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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 아버지의 기쁨이다 (눅 1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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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 아버지의 기쁨이다 (눅 15:1-32)
 

오늘은 공동의회로 모이는 날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한 해를 계획하면서 더욱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기를 힘쓰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를 통해 여러분과 제가 어떻게 새해에 주님의 나라를 위해 일할 것인가 하는 목표를 정하고 함께 동역하기를 원합니다.
  
지난 몇 주 동안 계속 누가복음을 강론하면서 말씀을 드렸듯이 누가복음은 1장 서두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기록했습니다. 그럼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을 누가복음은 어떻게 기록을 했는가? 그것을 한 구절로 바꾸어 말한다면 누가복음 24:26절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이루었는가를 25-27절을 함께 보시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은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 모든 성경에 쓴 바를 이루심을 누가는 기록했습니다. 
  
26절에 말하는 바와 같이 ‘자기 영광에 들어가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들어가셨다’는 표현은 구약의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연상해서 쓴 말입니다. 곧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루어진 사실은 주님께서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심인데, 그 들어가심은 대제사장으로 하늘성소에 나아가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이처럼 대제사장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사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하늘 성소에 올라가시는 길에 대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이 길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0:19-20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그의 육체니라.”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라고 말함으로 구약의 성소에 나아갔던 것을 연상하며 새 구원의 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 대제사장을 좇아 이 길로 하늘 성소에 들어가 구원의 생명을 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승천하여 올라가는 길을 따르는 제자로써의 삶이 주제요, 강조점입니다. 
  
대통령의 측근이 청와대로 들어가 대통령과 독대하여 서로 교제를 하게 되면 그 측근은 생명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생명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청와대 앞에 갔는데 경비원이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그는 전혀 대통령과 함께 하는 생명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사 승천하여 하늘 성소에 올라가는 길로 나아가신 그 길을 제자들이 쫓아갈 때 곧 그들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자기 영광에 들어가심을 말함으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을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누가복음은 이 길에 대하여 먼저 예수님이 친히 성령으로 행하시며 가르치셨다고 전반부에 말합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 길을 따라 사도들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명령하는 부분이 후반부입니다. 즉 주님이 가르치신 길을 따라 제자들도 행해야 하며 그것이 곧 하늘 성소에 올라가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요,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그 길을 따라오라고 명령하셨습니까? 그냥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니까 자기 마음에 의지와 결단을 갖고 행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길을 따름에 대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길로 설명합니다. 누가복음 9:51절에 예수님께서 올라가십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다른 복음서와 달리 누가복음은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곧 이것이 누가복음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따라가야 하는가? 그 원리가 9:62절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뒤를 돌아본다고 했는데 그럼 뒤는 도대체 어디인가? 그것은 앞에서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했는데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즉 이 세상에는 머물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죽은 부친을 장사하고 따르겠다고 하였을 때 주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라고 하셨고, 먼저 가족을 작별하고 따르겠다고 한 사람에게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전체적으로 승천하시는 주님을 따르려면 이 세상 질서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늘 성소에 들어가시는 주님을 따르려면 땅의 성소에 들어가는 삶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교회 안에는 자기 가족, 자기 일을 먼저 돌아보는 것이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들어와 있어요. 마가복음을 강론할 때도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부자청년과 베드로와의 대조를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주님을 따른다고 고백했습니까? 집과 재산, 모든 가족 관계를 버리고 주를 따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 가운데는 기관의 임원이 되었으면서도, 심지어 예배위원으로 정해져 있는데도 자기 일이 생겨버리면 아무렇지 않게 주의 일을 놓아버리고 자기 일로 달려갑니다. 이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누가 이런 가르침을 끌고 들어왔는지 정말 모를 일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따르려면 무엇을 가장 중요시해야 합니까? 주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군대에서도 신하로써 가장 중요한 일은 왕의 명령을 잘 새기고 따라가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기에 앞서서, 어떤 열심을 나타내기에 앞서서 먼저 왕의 명령을 중시해야 하고 그 명령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명령이요 가르침인 줄 알겠습니까? 그건 바리새인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됩니다. 바리새인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자기 소유가 넉넉한 데 구원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마치 부자가 곳간을 확장하여 거둔 곡식을 가득 채워 넣고 ‘내 영혼아 평안해라.’라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의 가르침은 땅의 성소에 나아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 대제사장을 따라 나아가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얻은 축복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을 따르는 백성은 승천하시는 주님을 좇아 하늘 성소에 올라가야 합니다. 
  
이러한 주님을 따라 하늘 성소에 올라가는 가르침을 예루살렘이 거절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당국자들이 이런 가르침을 따라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옛 백성 이스라엘이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주님이 이루셔서 세우시는 주님의 나라에는 누가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까? 큰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을 초청하였지만 그들은 자기 일로 인하여 참여하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럼 누구를 초청합니까? 가난한 자들과 몸이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옵니다. 바로 이들이 하나님 나라 잔치에 앉아 떡을 먹는 자들입니다. 곧 이방인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제 약한 자들,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이 주님의 나라 잔치에 들어옵니다. 예루살렘 당국자들은 이 잔치에 들어오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땅의 일에 바뻤습니다. 바로 이렇게 주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자들을 위하여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야 했습니다. 
  
여기까지 길게 누가복음의 흐름을 말씀드린 이유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가지의 비유를 이제까지 너무 잘못 해석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만 해도 어떻게 개인이 타락한 죄에서 자기 고백을 통해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구원을 얻는 것인가 하는 관점으로 가르쳐졌습니다. 과연 이 세 가지 비유가 그런 개인 구원을 위한 가르침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주님이 세우시는 나라에는 이런 이방인들처럼 약한 자와 가난한 자들이 들어옵니다. 이들을 위하여 제자들은 어떻게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까? 바로 그 일을 누가복음 14:25-35절까지 말한 다음에 비로서 세 가지 비유가 15장에 나옵니다. 
  
그 제자도에 대하여 15장의 세 가지 비유 앞에 반복하여 말합니다.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표현을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큰 제자됨의 원리는 14:25-27절에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도 역시 마가복음의 원리와 같습니다. 
  
그런 다음에 갑자기 망대를 세우고 준공하는 문제,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전쟁을 벌이는 문제를 말하고는 다시 ‘능히 제자가 되지 못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능히 제자로써 자기 친족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함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무렇게나, 그저 맹목적인 열심을 갖고 향방없이 십자가를 지고 쫓아가면 됩니까? 아닙니다. 능히 제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계산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망대를 세우려면 예산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계산할 수 있어야 하고, 전쟁을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만약 전쟁에 이길 수가 없다면 먼저 화친을 청하는 것이 정당한 계산입니다. 
  
그럼 이 말씀이 무슨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능히 제자가 되는 자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친족과 재산과 땅에 속한 모든 소유를 버리고 쫓아간다 하더라도 지혜를 갖고 쫓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능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세상 사는 요령을 말하는 지혜가 아닙니다. 바로 그 지혜가 무엇인지 오늘 본문 15장의 세 가지 비유를 통해 말해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세 가지 비유는 무얼 말합니까? 우선 세 가지 비유에 직접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15장 1-2절을 매우 중요시해야 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로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말 때문에 이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1-2절을 놓치면 전체 비유를 다 놓치는 셈이 됩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심을 비방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말 때문에 세 가지 비유를 연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탕자의 비유를 보자면 첫째 아들이 불평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나는 머슴같이 충복으로 일했는데 왜 자신에게는 한 번도 제대로 잔치를 해주지 않고 모든 상속분을 창녀와 함께 날려버린 동생을 위해서 큰 잔치를 벌이는가 불평합니다. 이런 것이 꼭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 탕자의 비유는 로마서 9장-11장에 나오는 바울 사도의 골육이요 친척인 유대인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과 거의 같습니다.
  
세 가지 비유는 서로 독립적으로 보면 안됩니다. 이 세 가지 비유는 연속적이며 강조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의 두 가지 비유에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이란 말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비유 모두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비유는 나름대로 발전이 있습니다. 먼저 짐승을 찾았고, 돈을 찾았으며 마지막에 아들을 찾았습니다. 그럼 이 세 가지 찾은 것 중에 어느 것이 가장 기쁘겠습니까? 당연히 아들을 찾은 기쁨이 가장 클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세 가지 비유 중에 탕자의 비유가 가장 길고 내용이 많습니다. 그런 걸 보아서도 탕자의 비유가 제일 중요합니다. 
  
또 양을 찾았을 때는 하늘에서 기뻐한다고 하고, 드라크마를 찾았을 때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된다고 하며, 탕자가 돌아왔을 때는 아버지가 기뻐합니다. 하늘 보다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더 가깝고 현미경으로 보는 것 같고, 하나님의 사자들 앞 보다는 아버지의 기쁨이라고 하면 훨씬 직접적이고 더 가까운 모습으로 보입니다. 하늘에서 기쁨이 되면 무척 먼 거리인 것처럼 느껴지고, 하나님의 사자들 앞이라면 임금이 계시는 편전 앞이라고 느껴지는데, 아버지의 기쁨이라고 하면 왕의 직접 기뻐하는 모습으로 느껴집니다. 어느 것이 더 실감나고 가장 가까운 기쁨이겠습니까? 
  
이렇게 세 가지 비유는 점층법을 그 안에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비유의 결론은 탕자의 비유에 있습니다. 그 잔치를 벌이는 모습도 앞의 두 비유보다 마지막 비유가 훨씬 자세히 풍성하게 기록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가락지를 끼우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풍악과 춤추는 소리까지 묘사합니다. 그렇게 해서 가장 큰 기쁨임을 나타냅니다.
  
이제 이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누가복음이 말하려고 하는 의미가 분명히 보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떡 잔치에 예루살렘은 거절하고 가난한 자들이 참여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능히 제자가 되어 친족을 미워하며 따릅니다. 이 제자들에게는 무언가 계산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 지혜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기쁨이 무엇인가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여 돌아오는 기쁨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아들을 맞이한 기쁨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서에서는 성령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것을 통달하게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세상의 지혜를 자랑하는 고린도교인들에게 성령의 지혜, 곧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아는 지혜를 말한 것입니다.
  
어찌 신하가 왕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일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자로써 주님을 따른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심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주님을 비방하고 수군거렸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세리와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아버지의 기쁨을 위하여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여기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말하는 기쁨은 단순히 잃은 것을 되찾았으니 손해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채워져 손해가 없이 제로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양 한 마리 찾은 후에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이려면 양 한 마리 값 이상 들어갈 것입니다. 드라크마는 하루 노동자의 품삯인데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함께 먹고 즐거워하려면 아마 일주일 품삯은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수입과 지출면에서 손해가 없어서 기쁨이 아니라, 더 손해가 나더라도 잃은 것을 찾은 기쁨이 그만큼 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잃은 아들을 다시 찾았을 때는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돼지 쥐엄 열매를 먹었던 탕자보다 여러분과 저는 더 비참한 생활을 하였던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상의 제물 앞에 앉아 먹고 마셨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상 앞에 절하며 우상의 상에 앉아 먹고 마시며 이게 구원이요 축복을 얻는 비결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의 기쁨에 취하여 모든 것을 탕진한 탕자처럼 창녀에 취하여 살아왔습니다.
  
‘우리에게 이루어진 사실’을 기록하여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심을 말하는 누가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승천하여 하늘 성소에 오르심을 말하려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의 일은 모두 아버지의 기쁨을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들로써 죄인 한 사람 회개하여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 기쁨을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드리셨습니다. 그게 우리의 구원이 되었습니다. 
  
이 탕자의 비유는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에서 나오는 지극히 작은 자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 보다 뒤에 나오는 삭개오도 죄인이요, 세리였습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회개하고 돌아오는 기쁨이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철이 들었는가, 철이 들지 않았는가를 어떻게 구분합니까?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알 때 철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부모의 기쁨이 무엇이며, 부모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자가 철이 든 자식입니다. 하지만 오로지 자기 기쁨만을 위하여, 자기 욕심만을 채우기 위하여 산다면 아직 철이 들어 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어떻게 행해야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옛 백성 이스라엘은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으로 살았지만, 이제 새 백성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아버지를 섬기는 것으로 삽니다. 그랬을 때 우리들은 구원역사에서 장성한 아들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여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새 해를 맞이하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내가 천당갈 수 있는 자격이나 입장권을 받은 기쁨으로 살지 말고, 나로 아버지 품에 거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기쁨을 위하여 사는 삶이 참 신자의 삶인 것을 알고 아버지 앞에 자신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능히 제자가 되어 자기 친족에게 매이지 말고 하늘 성소에 나아가신 대제사장을 따라가는 삶이 우리의 구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 한 사람 회개하여 돌아오는 것이 아버지의 가장 큰 기쁨이신데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열납되는 것도, 향기로운 제사가 되는 것도 바로 이 기쁨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한 해 이 기쁨을 위하여 여러분과 제가 힘을 다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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