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무리 가운데 계신 왕 (겔 46:9-10)

첨부 1


무리 가운데 계신 왕 (겔 46:9-10)

서론

구약성경을 보면 세 종류의 성전이 나옵니다. 제1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으로 인해 B.C. 587년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파괴됩니다. 제2성전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다 돌아와서 B.C. 516년에 지은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스룹바벨 성전의 규모는 솔로몬 성전보다 작았는데 이것을 예수님 당시 헤롯대왕이 개축을 했습니다. 40년에 걸쳐 개축을 마쳤고 이 성전을 헤롯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헤롯 성전도 A.D. 70년에 로마장군 티투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제1성전과 제2성전은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성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고 결국 두 성전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제3성전은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 가운데 본 성전이며 에스겔 40장부터 47장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의 성전은 한 번도 지어진 적이 없는 환상 속의 성전입니다.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의 모든 식양과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 성전은 더 나아가 신약시대의 교회를 상징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서가 어려운 이유는 구약시대에 살았던 에스겔이 제사장의 언어를 가지고 신약시대의 교회와 예배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의 용어로 신약을 설명하다 보니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에스겔 선지자와 눈높이를 맞춰 제사장의 언어로 보게 되면 신약시대의 교회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에스겔 40장부터 42장까지는 새 성전의 비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43장부터 44장까지는 새로운 성전을 지배할 법 즉 거룩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45장부터 46장까지는 이 성전에서 이루어질 새로운 예배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마지막으로 에스겔 47장에서 48장까지는 새로운 땅의 분배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45장과 46장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에스겔 45장 1∼8절까지는 땅의 분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을 분배하되 그 중심에는 성전을 지을 땅을 꼭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살도록 하고 그 양 옆으로 왕의 땅을 주도록 했습니다. 왕은 중앙이 아니라 좌우에 있도록 한 것입니다. 왕이 성전을 보호하고 성전은 그 중앙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가 우리 성도의 삶 변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드시 우리 성도의 삶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45장 9∼17절은 예배를 위해서 정해진 예물을 반드시 드리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라 할지라도 예물 없이 드리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어떠한 예배라도 예물을 정확히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예배에는 우리 마음의 헌신 그리고 물질의 헌신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45장 18∼25절은 에스겔 성전에서 지켜질 절기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의 절기에는 일곱 가지가 있었습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 이렇게 일곱 가지인데 에스겔 성전에서는 세 가지를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첫째로 신년절은 성전을 깨끗이 하라는 의미입니다. 

둘째로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바로 왕의 노예로 있을 때에 모세가 풀어달라고 요구하자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마지막 재앙으로 천사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장자를 다 죽였는데 어린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은 넘어간 것입니다. 유월절은 바로 그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은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마귀와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장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을 방황하면서도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고 반석을 쳐서 생수를 주시므로 자신들이 무사히 가나안 땅에 도착할 수 있었음을 기억하며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도 장막절이 되면 자신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했던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집 옆에 초막을 짓고 일주일 동안 움막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예배 가운데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에스겔 46장에서는 계속해서 안식일과 월삭에 드리는 제사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안식일과 월삭에 제사 드리되 왕은 백성으로부터 제물을 거둬서 제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풍성하게 공급을 해주고 제사장들에게도 그 음식을 풍성히 주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제사장은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제사 드리는 일에만 집중하도록 왕은 백성에게 예물을 거두어 제사장이 먹을 만큼 음식을 주라는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에스겔 46장 9-10절은 새로운 예배의 중요한 세 가지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I. 예배는 “여호와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9절 전반)

결국 예배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정한 절기에 이 땅 거민이 나 여호와 앞에 나아올 때에는”(겔 46:9) 이 짧은 말씀 안에 에스겔은 신약시대의 예배에 관하여 4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배는 “의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할 것을 당연히 기대하고 계십니다. NIV 성경으로 에스겔 46장 9절을 보면 if가 아닌 when으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에게 예배는 드려도 되고 드리지 않아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당연히 예배드릴 것을 기대하시고 주일이 되면 먼저 오셔서 환영해주시는 것입니다. 주일날 어디를 갈지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주일날은 당연히 교회에 와서 예배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배드리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생기는 것입니다. NIV 성경에서는 에스겔 46장 9절에 shell이라는 조동사가 빠져 있지만 KJV 성경을 보면 “But when the people of the land shall come before the LORD”으로 shell이 들어가 있습니다. KJV 성경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 땅 백성이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결코 스스로 주일날 교회 와서 예배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예배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여자들만 예배드리러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남자와 여자 비율이 비슷한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남자비율이 지나치게 많거나 여자비율이 많은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받은 사람이면 남자든 여자든 종이든 자유자든 가리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배 드리고자 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세상 불신자들에게는 결코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예배는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당신은 무엇 때문에 오늘 예배에 나오게 되었는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내가 어려서부터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녀서 왠지 주일날 예배 드리지 않으면 불안해서 나왔다고 대답하는 분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주는 점심이 맛있어서 먹으러 나왔다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된 대답입니다. 이 질문의 정답은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 나왔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목사 얼굴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데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유명한 청교도 운동의 지도자인 토마스 왓슨은 “왕궁에 가서 바깥 뜰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은 왕과 대화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배드릴 때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몸이 가까이 있어도 마음이 멀리 있으면 소용없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자 할 때 그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예배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을 탄식하셨습니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 7:6)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은 마음으로 뵙는 것입니다.
  
넷째, 예배에는 “거룩성”이 있어야 합니다. 개혁한글 성경에는 에스겔 46장 9절에서 “정한 절기에”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KJV 성경에서는 “solemn feasts” 즉 거룩한 절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구별된 시간은 거룩한 시간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예배 자체도 거룩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전에 많은 교회들이 열린 예배라고 하는 것을 시도했었습니다. 

하지만, 열린 예배라고 하는 곳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사람들이 즐기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악기도 최신 악기를 구매하고 노래도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가지고 예배를 드립니다. 찬양을 부르는 사람들도 유명한 가수를 했던 사람들로 뽑아서 찬양도 마치 가요처럼 부르면서 사람들의 흥을 돋우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에 참석하면 처음에는 신이 납니다. 

사람들의 복장도 현란해서 구경거리도 많으며 기분도 좋습니다. 하지만,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왠지 쓸쓸합니다. 영혼이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열린 예배를 시도했던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열린 예배라고 하는 것이 불과 10여 년 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실패한 예배라고 평가가 내려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배를 사람들이 즐거워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사람이 즐기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 입니다. 이처럼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거룩성이 있어야 합니다. 저 또한 설교 가운데 여러분들이 졸지 않도록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농담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해서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너무 지나쳐서 예배의 거룩성을 해쳐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스겔 46장 9절 이 간단한 말씀에도 예배에는 의무성과 은혜성 그리고 거룩성이 있어야 한다는 중요한 원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Ⅱ. 예배에는 “그리스도 예수님”이 동행하고 계신다 (10절)

왕은 메시야를 예표합니다. “왕은 무리 가운데 있어서 그들의 들어올 때에 들어오고 그들의 나갈 때에 나갈지니라” (겔 46:10) NIV 성경에서 왕은 영어로 prince로 되어 있습니다. 이 prince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왕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유다 백성이 귀환하고 나서는 왕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스룹바벨도 왕이 아닌 총독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헤롯 왕가도 로마와 결탁하여 뇌물을 주고 왕이 된 것이지 정상적인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왕을 대부분의 학자들이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고 해석하며 저 또한 그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예수님을 이사야 9장 6절에서는 “평강의 왕”, 사도행전 3장 15절에서는 “생명의 주”, 사도행전 5장 31절에서는 “임금과 구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백성과 함께 출입하는 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백성과 출입을 함께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왕들은 백성 사이에 거하지 않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만 해도 위험하기 때문에 시민들이 사는 곳에 함께 있지 않고 청와대 안에서 경호를 받으며 지냅니다. 하지만, 에스겔 성전에 나타나는 왕은 백성 가운데 거하시고 백성과 함께 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왕은 정치적인 통치자가 아니며 대제사장도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만 모여도 그 무리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동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잘 알고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는데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알아보지도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가장 복되고 바르게 사는 인생입니다.


Ⅲ. 예배드리는 사람에게는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9절 중반 이후)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참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모든 정한 절기에 이 땅 거민이 나 여호와 앞에 나아올 때에는 북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하는 자는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북문으로 나갈지라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고 그 몸이 앞으로 향한 대로 나갈지며” (겔 46:9) 성전에는 문이 모두 세 개가 있습니다. 서쪽은 성전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문이 없습니다. 

그래서 동문, 북문, 남문이 있는데 에스겔 43장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동문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에 에스겔 44장 1∼2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가지 못하도록 동문을 닫아두게 됩니다. 결국, 백성은 남문이나 북문으로만 출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남문이나 북문으로 들어오되 들어온 문으로는 절대 나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예배에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에 참석할 때는 복장도 단정하게 입어야 합니다. 헌금위원, 성가대 모두가 규정에 맞는 복장을 착용하고 질서를 지켜 예배가 산만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휴대전화기도 되도록 꺼두시기 바랍니다. 혹시 전화가 와도 예배 중간에 받아서는 안 됩니다. 
  
둘째, 신앙생활은 후퇴가 있어서는 안 되고 오직 전진해야 합니다. 다같이 전진하다 유턴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고가 납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 10:38-3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이 뒤로 물러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저는 바퀴 두개 달린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고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달려가지 않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지하는 순간 쓰러지는 것입니다.
  
셋째, 예배드리고 나면 “좋은 변화”가 있어야 한다. 사람은 좋은 변화를 할 수도 있고 나쁜 변화를 할 수도 있습니다. 나쁜 변화를 하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가 오게 되고 좋은 변화를 하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났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변화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 또한 예배를 드리다 하나님을 만나 이렇게 변화되었습니다. 예배는 사람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결론

영국의 유명한 청교도로서 ‘참된 목자’라는 책을 저술한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주일 예배는 영광으로 가는 계단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예배를 통해서 변화되고 궁극적으로는 천국에 합당한 존재가 되도록 준비됩니다. 우리는 매주 예배를 드리면서 지난주에 드렸는데 또 드려야 하느냐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우리는 천국으로 한 단계씩 나가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도 지난주보다는 한주 더 천국에 가까이 왔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이나 교회 밖이나 예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동행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한 단계식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