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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기다림과 평안 (눅 2: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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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과 평안 (눅 2:25-33)  

  
예배에 나오신 모든 성도님들께 이 복된 계절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우리가 지금 맞이하는 이 계절은 주의 성탄을 기다리는 강림주간이라 부릅니다. 
이 강림주간의 주제는 기다림과 평안입니다. 

이 기다림을 더욱 잘 새기기 위해서 서양의 교회들은 촛불을 다섯 개 준비하는 예가 있습니다. 가운데 커다란 흰 초를 두고 네 개의 보라색 초를 준비해서 성탄절 4주일 전부터 하나씩 하나씩 켜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탄의 기쁨을 미리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이 가운데 붙이는 초 외에 마지막 초를 붙이는 그런 주일이 됩니다. 

성탄의 메시지는 하나님께는 영광이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오는 메시지인데 이 평강을 우리들이 기다립니다. 우리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성경의 많은 사람들이 이 기다림을 오래도록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아마도 나이가 많이 든 남자 성도인 시므온과 그리고 결혼 7년 후에 남편을 잃고 84년이나 성전에서 주의 오심을 기다렸다는 안나, 두 사람의 기다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들은 정말 삶 내내 주의 오심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성탄절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통 받는 크리스마스-카드에는 동방박사의 그림이든지 아니면 아기예수를 놓고 경배하는 목자의 그림은 있어도 이 두 사람 시몬과 안나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기다림과 그들이 받아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 평안은 성탄절의 가장 중요한 주제일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이 두 분의 삶과 그들의 기다림과 그들의 평안을 돌아보는 가운데 이 계절에 우리가 진정 기다려야 할 기다림이 무엇이고 또 주님께서 그 기다림에 채워주시는 평안이 무엇인지를 함께 맛보기를 원합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기다렸던 것은 ‘이스라엘의 위로라’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늘날도 그렇게 편안한 백성이 아닙니다. 또 예수님 당시에도 로마치하에 있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나라가 없이 유랑생활을 하면서 무한한 박해, 그리고 대대적인 민족의 죽음을 맛보았던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 민족을 택하셔서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오고 오는 세대의 기다림에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때 물론 이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아들 이삭, 야곱, 요셉 이 약속을 받지 못합니다. 모세 때에 가서야 비로소 400년 동안이나 종 생활하던 애굽에서 출애굽을 해서 가나안에 들어오지만 그 이후의 삶 역시 평안하지는 않습니다. 민족이 하나님 앞에 반역하고 우상숭배를 거듭하다가 바벨론에 패해서 포로로 70년 동안 잡혀갑니다. 그리고 70년 후에 돌아온 그 땅은 폐허였습니다. 성전도 불타고 그리고 다윗 왕궁도 허물어진 그 폐허위에서 구약성경은 끝납니다. 

그리고 400년 동안 선지자가 없는 하나님의 침묵의 시기를 맞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잘 아는 사람은 구약성경을 읽으면 이 이야기는 도대체 어떻게 끝나는가,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를 궁금해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긴 기다림, 그 지루한 기다림 끝에 오늘 우리는 그 기다림을 이어가는 시므온과 안나 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시작하는 <25절>에 우리 성경엔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고 멋쩍게 시작하지만 원문 성경엔 ‘보라 예루살렘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시므온이라’ 사실 시몬이라는 이름은 굉장히 흔한 이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베드로도 이름이 원래 시몬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신약성경에도 시몬이라는 사람이 여럿 나와요. 

‘안나’라는 이름 역시 굉장히 흔한 이름입니다. 당시에 오랫동안 이 메시야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가진 민족이라 당대엔 굉장한 종교인들이 많았어요. 

바리새인도 있었고 사두개인도 있었고 헤롯도 있었고 그 누구도 진정으로 이 기다림의 후계가 되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직 이 경건하고 의로웠다는 시몬과 그리고 평생을 성전을 떠나지 않으며 금식하며 이 소망을 기다린 안나가 마지막에 약속을 따라서 메시야가 오셨을 때 그를 품에 안고 감사하고 평안을 누리는 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교회에 모든 성도님들, 특별히 같이 예배드리는 모든 형제자매님들이 바로 이 축복의 주인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기다림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지요?안 그러세요? 
컴퓨터를 켜놓고 이놈이 빨리 들어와야 되는데 그거 참 죽을 맛이죠. 컴퓨터 안 되는 것 안 써보셨군요. 아주 초조하게 기다립니다. 제가 산본에 사는데 누군가의 얘기에 의하면 산본의 이마트가 전국의 이마트 중에 제일 잘 된답니다. 그건 왜 그러냐면 산본에는 쇼핑할 수 있는 데가 딱 한 군데밖에 없어요. 

분당은 쇼핑 천국 아닙니까? 그래서 무얼 사러 가면 정말 줄이 길어요. 차를 가지고 가면 적어도 주말 같은 때는 10분~15분 안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나올 때 역시 간단치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좀 멀지만 걸어가는데요, 가서 많이 살 것도 없고 어떤 때는 우유 한 팩 사가지고 나올 때가 있는데 그걸 가지고 나와서 줄을 5분, 10분 서려면 정말 짜증스러워요. 

이렇게 뒤를 돌아보면 나만 짜증스러운 게 아니더라고요. 다 짜증스러워요. 그래서 더 못 견디겠는 거는 제가 서 있는 줄에 무슨 문제가 생겨서 옆줄이 쭉쭉 갑니다. 그것처럼 속 터지는 게 없어요. 웃으시니까 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누가 그런 사소한 기다림이라도 기다리는 것을 좋아합니까? 우리 삶속에 많은 기다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정작 우리가 그 기다림의 줄에 서있으면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심리를 잘 이용해서 물건 파는 사람들이 선전을 잘 하는 것 같아요. 

수년전에 이 스포츠 용품을 만들어서 파는 나이키라는 회사가 광고할 때 ‘그냥 해버려.’라는 문구를 창안해냈어요. 영어로는 ‘Just do it.’인데요 ‘그냥 해버려.’ 
그냥 해버려 라고 말만 하는 게 아니에요. 
그전에 빠른 영상을 보여주다가 끝에는 대개 다이빙 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뒤에서 ‘Just do it.’ 이렇게 해요. 
대개 가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이것저것 고르잖아요. 그러지 말고 그냥 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속아서 삽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그런 분이 없으시기를 원합니다마는 기다리는 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고 오늘날의 삶의 형태예요. 

그런데 돌아보면 삶에 정말 가치 있는 것, 중요한 것, 그것이 어디 기다리지 않고 되는 것이 하나나 있습니까? 우리가 매끼 밥을 해 먹습니다만 그 밥도 기다리지 않으면 안돼요. 
제가 그 밥 꽤 잘 합니다. 제 아내가 어딜 가서 제가 밥을 해야 되면 밥에 불을 켜서 놓고 압력밥솥이 되어서 이렇게 흔들리면 그러면 뭘 해야 되는 지 제가 잘 알아요. 
기다려요. 불을 끄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김이 다 빠져도 조금 더 기다렸다가 빨리 열어서 휘 저어서 다시 또 덮어요. 그렇게 안 하면 혼나거든요. 밥 한 끼도 그렇구요 여러분들 삶속에 많은 기다림이 있잖아요.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려서 결혼을 한다 칩시다. 그게 행복의 시작은 아니에요. 평생을 기다리면서 정말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하길 배워야 그 가정이 제대로 되는 겁니다. 
자녀를 낳았습니다. 자녀가 정말 품안에 있을 때부터 시작해서 자기발로 걸어서 자기인생을 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다림이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돌봄이 있어야 합니까? 
얼마나 많은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그 아이가 제대로 됩니까? 
삶에는 많은 기다림이 있고 진정 가치 있고 우리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삶속에서도 많은 기다림 끝에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다림의 시즌이야말로 어떤 면에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기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기다리게 하셨는지 사실 몰라요. 예측컨대 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많은 이들이 구원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매 수천 년이 지났는지 몰라요. 그러나 때가 되매 그 약속대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래서 이 기다림의 모든 내용은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디 이 기다림의 계절에 인생의 모든 필요와 궁극적인 행복을 채워주실 수 있는 예수그리스도를 기다리되 이 기다림이 복된 기다림인 것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저도 많은 기다림을 학기가 시작하면 학기 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는데요, 특별히 글을 쓸 때 기다림이라는 것이 참으로 고통스러운 기다림이에요. 
강의를 하니까 강의안을 쓰고 또 설교를 하려면 설교도 써야 돼요. 
특히 논문을 쓰려면 많이 기다려야 돼요. 논문을 쓰는 것은 저죠. 설교를 쓰는 것도 접니다. 사실 이 설교 굉장히 힘들었어요. 교회가 지금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 있기 때문에 첫 주일에 설교를 한다는 것이 굉장히 부담스러운 거예요. 떨치기 어려운 부담이었습니다. 

오늘 1부 예배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준비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글을 쓰지만 속을 끓일 대로 다 끓이고 정말 포기직전에 갔을 때 대부분 하나님께서 할 말씀을 주세요. 
논문도 대개 그렇습니다. 좋게 쓴 글은 정말 가치 있게 제가 돌이켜봐도 그래도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글 한 줄 번뜩 생각나서 나오는 게 쓰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속에 많은 기다림이 있는데 그 기다림이 정말 가치 있는 기다림이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사는 인생이 되는데 이 계절에 정말 내가 바랄 것을 바라고 기다릴 것을 기다리고 있는지 한 번 다시 되돌아볼 수 있는 귀한 계절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한 2주일 전에 제 아내가 저보고 성탄절 선물을 뭘 해주면 좋겠느냐 그렇게 묻더라고요. 
여러분들 다 그런 얘기 들으면 분위기 썰렁하죠? 
이 나이 들어서 무슨 어린애냐? 성탄절 선물 챙겨주게. 이런 심사가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것도 필요없다고 그랬습니다.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래놓고 속으로 ‘당신도 아무것도 받을 생각 하지마라’ 

사실 물어보고 싶었던 생각도 없었고요 해줄 생각은 더욱 없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다음에 슬슬 마음속이 굉장히 서늘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이가 50초반이니 앞으로 살날이 많은데-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살날이 많은데 벌써부터 인생 다 산 것처럼 바랄 것도 없고 이 좋은 복된 계절에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뭐 해 줄 생각도 없고 이렇게 살아가지고는 안되겠다. 언제부터 내가 이랬지? 스스로 썰렁한 거예요. 스스로 좀 놀랬어요. 

그래서 제가 작심하고 며칠 전에 “나갑시다.” 방학하는 날 조금 여유가 생겨서 나갔습니다. 
뭘 사준다고. 
그래서 나갔어요. 가서 열심히 두 시간 세 시간 맴돌다가 아무것도 못 샀습니다. 결국에 끝에 포인세치아를 하나 샀어요. 2,500원짜리를 샀습니다. 사가지고 들고 들어와서 식탁위에 놓고 이번 성탄절에 한 건 했다. 이것을 가지고 자꾸만 생색을 내는 거예요. 
“이쁘지? 이게 있으니까 정말 성탄절 기분 나지 않느냐?” 그렇게라도 해야 쓸쓸하기 쉬운 계절에 그래도 삶속에 화기애애함이 있게 되는 겁니다. 오늘 돌아가셔서 여러분들의 삶을 한 번 돌아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성탄의 계절, 특별히 강림계절은 정말 어떤 면에 내 삶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좋은 시기예요. 하나님께서 그토록 오래 기다리게 하신 것은 인생의 역사, 세계의 역사, 구원의 역사, 오직 주님께서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이시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우리 삶은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내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글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내가 열심히 하지만 끝에 가서 보면 글이 글을 쓰고 또 그 뒤에 하나님께서 깨우치심이 있지 않으면 우리 인생의 수고는 헛된 것입니다. 그렇게 애타게 사는 삶이 정말 기다릴 것을 기다렸다하는 확신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시므온과 안나가 복되었던 것은 그들의 삶이 자기들의 바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바라도록 한 것을 기다리고 마침내 그 기다림이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심에 의해 이루어질 때 그들에게 진정한 평안이 온 줄로 압니다. 

우리가 다 이 평안에 그리고 이 기다림에 동참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우리는 사실 이 평안을 압니다. 여러분이 알고 제가 알아요. 처음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해서 우리가 받아들일 때 그 기쁨이 바로 안나와 시므온이 예수그리스도를 안았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삶속에 이 감격과 이 기다림과 이 평안이 있는지를 다시 돌아보는 귀한 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다림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평안으로 이어져야 행복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기다림이 있지만 기다림 가운데 기다리다가 지치는 기다림도 있고요,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다 허망해지는 것도 있고 정작 기다리는 것을 얻었지만 그것이 그렇게 평안함을 주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꽤 오래전에 본 연극가운데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이 있어요. 꽤 유명한 연극입니다. 사무엘 베케트라는 사람이 쓴 연극인데 이 연극은 좀 특이해요. 무대가 열리고 조명이 들어오면 뒤에 세트도 보이고 그래야 되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한 구석에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하나 있을 뿐이고 그리고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내내 알지 못하는 얘기를 주고받는 것이 이 연극은 거의 다예요. 

후반부에 다른 두 사람이 더 등장하는데 얘기가 더 복잡해질 뿐 한걸음도 나아가질 못해요.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사람들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뭐냐 하면 고도라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해석하는 사람은 고도가 아니라 ‘God’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는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 연극의 끝은 정말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래서 그만두고 가자하는데 갈 데도 없어요. 가지도 못합니다. 얘기가 그렇게 허무맹랑하게 끝나요. 
우리의 삶속에 그런 허무한 기다림이 없는 것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 무엇을 따라서 산다고 하지만 결국엔 무엇을 기다리는지, 이것을 위해서 무얼 해야 되는지 모르는 삶 가운데 의미 없는 대화들만 오가는 이런 삶이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 삶속에 얼마나 많은 기다림이 있지만 무엇을 여러분들이 얻으시면 정말 삶이 평안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이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이 평안은 ‘샬롬’입니다. 히브리말로. 삶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그리고 그 안에 무엇보다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히브리사람들의 샬롬이예요. 

여러분들은 평안이 있으십니까? 
여러분들의 삶속에 평안이 있으십니까? 
군대에 가서 훈련을 받으면 얼마나 불안해요. 처음에는. 그래서 뭔가 누가 이야기를 할 때는 부동자세로 서 있잖아요. 어떤 때는 10분, 20분 심지어는 그보다 더 길 때도 있어요. 그러다가 제일 기쁜 얘기는 무엇이냐면 ‘열중쉬어’를 시킵니다. ‘열중쉬어’ 시키면 다리가 다 풀립니다. 그런 것이 어떤 면에서는 아주 속된 표현을 하는 평안일 거예요. 우리들 삶속에 그런 평안이 살짝 살짝 스쳐갈 때가 많아요. 

이제는 더 바랄 것도 없고 소원할 것이 없다 하고 느끼는 느낌이 잠시 잠시 있을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좀 피곤해서 돌아오고 너무너무 배가 고파서 돌아오면 집에 돌아오면 밥이 딱 있어야 하는데 밥이 제때 안 되어 있으면 손 떨리고 화나고 그러잖아요. 남자들 그렇습니다. 
기다리다가 밥을 아주 많이 먹고 어느 날 행복해요. 이제 정말 소원이 없다. 그렇습니까? 네 시간이면 또 배고파요. 삶의 많은 기다림이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는 적이 많습니다. 

우리를 정말 편안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제는 죽어도 소원이 없다는 그런 평안함. 
노인들의 입에서 이것이 나오면 정말 하나님나라에 가도 소원이 없다 그런 말로 우리들끼리 이해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정말 그렇게 편안히 가시더라고요. 제 어머님이 그러셨어요. 

제가 유학을 갔던 시절만 해도 한 번 가면 끝날 때까지 못 오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15년 동안 외국생활하면서 저희 엄마를 딱 한 번 뵈었어요. 마지막에 돌아와서 어머님을 뵈니까 어머니께서 바로 그 얘길 하셨습니다. 이제까지의 기도와 네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다시 돌아와서 서 있는 것을 감사해서 한이 없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가시더라고요. 

15년 동안 버틴 건 기도 때문에 버티신 겁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평안이 무엇인지 알고 우리의 기다림은 이제 다음주일에 크리스마스를 맞으면서 성취될 것이에요. 우리를 진정 평안히 만든 것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아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제가 텔레비전을 잘 안보고 뉴스는 더더욱 잘 안 보는데 요즘같이 시끄러울 때는 더 안 봐요. 그런데 최근에 한 일이주일 제가 열심히 안 볼 수 없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청계산을 뛰어다니는 곰돌이 때문이었습니다. 과천 동물원에 곰 한 마리가 탈출을 해서 그 뒷산인 청계산을 뛰어다녔습니다. 분당에서도 보면 앞산입니다. 이 얘기가 가면서 점점 흥미로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별로 즐겁고 재미있을 것 없는 세상에 언제 돌아오나 언제 잡히나 이게 저는 엄청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제 딸이 가지고 있던 곰이 똑같이 생겼습니다. 제가 사실은 교회에 가지고 왔는데 가지고 올라오면 사람들이 웃을까봐 안 가지고 왔어요. 5부예배때 우리 청년들한테 보여줄까 싶어요. 이게 하도 재미있는 사연이라 제가 시간나면 집도 가깝고 해서 얼굴을 보러 갈까 싶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저 같은 심정을 가졌던 사람이 또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곰 대신 곰의 심정을 길게 글로 써서 인터넷에 올렸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아주 흥미 있게 읽어봤어요. 여러분들도 보신 분이 있는 것 같아요. 왜 탈출했는지, 탈출해서 뭐했는지, 그 때 심정이 어땠는지, 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지 주욱 썼어요. 

뒷산이 너무너무 아름답고 자기 고향 같아서, 가고 싶어서 기회를 노리다가 어느 날 보니까 문이 열려서 무작정 뛰었다는 거예요. 편안했겠지요. 정말. 속박에서 벗어났으니까 우리가 흔히 평안히 놓아주시도다 하면 주님께서 간섭안하면 정말 편안할 줄 알아요. 이제는 내 마음대로다. 그래서 편안한 삶을 삽니다. 곰도 하루 이틀은 신났을 겁니다. 열심히 뛰어다녔다는 거 아닙니까. 밤에는 아무데나 쓰러져서 자고 그러다보니까 슬슬 추워지죠. 먹을 것은 없죠. 갈 곳도 없죠. 마지막에는 결국엔 이것이 덫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썼더라고요. 이것 참 공감이 돼요. 이 덫이라는 거 옛날에 그렇게 잡혔으니까 알았다는 거예요. 그러나 거기에 있는 음식, 달콤함, 그 휴식처, 알고 기어들어간 거예요. 

남의 얘기가 아닌 것 같죠?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까?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그것이 자유인 것 같이 느껴져요. 내 인생 내가 좌우하면 그것이 편안하게 모든 것이 될 것 같은 착각 속에 삽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평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이 계절이 바로 그것을 생각하는 계절입니다. 
진짜 우리 삶에 평안이 있으십니까? 

제가 이 질문 저한테 해봤어요. 외람된 얘기지만 저는 이 평안을 아는 것 같아요. 늘 누리지 못해서 아쉽습니다마는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무엇인지를 저는 압니다. 여러분들이 다 그 평안 때문에 이 자리에 계신 줄 알아요. 어려울 때일수록 또 우리를 낙심시키고 불안하게 하는 것이 많을 때일수록 이 평안가운데 있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시므온, 안나. 유명한 사람 아닙니다. 
정말 이 이야기를 빼놓고는 성경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믿음의 후예가 되어서 그 기다림의 축복을 온전히 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주전에 제가 저녁예배 설교를 했습니다. 저는 마음이 너무 갈급해서 성도들이 다 돌아갔으리라고 생각해서 끝나고 좀 기다리다 다시 올라와서 기도하는데 많은 성도들이 여기 계속 기도하고 계시더라고요. 제 마음 가운데 뜨거움을 느꼈습니다. 
여러분들 삶 가운데 평안이 없으십니까? 
오직 한 길이 있어요. 그것이 우리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시지만 끝내는 약속대로 평안함을 주시는 주님께 의탁하는 길입니다. 이 강림계절에 두 가지를 우리가 기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진정 나는 주님께서 말씀해서 약속하신 그 기다림을 삶으로 살고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평안의 맛을 알고 그 평안가운데 내 삶을 이어가면서 이 시므온이나 안나처럼 그리스도의 일을 만방에 전하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넘어서 이방의 빛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삶이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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