의 시대라는 말이 실감되는 시대입니다. 

인간의 총체적 타락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왜 무서운가 하니 총체적인 타락에 빠지고 나면 타락의 근본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모르는 지경까지 나아가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특별히 신앙적으로 총체적인 타락에 빠져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그 총체적 타락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을 거슬러 올라가서 5절, 6절을 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지은 죄로 인하여 진노하셔서 매질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터졌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매 맞을 짓을 합니다. 이들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냐!(11절)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제사도, 내 앞에 나오는 것까지도 다 그만 둬라!(13절) 너희가 아무리 기도할지라도 듣지 않겠다.(15절)”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이유를 뭐라고 하십니까? 15절 후반입니다.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권력으로부터, 경제적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그들의 소유를 탈취하여 배불리면서 그런 손으로 깨끗한 척하고, 숨기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무언가 내 보이려고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을 보게 되면 뭐라고 하십니까?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해결된 사랑의 마음으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결국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진실 된 마음과 깨끗한 양심이 아닌 것으로 하나님 앞에 보이려고만 하는 형식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해결되지 못한 양심과 마음이 담기지 않은 사랑으로 형식만 보이는 행위를 그치라는 말씀입니다. 형식만 있는 사랑이 아니라 내용이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기도합니다만 나 때문에 우는 사람, 나 때문에 가슴을 치는 사람, 나 때문에 일생을 망친 사람이 주변에 있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 복 받겠다고 몸부림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실입니다. 나중에 29:13절에도 보면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몸부림을 치는 것 같으나 진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몸은 나왔지만 마음은 나온 바가 없고, 제사는 드리지만 정성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이 세대의 결정적인 것도 이것입니다. 형식은 있는데 마음과 정성과 진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모르지만 하라고 하니까 하기는 하는데 마음은 없습니다. 해야 되는 거니까 하기는 하지만 진심은 딴 데에 가 있습니다. 

우리도 사람을 만날 때 저 사람이 나에게 진심으로 대하는지 형식적으로 대하는지를 알지 않습니까? 아무리 반가운척하고 웃으며 쳐다봐도 그 사람의 진심은 금방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기분이 별로 상쾌하지 않거든요.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모르시겠습니까? 또 기분도 나쁘시다는 겁니다. 

이런 상태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자,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해결책을 주시는데 먼저는 스스로 씻어 깨끗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도 원망하지 말고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을 알고 내 스스로 씻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은 내가 알아서 먼저 씻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 욕망 그리고 다른 많은 것으로 문제가 된 마음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먼저 스스로 깨끗이 씻어내는 것입니다. 

우선 마음을 씻어내고 그러고 난 다음에는 다시 더러워지지 않도록 악한행실도 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지면 행실도 깨끗해지는 법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행실이 깨끗해져야 마음도 깨끗해집니다. 이렇듯 마음과 행실은 상호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제 고향친구가 전화가 왔어요. 술이 취해서 밤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목사 친구야! 내가 술을 끊을 수 있도록 기도 좀 해주게 나!” 그럽니다. 부인은 교회를 잘 다니는데 이 친구는 자기말로 가짜 교인입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안 됩니다. “내가 술을 끊었는데 다시 마시지 않도록 기도해주게!”하는 건 말이 됩니다. 하지만 지금 술이 취해서 “술을 끊을 수 있게 기도해 달라.”는 것은 잘못입니다. 

왜입니까? 악한 일을 그대로 계속 하면서 안 하게 해 달라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스스로 악을 버리고 스스로 정죄하고 끊어버리고 “하나님,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하는 겁니다. 내가 사랑하고 봉사하면서 “하나님, 더욱 뜨거운 마음을 주십시오.”하는 게 바른 기도이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뜨거운 마음을 주십시오.”하는 것은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살아가다보면 모르고 실수하는 것들도 많습니다만 문제는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것입니다. 

요즘 식당이나 대중이 모이는 공공장소에는 거의 다 금연구역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금연구역이라고 적혀 있는 곳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왜 저럴까 싶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공중도덕에 어긋난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왜 그러는 겁니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임을 모르는 바가 아니라 알면서도 그럽니다. 뭔가 잘못 됐습니다. 선행을 다시 배워야합니다. 정의를 다시 배워야 합니다.

[넬러(G. F. Kneller)]라고 하는 사람이 인간의 지식을 몇 가지로 말합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첫째가 계시적 지식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영감으로 아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양심에 비춰 주시는 본질적인 지식이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성적 지식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합리적으로 이해할 줄 아는 그런 지식이 있고, 또 하나는 경험적 지식이 있습니다. 많은 경험 속에서 부딪히면서 알게 되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감상적 지식입니다. 느낌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지식이 있는데 그것은 권위적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지금은 납득하지를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그분을 믿고 존경하기에 따르는 가운데 알게 되는 일들이 내 지식이 되는 겁니다. 내가 존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말할 때에는 그를 믿기에 그 말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새롭게 이루어지는 지식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를 존경합니까? 누구를 신뢰하고 있습니까? 그 분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분이 무엇을 받으시겠다고 하십니까? 하나님을 존경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나보다 더 훨씬 신앙생활 잘 하는 성도들을 존경하고 신뢰하면서 순종하고 따라 보십시오. 여기서 새로운 지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때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질 것입니다. 그리할 때 신앙의 총체적 위기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자꾸 알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운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제대로 된 것을 배우고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배우고 안 것을 가지고 제대로 써먹어야만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믿음에 잘 적용하셔서 승리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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