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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복 (시 12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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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복 (시 128:1-6)

 
복을 선언할 때 더 행복해집니다

한국 심리학회에서 2010년 한국인 행복지수를 조사해 발표를 했습니다. 신문에는 간단하게 이렇게 쓰여 졌습니다. “한국경제는 10위권,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50위권” 대비적인 표현이었습니다. OECD국가의 평균은 100점 만점에 71.25점이었고, 세계평균은 64.06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얼마일까요? 세계평균보다 못한 63.22점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게 산다는 덴마크는 80점이 넘었습니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경제발전에 걸 맞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어제 하루가 즐거웠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은 미국인 86%, 아프리카 짐바브웨인은 68%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거기에 못 미치는 64%만이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하루에 무엇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대답했을까요?

한국인들은 먹을 때와 말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행복은 성별과 나이에 따라서도 달라졌습니다. 가장 행복감을 못 느끼는 세대는 40대의 한국 남자들이었습니다. 삶의 흥미를 쉽게 느끼지 못하고, 위기감에 빠져있고, 경제적인 책임과 일의 과다 업무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세대였습니다. 

이런 한국인 40대 남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인은 정서 표현에 인색하다. 한국 남자들은 감정을 표현하지 않도록 사회화되어 있다. 슬퍼도 울지 않고, 기뻐도 웃지 않는 남자가 진짜 남자라고 배운다.” 한국의 남성들이 자신의 행복감을 표현하는데 뒤떨어지는 것은 이러한 문화적인 영향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인 중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조사 결과 40대 여성들이었습니다. 친구와 만나 삶의 여유를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동안 가사 일에 얽매여있었는데 이제는 육아의 구속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정서, 그리고 마음에 있는 행복감을 표현하라.”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의 행복지수는 얼마정도 될까요? 덴마크인이 80점이 넘는다는데 우리는 행복지수는 그것보다 커야 되지 않을까요? 그래도 우리는 한국 사람이기에 행복의 정서가 비슷할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행복을 저울질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는 끊임없이 말합니다. “기뻐하라! 감사하라!” 이것이 행복지수가 높아지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본문의 시인은 매일의 삶 속에서 복을 느끼고 있다고 하면서 감사함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1절에 복이 있도다, 2절에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4절에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5절에 네게 복을 주실 지어다 라고 말합니다. 이 시인은 행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복을 얻는다고 수동적으로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행복을 느끼는 자는 나 자신이지만, 이 행복을 주는 주체는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일까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행복의 원천이십니다. 시인은 그분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면 우리가 행복해지고 복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128편에 나타난 행복한 사람은 무엇이 복되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요? 첫 번째 행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하는 것과 먹는 행복입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시편 128:2)

여기 보면 네가 수고한 대로 노동의 복을 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수 있는 복이 네게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것은 기독교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땀 흘리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공짜로 놀면서 먹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일하고 수고하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요 내용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노동과 일을 두 가지의 모습으로 가르쳐줍니다. 하나는 노동과 일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시고 그를 에덴동산으로 이끌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첫 인간에게 하신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덴동산을 기경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을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제일 먼저 수고하고 일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일하는 것이 축복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시느라 하나님께서 노동하셨으니, 너도 이 땅에서 수고하고 일하고 땀 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한 결과물에 대해서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신 것처럼 너도 수고하고 땀 흘려 만든 작품들을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일을 소중히 여깁니다. 일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은 게으름의 표시요 죄악의 표시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면서 이 일은 괴로운 노동으로 바꼈습니다. 축복받은 노동이 내게 거리끼는 괴로운 짐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다시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자, 외로운 자, 소외된 자들을 만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을 못 마땅히 여긴 종교인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묻습니다. “당신은 왜 그런 일을 하는가?”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한복음 5:17)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일, 회복의 일, 치유의 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요의 일을 감당하시면서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두운 그림자로 꽉 막혀있는 일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꿔야 합니다. 

좋아하면서 가치 있는 일을 하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가? 내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는가? 입니다. 이 마음이 없으면 그 일은 고통이 되고 짐이 됩니다. 우리는 내가 즐겁고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이라고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일이 이웃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일인가? 공동체를 살리는 일인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 를 확인하면서 해나가야 합니다. 아무리 신나고 흥이 나는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남에게 해악이 되는 일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내가 기뻐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당장 멈춰서야 하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열악한 농어촌에서 보건사역을 감당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억지로 하고, 지겨워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하게 되면 자신도 손해요, 진료 받는 환자도 손해입니다. 그것은 결코 도움이 안 됩니다. 보람 있는 일인데 기쁨이 사라지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은 좋은 일을 하고 계십니까? 귀한 일을 하고 계십니까?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열심히 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일에 몰두해야 하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자원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 일이 축복받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일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속에 가치관이 들어있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가치관을 집어넣어야 합니다. 이 일 속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치관이 있는가? 이 일을 통해서 남이 살아나는 것이 무엇을 있는가? 그것을 발견한다면 그 일은 내가 기뻐하는 일인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축복받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늘 함께 가야합니다. 하나라도 빠지면 문제가 생깁니다. 즐거워하면서 보람 있는 일을 해야 그 일이 살아 있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먹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일하면서 먹는 축복을 말씀합니다. 먹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좋은 복입니까?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이 마지막 신음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먹고 싶은 것이 없습니다. 이제 먹을 힘도 없습니다.” 어떤 환자는 마지막 죽음 앞에서 이렇게 호소를 합니다. “나는 정말 먹기 싫다고 하는데 자꾸만 먹으라고 할 때마다 정말 싫습니다. 내가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이해해 주려고 하지를 않아요.” 

여러분,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들은 그렇게 맛있게 먹던 음식을 보아도 감흥이 생기지 않습니다. 식욕이 떨어집니다. 입맛을 잃어버립니다. 눈앞에 산해진미가 가득 있어도 먹고 싶은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식욕이 있습니까? 먹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먹기만을 탐하면 안 되겠습니다만 먹는 것을 즐거워할 줄 알아야 살아있는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먹는 즐거움,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커다란 즐거움입니다. 건강할 때 먹고 싶은 것을 우리가 먹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과식하거나 과음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또한 반찬이 별로 없을 때에도 내 앞에 놓여 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은 최고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음식을 앞에다 놓고 타박해서는 안 됩니다. 음식 그 자체를 즐거워하는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을 모두 걷어차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두 번째 행복이 있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그것은 가정의 행복입니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시편 128:3) 

행복심리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에드 디너라는 일리노이대 심리학교수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했던 인터뷰 내용 첫머리에 이런 글귀가 있었습니다. 행복의 지침을 말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첫 번째로 좋은 친구나 가족 등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합니다. 이는 친밀하고 애정 어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중요한 것입니다.” 가족과 함께 있는 것, 대화하는 것, 밥을 먹고 식탁 교제를 하는 것, 이것이 최고의 행복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결혼을 하셨습니까? 결혼해서 가정을 꾸미셨습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결혼을 해서 아내를 얻고 남편을 얻은 그 자체가 복되다고 하나님 앞에서 소리쳐야 합니다. 인생을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남자 홀로 만드시고서는 “보기 싫구나.” 하셨습니다. 만약 여자만 만들었어도 똑같이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보기가 좋구나!”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만드신 공동체가 부부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부를 서로 사랑하고 사랑 받고, 위로하고 위로받는 축복의 공동체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래 뜻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사명을 받으면 독신으로 살수도 있습니다. 가정이 소중하긴 하지만 가정을 꾸미기 위해서 억지로 결혼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합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드리면 “목사님 조금 더 일찍 말씀하시지.. 이미 늦었어요.” 라며 낙심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모님이 자꾸 가라가라 그래서 강제로 결혼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너 이제 나이가 찼다. 이제 더 있으면 결혼 못하겠다.” 그래서 마지못해 결혼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못해 결혼했어도 사랑을 연습해야 합니다. 사랑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의지와 감정이 함께 묶여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연습을 해야 합니다. 사랑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아내가 예쁘고 귀한 것입니다. 그래야 내 남편이 멋지고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가정의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복을 누려야 합니다. 한 사람과 오래 산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지겨워질 때도 있고 짜증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이 사람과 왜 이렇게 오래 살았는가 후회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큰 충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함께 있었던 그 사람이 갑자기 내 눈 앞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 애쓰고 헌신한 내 아내를 소중히 여기셔야 합니다. 가족을 먹이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구슬땀 흘리면서 수고하는 남편을 소중히 여기셔야 합니다. 가정의 축복, 가정의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또한 본문에서는 자녀들의 복도 함께 말합니다.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셨습니까? 자녀들이 마음에 안 들고 내 말을 잘 안 들으면 우리들은 세속적인 말로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뼈가 빠지게 일하고 고생했는지 아느냐?” 섭섭하고 서운한 마음에 자녀들을 향해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되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자녀를 통해서 빼앗긴 세월과 에너지보다 그들을 통해서 받은 기쁨, 감사, 용기, 격려가 수백 배는 더 크지 않습니까? 

저는 대학생 아들을 잃어버린 한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학생 아들이 갑자기 사고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때 딸만 있었던 친구가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친구야, 아들은 없었던 것으로 해. 나는 딸만 있어도 여러 가지 위로를 받고 행복하다.” 그러자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아들과 함께 했던 20년 동안의 세월들을 네가 알아? 난 그 행복을 갖고 있었어!” 

내 옆에 아들과 딸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네가 있어 고맙다. 너 때문에 내가 받은 삶의 기쁨과 감사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이 시인은 그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가 옆에 있다면 축복해주십시오. 그것이 부모들의 복입니다. 그것이 부모들의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행복의 기쁨을 나누십시오

세 번째 행복을 말합니다. 이제는 개인의 복과 가정의 복에서 공동체의 축복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시편 128:5~6) 

불평이 전염성이 있는 것처럼 행복도 전염성이 있습니다. 내가 기뻐하면 상대방도 기뻐합니다. 내가 감사하면 상대방도 감사합니다. 내가 행복하면 상대방도 행복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행복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축복의 역사입니다. 어느 누가 이런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이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 128:1) 

시인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축복을 헤아려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먹게 하셨군요. 하나님께서 내게 식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사랑하는 가족을 주셨군요. 하나님께서 내게 축복받은 공동체를 주셨군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것이 행복의 시작이요 행복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행복과 축복을 가족들과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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