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광야로 나온 목적What do you go out to see? (마 11:7-11)

첨부 1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성경의 인물들은 대부분 특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중 세례 요한은 출생이나 성장, 그리고 사역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극적인 삶을 살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불꽃처럼 자신의 생명을 불태웠던 사람입니다. 

요한은 예수님보다 앞서 세상에 나와 메시야의 오는 길을 예비했고,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만나 세례를 베푸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감옥에 갇혀 예수님께 사역의 자리를 내어드렸고, 예수님의 사역이 절정으로 올라갈 때 의연히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하여 최고의 평가를 하시면서 동시에 영적으로 완악한 당시 세대를 책망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있어 요한은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보다 위대한 자이며 메시야 이전에 오리라고 예언된 엘리야로서, 바로 구약과 신약의 가교적(架橋的) 역할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사역 현장에 몰려 왔던 군중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라고 질문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요한에 대한 군중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요한을 보러 왔던 군중을 분석해 볼 때 적어도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갈대를 보러온 사람들, 둘째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를 보러 온 사람들, 셋째는 선지자를 보러 온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잘못된 점을 시정하시고 요한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본문에서 왜 예수님은 스스로 질문을 던지시고 답변하고 계실까요? 사실 ‘광야’ 는 ‘계시’ 와 ‘메시야의 구원’ 이 선포되는 상징적인 장소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로 나가서 만난 사람은 ‘세례 요한’ 이었습니다(3:1,5).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를(티나) 보려고’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무엇을(티) 보려고’ 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세례요한(who) 이라는 인물 뿐만 아니라 요한의 메시지와 그의 삶이 주는 전체적인 의미(what)에 관심을 두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세례 요한과 그의 사역의 위대성을 강조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주님의 질문과 대답을 따라가며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1.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 갈대의 신앙 극복해야)

7절=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여기 ‘갈대(칼라몬)’ 는 요르단 지역에서 자라는 커다란 줄기를 가진 식물로서, 붓이나 척량막대(계 11:1)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본절에서 갈대란 ‘나약함(weakness)' 과 ’줏대없음(vacillation)' 을 상징합니다. 

예수께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라는 표현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의 직접적인 요지는 ‘너희가 갈대같이 나약하고 줏대 없는 세례요한을 보러 나갔느냐?’ 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어법(反語法)을 사용한 질문으로서, 요한은 결코 나약하거나 줏대없이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알고 있는 세례 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나약한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당시 기득권자였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담대하게 외친 사람입니다. 
마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요한은 줏대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헤롯왕에게 직언할 만큼 강한 신념의 사람이었습니다(14:4). 

7절을 8절과 연관시켜 이해하면 예수께서 ‘갈대’ 같은 사람으로 지목한 사람은 오히려 왕국에 있던 ‘헤롯’ 입니다. 당시 시중에서 사용하던 동전에는 헤롯 안티바스가 갈대(지팡이)를 붙잡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갈대’ 라는 표현은 쉽게 헤롯을 연상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헤롯은 자신의 불륜을 비난하는 요한을 가두었으나 백성들의 동요를 두려워하다가 결국 그의 딸 헤로디아의 요청을 못이겨 요한을 목베어 죽이고 말았습니다. 헤롯은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갈대처럼 줏대 없이 흔들렸던 인물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무슨 뜻으로 이와같은 질문을 하시는가에 있습니다. 주님의 뜻은 세례 요한에 대한 군중의 오해를 없애기 위하여 요한이 결코 나약한 사람이 아님을 강조하는 데 있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흔들리는 갈대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성도는 한번 주신 믿음에 굳게 서서 어떤 환경이나 어떤 조건,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말에 기회주의(機會主義)라는 말이 있습니다. 때에 따라 여기도 붙고 저기도 붙으면서 기회를 따라 사는 부류의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부화뇌동(附和雷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열을 올리면 같이 열을 올리고 남이 고함치면 같이 고함치는 줏대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때를 따라 적당히 움직이는 ‘흔들리는 갈대’ 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속에 갈대 같은 요소를 제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의 복음을 굳게 붙들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작은 유혹에도 흔들리는 갈대의 신앙이 아니라 세상의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참나무와 같은 굳은 신앙인 입니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변덕이 심한 갈대의 신앙을 극복하고 말씀에 근거한 확신과 줏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보려고? (= 사치와 허영 극복해야)

8절=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 을 보러 나온 자들입니다. 이들은 첫 번째 부류보다는 좋은 사람들입니다. 무언가를 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잘못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부드러운 옷입은 사람’ 은 눅 7:25절 에서는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 라고 표현했습니다.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옷을 사치스럽게 입고 왕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의 질문을 통해서 광야에 살던 세례요한과 왕궁에 살던 헤롯과 귀족들을 강하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헤롯은 광야 끝에 있는 여리고의 왕궁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스럽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처럼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마 3:4) 거친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선명한 대조를 통하여 세례요한은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였음을 역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군중을 향하여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모여든 무리는 요단 강가의 세례 요한을 보러 나왔을 터인데, 그들 중의 일부는 요한의 참모습을 보지 아니하고 화려한 옷 입은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머릿속에 온통 옷만 남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좋은 옷을 보려면 헤롯궁에 갈 일입니다. 거기 가면 얼마든지 화려한 옷 입은 사람들이 많은데 왜 요단강에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들이 구하기는 했지만 잘못 구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들의 관심은 사치와 허영,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찾는 데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구하고 계십니까? 우리 한국 사람은 의복에 관심이 매우 큰 민족입니다. 삶의 삼대요소를 표현할 때에도 ‘의식주(衣食住)’ 라 하여 의복을 제일 중요한 요소로 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화려하고 사치스런 것을 좋아하는 국민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자와 그의 제자 자공 사이에 이런 대화가 있습니다.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우리의 사회 생활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입니까?” 공자님 가라사대, “삼대 요소는 식(食)과 신의(信義)와 병(兵)이라.”

‘식’ 은 경제 문제이고, ‘신의’ 는 사람들 사이의 믿음이고, ‘병’ 은 국방의 문제입니다. 자공이 다시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그 셋중에 부덕해서 한 가지를 버린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리겠습니까?” 공자님 답하는 말이, “병을 버리라. 병은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느니라.”

자공이 다시 묻기를, “만일 하나를 더 떼어버린다면 나머지 둘 가운데서 어느 것을 버려야 되겠습니까?” 공자가 주저하지 않고 하시는 말씀이, “식을 버리라” 는 것이었습니다. 굶어 죽을망정 신의는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공자의 삶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신의이고 그 다음이 먹는 문제와 안전 문제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입는 문제가 앞서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우리의 경제 사정에 비하여 분수에 넘치게 사치합니다. 외제품을 지나치게 선호하고, 과분한 혼수를 마련해야 하고, 브랜드라면 빚을 내서라도 구입해야 직성이 풀리는 민족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왔는가?” 
여러분은 무엇을 보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여러분은 무슨 목적으로 교회로 나오십니까? 단순히 주위에 널려 있는 갈대들을 보기 위해 오신 분들은 안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혹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 을 보기 위해 오신 분은 안 계십니까? 사치와 허영, 명예와 권세를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성도는 안계십니까?
사람이 허영에 잠겨 살면 개인과 가정에 불행이 닥칩니다. 사회도 국가도 허례허식을 좇아가면 미래가 없습니다.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 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추구해 갈 때는 결국 비참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갈대처럼 줏대 없이 흔들리는 것도 문제지만,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 도 우리 교회와 우리 사회에서 추방해야 할 것입니다. 


3. 선지자를 보려고? (= 올바른 목표)

9절=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본절은 앞선 7,8절에서 예수님이 하셨던 세례 요한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그와 그의 사역의 위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포문을 연 반어법적 질문의 정확한 해답이 됩니다. 주님은 요한에 대하여 ‘선지자일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요한은 참 예언자의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확고한 도덕적 신념, 강한 의지, 진리와 의에 대한 두려움 없는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러한 선지자를 보기 위해 광야로 나갔습니다(14:5).

그들은 올바른 목표를 정했고 올바르게 찾았습니다. 그들은 요단강 가에 있는 갈대를 보지 않았고, 어떤 유명한 사람이 무슨 옷을 입었든 그것을 보지 않았고 오직 요한을 응시했습니다. 요한을 관찰했고, 그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자, 하나님의 선지자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리하여 요한이 시키는 대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선지자를 보기 위하여 광야로 나갔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선지자에게 있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소망을 안겨주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충성된 종들이었습니다. 때로는 말씀을 전하다가 매맞거나 옥에 갇히거나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관심이 그들 위에 있어 왔습니다.

대표적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그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 되어 있었을 때 ‘70년을 경과한 후 예루살렘이 다시 회복되리라’ 는 예언을 전했고, 이것은 절망 속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소망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만을 전하다가 매맞고 우물에 빠뜨려지고 종국에는 동족에 의해 애굽까지 끌려갔습니다. 거기서도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으로 주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동족의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주님은 선지자를 보러 나온 백성들을 지지하시면서, 선지자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이 시대 우리는 문자적으로 선지자가 될 수는 없지만, 만일 우리가 선지자의 특징을 갖추면 선지자적 사역자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민족에게 소망을 안겨주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행하는 일에 충성된 모습을 보일 때 선지자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한 세기 전 이 땅의 초대교회는 비록 소수였지만 사회에 대한 선지자적 사명을 훌륭히 감당했습니다. 1919년 즉 기미년 3월 1일 국민 대다수가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우렁차게 외쳤을 때 만세 운동을 이끌었던 민족 대표 33인 중 17명이 목사님 장로님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작성하여 선포한 독립선언문 중 “우리는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 끝까지 싸우되 이 사회의 모든 질서를 혼돈시키지 않고 싸울 것이다. 정당하게 정당한 주장으로 싸울 것이다” 라고 천명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 비하면 그들은 참 선지자들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광야에서 선지자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갈대를 볼 것이 아니고 부드러운 옷을 볼 것도 아니고 선지자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선지자를 찾아 나서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불타는 거룩한 환상과 하나님의 비전을 가슴에 품은 일군들을 키워내는 ‘이 시대의 광야’ 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교회 안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요소를 제거해야 하겠습니다. 교회 안에 부드러운 옷 입은 것 같은 것을 제거하고, 우리의 교회를 선지자적인 요소로 가득 채워야 하겠습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그들이 광야로 나온 목적을 직접 확인하시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에게서 하나님의 참 선지자의 모습을 발견한 사람들은 주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 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요한 만큼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출현을 직시하고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 선지자는 없었습니다. 그는 실로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중심으로 나누어진 두 시대 속에서 세례 요한을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 아래 놓인 ‘옛 시대’ 에서 살았고, 세례 요한은 그 ‘옛 시대’ 의 정점(climax)에 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 시대’ 가 열렸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나님 나라’ 에서는 누구나 새 언약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경험할 수 있기에 ‘지극히 작은 자’ 라도 옛 시대의 어떤 사람보다도 큰 자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엄청난 특권의 시대에 주님의 백성으로 불려나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 경험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그리고 오순절 사건 등과 같은 구속사의 획기적인 사건들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데 그쳤으나 복음을 경험한 우리는 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예수님의 위대한 지상 명령을 위임 받기까지 한 복된 사람들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새 시대의 사람아, 너는 광야에 무엇을 보려고 나왔느냐?” “네가 광야로 나온 목적이 무엇이냐?” 이 질문에 우리는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왔습니까? 여러분이 교회에서 추구하는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는 불타는 거룩한 환상이 있습니까?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루고 싶은 하나님 나라의 비전
이 있습니까?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