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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여기 있나이다 (출 3:1-12)

첨부 1


여기 있나이다 (출 3:1-12)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1)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2)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3)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4)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5)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7)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8)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9)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0)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2)
<출애굽기 3장 1~12절>

할렐루야!
2011년 첫 주일에 예배의 자리에 오신 여러분은 
이미 예배의 첫 승리자입니다. 
한 해 동안 주일 성수에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올해는 우리교회가 창립 된지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실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 일들을 기대하고 여러분도 쓰임받기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에 기도와 헌신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따라서 합니다.
‘금년엔 할 일이 많다’,‘열심히 하겠습니다’,‘열심히 하십시다’
여러분 모두 영육간에 강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옆의 분과 인사합니다.
“건강하게 2011년 사시기 바랍니다.”
“2011년 꼭 주일성수 합시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삶의 의미의 중요성

휴 무어헤드 박사(Dr. Hugh Moorhead)는 
세계의 저명한 철학자, 작가 … 등 학자 250명에게
“삶의 의미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 몇몇은 삶의 목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고 했고,
- 몇 명은 무어헤드 교수에게 답을 발견하거든 
자신들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릭 워렌, <목적이 이끄는 삶>, 디모데, p.24. 참조]

이런 것을 보면 똑똑하고 유명한 사람일지라도,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고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가 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만약 여러분에게 똑같은 질문(삶의 의미가 무엇입니까?)을 한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사람마다 삶의 욕구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예와 부를 위해 살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목적 없이 밥 먹고 살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죽지 못해 산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새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 없이/꿈 없이/비전 없이 … 
마지못해/먹고 살기 위해/죽지 못해 산다면 
이보다 더한 불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골로새서에 보면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유를 찾으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 있어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뜻이 있어 지금 살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드시고,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우리는‘사명’이라고 부릅니다.

모두 2011년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2011년을 살지 못하고 갔습니다.
우리가 새해를 살게 된 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뜻하심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뜻하심이 있어 오늘을 살고 있다”
그런데 자신에게‘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느냐고 묻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찬송가 620장 2절에 보면
“주님이 뜻하신 일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언제나 주 뜻안에 내가 있음을 아노라”(찬송가 620장 2절)

우리의 머리로 하나님의 뜻하심을 다 알 수 없더라도
하나님의 뜻 안에 내가(우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는 
애굽의 공주에 의해 길러진 왕자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히브리인의 피가 흘렀고 
자기 친어머니의 젖을 먹으면서 어머니의 교육을 받아서인지
모세에게는 히브리인이라는 민족의식이 있었습니다. 

성장한 모세는 히브리사람들이 
힘들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출2:11)
어느 날 애굽사람이 히브리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민족의식/동족의식이 발동했는지 
모세는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모래 속에 감추었습니다.(출3:12) 

그러나 비밀은 없었습니다.
모세가 애굽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애굽의 왕‘바로’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모세를 죽이고자 찾았습니다.(출3:15) 
아무리 왕자의 신분이었지만 살인죄를 저지른 모세는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그곳에서 십보라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고,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돌보는 목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40년을 왕자로 살다가, 한 순간에
양떼를 치는 목자로 살아가는 게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모세는 옥살이를 하진 않았지만, 
광야라는 감옥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40년을 살아 80이 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출3:1~5)
호렙산은 시내산과 같은 지역입니다.
‘호렙’이라는 말의 뜻은 
<광야, 황량한 지역, 폐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호렙산은 아무 쓸모없는 산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호렙산을‘하나님의 산’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출3:1)

비록 광야일지라도, 황량한 폐허일지라도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은 하나님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예배의 자리,
말씀을 통해 우리를 만나 주시는 이 자리가,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자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출3:4)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 3:9~10)

하나님은 애굽의 왕자였던 모세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광야의 목자로 초라하게 살고 있던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해야 …

왕궁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판단대로, 자기 방법으로 민족을 구하려 했던 모세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 자신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모세에게 배우게 하시려고 
모세를 광야에 40년 동안 머물게 하셨습니다.

잠언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24) 했습니다.
성경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금년에도 여러분에게 많은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치러야할 중요한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생각, 내 방법, 내 경험, 내 지식만을 앞세우다가는 
일을 망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생각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생각만 하나님께 아뢰고, 
내 생각대로 응답되면 좋아하고,
내 생각대로 안되면 하나님이 계시는가 안계시는가 하는 의심까지 합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받고
좋은 자리가가 많음에도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몽골에 가서 선교사 활동을 하고 있는
<내려놓음>의 저자 ‘이용규’선교사님이 쓴 책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선교사님이 유학생들을 위한(코스타) 집회에 
가족들과 함께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7살이던 선교사님의 아들이 집회장소 근처에 있는 
수영장을 보고 수영장에 가자고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 내외는 수영복을 챙겨가지 못했습니다. 
그 근처엔 수영복을 사거나 빌릴 장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 아들은 계속해서 울면서 졸랐습니다.
하는 수 없이 팬티만 입혀서라도 수영을 할 수 있을까하여
수영장으로 향했습니다. 
수영장에 가는 동안 선교사님 아들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꼭 수영하며 놀고 싶어요.”
그 때 마침 탈의실에서 만난 한국 분이 
수영장 한구석에 놓여있는 아동용 수영복을 발견해서 가져오셨습니다. 
선교사님 아들은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신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참을 놀고 난 뒤 그 수영복을 벗어서 제자리에 두어 
주인이 찾아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에도 선교사님 아들은 수영장에 가고 싶어 했습니다. 

수영복이 문제였지만, 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오늘 또 수영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 날, 수영복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주인이 찾아갔는지 … 그러자 선교사님 아들이 
대뜸 엄마를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하나님 진짜 계신 거 맞아?”

어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감사하더니,
상황이 바뀐 오늘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까지 했습니다.

선교사님 아들의 모습이 마치 우리의 모습 같지 않습니까?
자신의 뜻대로 일이 잘될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보통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든지 
그 길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최고의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내 때, 내 판단, 내 결정을 하나님께 들어달라고만 하는 것은 
참된 기도가 아닙니다.

낮은 자를 쓰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40년간 광야에서 모세를 낮추신 이유는
자기민족의 비참함을 광야 속에서 알라는 뜻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혈기 왕성한 왕궁의 모세를 부르셨다면
모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보다는 
자기 생각/지식/경험/방법을 이용하여 백성을 구하려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갖고 있던 왕궁의 교만을 다 빼기 위해 
광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때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그때는 절망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작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빌리 그래함(Dr. Billy Graham) 목사님이 지은 
라는 작은 책에 보면
“When we come to the end of ourselves, 
우리가 우리의 마지막 지점에 도달했을 때
we come to the beginning of God.”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작점에 도달 한 것

내 생각에 ‘끝이구나’라고 느꼈을 때가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지점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지점이 
하나님의 시작점임을 믿고 기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고 쓰임 받았던 성경속의 인물들을 살펴보면 …
대부분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하거나 ‘자격미달’인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을 뽑기 위해 
이새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이새의 집에 기름 부을 새 왕이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새의 집에는 8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이새는 자신의 아들 7명을 사무엘에게 소개했지만,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은 그 중에 없었습니다. 
이새는 막내 아들 다윗은 소개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새의 태도로 보아 다윗은 아버지가 보기에도 임금감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감이 아니라도 
하나님이 불러 쓰시면 왕도 될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달변가가 아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0절에 보면
바울의 설교를 들은 성도들의 평가가 나와 있습니다.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고후10:10) 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6절에도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고후 11:6) 라고 했습니다.

말하는 것이 시원치 않았음을 바울 자신도 인정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바울을 쓰셨습니다. 
기독교역사에 바울처럼 위대하게 쓰임 받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부족한 사람들을 들어 쓰셨을까요?
고린도전서 1장 27~28절에 보면
“ …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 (고전 1:27) 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미련한 자/약한 자도 쓰십니다.
하나님은 잘난 사람/잘난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을 기쁘게 여기시고 쓰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 우리에게 강함 되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녀들이 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고
‘저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도
함부로 평가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들어 쓰시면 강하게 쓰임 받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올 한해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많은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당할 사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들이 
수많은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빛 되고 소금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순간 순간 가르치시며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사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 주세요. 나와 함께 해 주세요.’라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모세는 두려워하며 말했습니다.

“ …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3:11)

모세는 자신의 형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애굽의 왕자였을 때처럼 권력을 쥐고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늙은 양치기 일뿐 … 학식을 갖추지도 못했습니다. 
40년 전에 왕궁에서 배웠던 것 중에 남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40년 전에 잘한 것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컴퓨터도 1년만 하지 않으면 
업그레이드된 프로그램을 활용하기가 어렵습니다. 
새로운 휴대전화기를 사면 그 전화기에 있는 기능을 익히기 위해 
많이 써보고 연습해야 합니다. 
저는 전화기를 바꾸면 그 전화기의 기능을 다 알 때까지 해봅니다.

최근 스마트 폰을 바꾸고 모든 기능을 다 익혔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을 만났는데 
그분도 얼마 전에 스마트 폰으로 바꾸셨나 봅니다. 
제가 전화기를 사용하는 것을 보더니
그런 걸 어떻게 다 하느냐고 하며 
자신은 전화 걸고 받는 것 밖에는 못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뭐합니까. 사용할 줄 알아야지 ….
그리고 계속 활용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노력을 계속해야합니다.

모세가 40년 전에 왕궁에서 배운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모세가 핑계를 댑니다. 

“ …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출4:1)
그리고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 했습니다.

모세는 어떻게 하던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왕궁에서 자라며 배워 말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 22절을 보세요.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행 7:22) 

모세는 모든 일에 능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면서 다 굳어지고 뻣뻣해졌습니다.
이렇게 망설이고 가기 싫어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옛날 책으로만 알고 있으면 
어떤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자신의 말씀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나와 함께 하시리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이 세상 어딜 가든지, 어디서 무얼 하든지 …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해 주시면
우리는 능히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하며
하나님께 자신을 드러내면 되는 것입니다.

금년에도 우리는 태산을 넘고, 험곡도 지날 것입니다.
힘든 일 많을 것입니다. 바람도 불고 눈비도 올 것입니다.
한숨 쉴만한 일도 있을 것이고, 
헐떡거릴 만큼 버거운 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라 여겨지면
‘내가 <여기있나이다> 제가 하겠습니다. 
함께 하심 믿습니다.’하며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승리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2011년의 주인공 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와 함께 계셔서 동행하여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2011년의 길을 떠납니다. 
하나님, 동행하여 주옵소서.
우리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믿음의 경주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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