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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신앙의 달음질 (히 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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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달음질 (히 12:1-13)  

 
신묘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첫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중의 최고의 축복은 시간이고, 기적 중의 기적은 그 시간을 우리가 향유한다는 것입니다.
매 순간 기적을 맛보는 한해가 되길 축원합니다.

‘고래 힘줄 같은 그의 끈기에 나는 기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막판까지 황영조와 치열한 레이스를 벌였던 일본의 모리시타가 귀국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황영조에 대한 느낌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그를 따돌리려고 해도 그는 내 뒤를 바짝 따라붙었으며, 페이스를 늦춰 내가 그의 뒤를 따라가려고 하면 그도 페이스를 늦춰, 나는 그가 마지막 나를 추월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나를 추월하고 결승선을 향해 달음질치는 그의 모습은 그저 신바람이 나 보였고, 어디서 그런 투혼이 숨어있었는지 기절할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나는 황영조의 표정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불안한 가운데 레이스를 펼쳐야 했고, 그는 내 뒤에서 나에 관한 모든 것을 보면서(표정, 자세 등으로 나의 피로정도) 나를 공략했으니 전략에서 내가 완패했다.”

황영조 선수는 고래 힘줄 같은 끈기로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열광하는 관중의 환호를 받으면서 결승테이프를 끊었습니다. 
그에게 끊이지 않는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흔히 신앙생활을 달리기로 많이 표현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면 이미 달리기의 출발선을 떠난 것입니다. 
히 12:1절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고전 5: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딤후 4:7절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런데 운동장의 달리기와 신앙의 달리기에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운동장의 달리기는 다시 도전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실패하면 다음 기회가 있습니다. 
이 대회에 실패하면 다음 대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경주는 되풀이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래심줄 같은 끈기를 가지고, 무서운 투혼으로 뛰어야 합니다. 
신앙의 달리기는 한번밖에는 없습니다.

경주에는 반드시 상이 있습니다.
신앙의 경주에도 반드시 상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 상에 대하여 20번 정도 반복하여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몇 군데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히 11:6절 “…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계 2:10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구원은 같습니다. 
그러나 상급은 다릅니다. 
천국에서의 기쁨이, 영광이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42.195Km, 그 먼 인생길을 달리고 난 다음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스탠드를 가득 채웠던 열광하던 관중들은 다 빠져나가고, 씁쓸레히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이왕 뛸 바에야 상을 얻도록 뜁시다. 
그러면 상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허다한 증인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절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증인이란 나의 뛰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뛰더라.’, ‘신바람 난 것처럼 뛰더라.’, ‘뛰는 것 같지 않게 뛰더라.’, ‘그게 뭐냐? 차라리 그만 둬라.’는 둥 우리의 달리기를 본 그대로 말해주는 사람입니다. 
기진맥진한 선수도 관중을 의식하면 힘이 솟구칩니다.

황영조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레이스 중 심장이 터질 듯 한 고통을 느낄 때면 달리는 자동차에라도 뛰어들고 싶지만 고향 삼척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열 길 바다 속에서 자맥질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이내 안정을 찾고 달리기를 계속한다.”
황영조는 그를 보고 있을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그 어머니의 시선 때문에 그는 뛰고 또 뛰었습니다. 

성경은, 두 종류의 증인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먼저 간 하늘의 증인들입니다. 
히 11장에서는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헬 등 믿음의 증인들을 소개하면서 이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고 했습니다. 
히 11장 35절 이하에 보면, 어떤 증인은 더 나은 생명을 누리려고 고문도 달게 받았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증인은 조롱을 받고 채찍으로 얻어맞았다고 했습니다. 

또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한 증인도 있었습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자가 되기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달음질친 신앙의 선배들, 그 하늘의 증인들이 우리의 신앙자세를 보고 뭐라고 할까요? 
‘그게 뛰는 것이냐, 걷는 것이냐?’ ‘할 작정이냐, 안할 작정이냐?’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않을까요?
유명한 성화 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천국에 먼저 간 성도들이 다 일어나서 할렐루야를 외치는 그림이 있잖아요? 
여러분이 천국에 입성할 때도 이런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환호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또 하나는 땅의 증인입니다. 
여러분이 저의 증인입니다. 
저가 여러분의 증인입니다.
여러분의 이웃이 여러분의 증인입니다. 
‘그 사람 참 대단해! 예수를 믿으려면 그렇게 믿어야지. 나도 그렇게만 된다면 믿겠어.’ 
‘그 성도님은 저가 보증합니다. 어떻게 예쁘게 믿음이 성장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분 때문에 저의 목회도 빛이 납니다.’

‘빈대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고 정주영 회장이 부하직원을 야단칠 때 하던 말이었습니다. 
정 회장이 이십 안팎의 나이에 막노동을 할 때입니다.
노동자 합숙소에서 빈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빈대를 피하는 방법을 궁리한 끝에 침상 네 다리에 물을 담은 세숫대야를 하나씩 받혀놓았습니다.
그러나 효과는 며칠뿐이었습니다.

빈대가 또 다시 사람들을 물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빈대는 물에 빠져 죽어야하는데 어떻게 사람을 무느냐는 것입니다.
그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나서 정 회장은 놀랐습니다.
미물에 불과하지만 빈대들의 지혜와 끈기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빈대만도 못한 놈’이란 꾸지람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세숫대야의 물을 건널 수 없음을 안 빈대들은 벽을 타고 천정에 올라가 천정에서 사람 몸을 향해 수직으로 낙하하는 것이었습니다. 
빈대도 목적 달성을 위하여 저토록 머리를 쓰고,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여 성공하지 않는가?
그런데 인간이 중도에서 포기한다면 그게 인간이냐, 빈대만도 못한 놈이지....... 

딤후 4:10-16절에 보면, 바울사도께서 증인이 되셔서 그의 주변 사람을 평가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 
그도 분명 교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도 분명 나름대로 신앙의 달음질을 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너무도 실망스럽습니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이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는 바울사도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겠습니까?
증인들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둘째, 상을 얻으려면 벗어버려야 합니다.
1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달리기를 할 때 무거운 짐을 지거나 거추장스러운 옷을 걸치면 빨리 달릴 수 없습니다. 
그의 성적은 보나마나 입니다.
이집트에서 가끔씩 갈라비아(중동남자들이 입는 통치마 같은 옷)을 입고 축구를 하는 청년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고 공을 차는지 아십니까? 
한쪽 자락을 끌어올려 입에 물고 속옷이 보일정도로 하고 뜁니다. 

그렇지요! 
간편한 운동복을 입고 뛰는 청년과 갈라비아 자락을 입에 물고 뛰는 청년과 같은 실력이라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여기서 무거운 것이란 우리의 염려와 걱정을 말합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란 한마디로 이생의 자랑(명예) 안목의 정욕(성욕) 육신의 정욕(재화)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신앙의 달리기에서 우리를 실패시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12장에서 무거운 것 얽매이기 쉬운 죄 때문에 신앙의 경주에서 실패한 한 사람을 소개해 줍니다. 

에서입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사람입니다. 
히 12:16절 하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정신 나간 사람, 어리석은 사람)가 없도록 살피라” 
에서의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즉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이 컸던 인간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영적인 달리기에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영적인 일에 관심조차 없는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도 죽음을 의식하고 안 끌려가려고 버티고 있는데, 사람으로 태어나서 죽음의 문제를, 구원의 문제를, 천국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새벽기도회 때 말씀드린 얘기입니다.
‘단지 15분 뿐(just 15minutes)'라는 연극이 있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가 있습니다.

20대에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탁월한 논문을 써 이제 학위를 받을 날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에게는 분홍빛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낍니다.
정밀검사 결과 폐암말기로 이제 그의 삶은 15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5분이 금방 지나고 남은 시간은 10분으로 줄어듭니다.

한 통의 전보가 날아듭니다.
‘억만장자인 당신의 삼촌이 방금 돌아가셨습니다. 그 재산을 상속할 사람은 당신뿐이니 속히 상속절차를 밟아 주십시오.’
죽음을 앞에 둔 그에게 그 재산은 어떤 의미를 줄까요?
운명의 시간은 8분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그 때 또 하나의 전보가 날아듭니다.
‘당신의 학위 논문은 우리 학교 개교 이래 최고의 논문으로 평가되어 올해의 최우수 논문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제 운명의 시간은 3분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전보가 날아듭니다.
애타게 기다리던 연인으로부터 청혼 승낙서입니다. 
15분이 지나고 그는 손에 세통의 전보를 받아든 채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연극은 끝납니다.
연극은 묻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정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땅에서의 생활의 염려와 걱정에 갇혀 사는 사람은, 이 땅에서의 이생의 자랑(명예욕) 안목의 정욕(정욕) 육신의 정욕(재물욕)에 갇혀 사는 사람은, 신앙의 달리기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상을 얻으려면 벗어버려야 됩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지적하시는 대로 벗어 버려할 것들을 벗어던지는 교우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셋째, 상을 얻으려면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1절 하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끝까지 참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는 ‘참는다.’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2절 중 “십자가를 참으사” 
3절 하“…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7절 “너희가 참음은…”
그러고 보니 신앙애기에 ‘참으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서머나 교회의 주교였던 순교자 폴리캅시대(69-153)에는 박해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느티나무에 기대어 울고 있었습니다. 
너무 심한 박해 때문에 어린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버리는 것이 안타깝고 원통해서 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폴리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이란 지금 자네가 기대고 있는 느티나무처럼 성장하는데 긴 세월이 걸린다네. 처음에는 주변의 잡초와 가시덤불에 시달림을 받고, 그 후에는 폭풍의 시련을 수없이 겪은 다음 저렇게 큰 나무가 되는 것이라네. 위대한 믿음에는 인내가 필요하네.”

믿음의 길에 고난이 있고, 시험이 있습니다. 
인간과의 갈등, 마음속의 회의, 생활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달리기를 할 때처럼 숨이 차오르고, 가슴이 터질 것 같고, 한 걸음 옮기는 것이 천근을 옮기는 것 같고, 정신이 아찔해지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좁은 길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의 길은 결코 쉽게 갈 수 있는 넓은 길이 아닙니다. 
신앙의 길은 결코 편안히 갈 수 있는 넓은 길이 아닙니다. 
신앙의 길은 결코 모두가 다 갈 수 있는 넓은 길이 아닙니다. 
신앙의 길은 결코 마음껏 휘젓고 갈수 있는 넓은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상을 얻으려면 참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허다한 증인이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 뛰십시오.
벗어버릴 것을 벗어버리고 뛰십시오.
끝까지 참고 뛰십시오. 
올해도 우리 앞에 서 계신 주님을 향하여 질주함으로 상 얻는 자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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