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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렘 39:15-18, 요 11: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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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렘 39:15-18, 요 11:25-27)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구원, 우리의 믿음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성경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셨어도 우리가 믿지 못하면 그 무궁하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받아들이는 자, 믿는 자에게만 능력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의 사람은 한 결 같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승리의 사람입니다. 믿음은 세상에서 승리하게 하는 힘입니다. 
  
믿음은 지식(notitia), 동의(assensus), 신뢰(fidutia), 이 세 단어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고백적으로 말한다면 믿음은 선택하는 것입니다. 맡기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결과적으로 자기풍성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자신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믿음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believing)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기에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trusting)입니다. 믿음은 순종의 행위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지 않으면 참 믿음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5:6에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1:7에는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라고 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믿음의 실천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모름지기 믿음이란 행위로 보여야 참 믿음입니다. 아무리 믿는다고 하더라도 행위로 보이지 않으면 헛된 믿음입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한 여인이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는 길에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었습니다. 이 여인은 오랜 고통 속에서 의사에게 가서 돈도 다 탕진하고 더 이상 기댈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마지막 수단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감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위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십니다. 이 여인의 행위는 이 여인의 마음속에 있는 믿음의 외적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와서 옥합을 깨트리고 비싼 향유를 발에 부은 여인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여인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이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한다고 하시며 칭찬하시고 이 여인이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놀라운 선포를 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사랑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있는 우리의 행위는 믿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야고보서 2:18에는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고 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행위를 통하여 믿음을 보여야 하는 법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함락되리라는 예언을 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갖하게 되었습니다. 구스 사람 내시 에벳멜렉은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구출하였습니다.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자들은 큰 죄를 저질렀다고 왕에게 고소하였던 자들입니다. 용기 있는 에벳멜렉을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파멸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믿음에는 상응하는 대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에벳멜렉을 구원하셨습니까?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잘해서가 압니다. 에벳멜렉에게 하나님이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에벳멜렉을 구원하신 것은 예레미야에 대한 그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에벳멜렉이 하나님을 믿은 믿음의 대가 무엇입니까? 성경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을 믿은 대가를 보며 우리의 믿음의 대가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않습니다.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원수의 손에 넘겨지지 않는 복을 받습니다. 손에 넘겼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두려워하는 사람의 노략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포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원수의 손, 남의 손에 넘겨지는 것은 가장 억울한 일입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의 손에 넘겨지는 것은 가장 두려운 일입니다. 가장 서러운 일입니다. 어린아이가 남의 손에 넘겨졌다고 가정해 보세요. 넘겨진 그 자체가 두려움이고 고통입니다. 
  
오래 전 인도에 갔을 때 들은 말입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동네에서 아이들이 없어졌다고 하면 대부분 납치된 것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을 납치하여 구걸을 시킵니다. 깨끗하고 성한 아이들이 구걸하면 돈을 안주니까 아이들을 데려다가 팔을 부러트리고, 다리를 절게 하고, 눈을 상하게 하여 완전히 불쌍한 아이로 만들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런 나쁜 사람의 손에 넘겨지는 자체가 공포입니다. 
  
우리나라도 한 때 인신매매가 성하였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여인들을 잡아다가 무인도에 데려가 조개 까기를 시킨다고 하였습니다. 갑자기 실종하여 소식도 없이 사라진다면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습니다. 원수의 손에 넘겨진 이런 불행들이 역사에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인신매매는 가장 악한 죄악입니다. 사람을 물건처럼 사고팔고, 인격이나 인권을 말살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악입니다. 
  
19세기 초 영국해군은 대서양 주로 북대서양에서 아프리카 노예선을 적발하여 인신매매를 단속하였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원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보호하여 그들을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힘없고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악한 무리의 손에 넘겨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영국 국가가 나선 것입니다. 
  
통일신라시대 때 장보고와 신라해군은 전라도에서 당나라 해적선을 적발하여 인신매매를 단속하였다고 합니다. 신라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보호하여 신라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국가의 국민에 대한 책임은 자기 국민을 남의 손에 넘겨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은 이리저리 얻어터져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합니다. 많은 대가도 아끼지 않습니다. 유대인 한 사람이 인질로 잡혀 있다고 가정해 보세요. 이스라엘은 국가가 1개 부대를 보내서라도 인질범의 손에서 자기 국민을 빼앗아옵니다. 자기 나라 사람이 원수의 손에 넘겨지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생존법입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은 권력투쟁에서 졌습니다. 그는 당나라로 도망가서 당 고종과 결탁하여 고구려의 땅인 요동을 빼앗고, 평양성을 침범하였습니다. 이완용과 송병준 같은 매국노들은 우리나라를 몽땅 원수인 일본의 손에 넘기려고 하였습니다. 자기 백성이 원수의 손에 넘겨지는 것을 막지는 못할망정 원수의 손에 넘겼다는 것은 인간의 할 일이 아닙니다. 이런 자를 하나님은 절대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가장 큰 슬픔이란 죄가 하나님의 사람을 마귀의 손에 넘긴 것입니다. 뱀이 사람을 사탄에게 넘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귀의 손에 있는 인간을 다시 빼앗아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인간을 사탄에게 넘져주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사야 43:6에서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하나님의 자녀를 원수의 손에 넘기지 않으십니다. 
  
섹스피어는 배신자를 가장 죄질이 나쁜 죄인으로 판단했고 이런 사람을 지옥의 가장 밑창에 있다고 묘사했습니다. 그는 스승인 예수님을 판 가룟유다와  자신의 친구인 시저를 배반하여 죽게 한 브러터스를 가장 나쁜 배신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배신은 한 겨울의 삭풍과 같이 차다’고 하였습니다. 배신은 신뢰를 깨트린다는 뜻입니다. 배신자란 ‘넘겨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신자는 가장 나쁜 사람입니다. 가까운 사람을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주기 때문입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사탄의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의 손에 넘겨주었고, 로마 군인의 손에 넘겨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였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영원히 사탄의 손에 넘겨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탄의 손에 넘겨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결국 사탄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이란 영원히 사탄의 손에 넘겨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왜 원수의 손에 넘겨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을 원수의 손에서 끌어내실 수가 있습니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힘이니까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합은 가나안의 기생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이스라엘을 신뢰하였습니다. 라합은 여호수아와 열두 정탐꾼들이 가나안을 정탐하러 왔을 때에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그들을 살려주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침공할 때에 라합을 살려주기로 하고 창가에 빨간 끈을 매달아 놓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함락할 때에 빨간 끈이 있는 라합의 집을 살려주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라합과의 약속대로 라합을 원수들의 손에 두지 않았습니다. 아마 라합이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여리고 사람들은 라합을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편 106:10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을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셨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원수의 손에 넘겨지지 않도록 하십니다. 원수의 손에 버려지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대가는 하나님이 손이 함께 하셔서 원수의 손에 넘겨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죽지 않고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은 결과는 죽지 않고 노략물 같이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목숨이 더 길어지고 더 팔팔해집니다. 
  
노략물이 무엇입니까? 내 것이 아닌데 빼앗아 내 것이 된 것이 노략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목숨을 보존하고, 연장하고, 덤으로 주고, 더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대가는 오래 사는 것입니다. 건강한 것입니다. 생명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을 목숨도 살리고, 생명을 연장하시고, 죽지 않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인간 생명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왕 히스기야는 죽을병이 걸렸습니다. 하나님도 히스기야에게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고 하셨지만 히스기야가 벽을 향하여 통곡하며 기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해 주셨습니다. 욥기 5장에는 의인은 장수하다가 무덤에 들어가는데 곡식단이 제 때에 들어 올림같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익기도 전에 따는 것이 아니라 잘 익은 다음에 따서 제 때에 들어 올려가게 하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대가는 생명의 축복입니다. 장수의 축복입니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하루 세 번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이 일로 고소를 당하여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사자의 밥이 되지 않고 굶주린 사자와 함께 놀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왕의 명령을 배반하여 활활 타는 불 풀무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사람들이 아무리 죽이려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의 목숨을 얻게 하십니다. 왜요?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목숨을 빼앗기지 않고 얻게 하십니다. 
  
바울은 수없이 매를 맞았습니다. 말 그대로 죽을 만큼 맞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사람들의 돌에 맞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죽은 줄 알고 도시 밖에다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숨을 빼앗기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그는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태풍을 만나서 파선을 당하고 화물도 다 버렸지만 그래도 다시 목숨을 얻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믿음으로 목숨을 잃지 않고 보존하였습니다. 
  
목숨을 다시 얻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잃을 수밖에 없는 목숨을 다시 얻었다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 다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큰 병에 걸려 죽는다고 했는데 다시 살았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간신히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똑같이 경험하는 것은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사는 것은 덤으로 사는 생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잃은들 아까울 게 없다는 것입니다. 
  
변화산 아래의 한 간질병에 걸린 아이의 아버지를 보세요. 아홉 제자가 고치려고 했지만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산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보자 “할 수 있거든 내 아들을 고쳐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고 그 아버지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고 간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 아들을 고치셨습니까? 그 아버지가 믿었으므로 아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을 고치시고 그 아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스크루지 현상’이람 이론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을 뻔했다가 다시 한 번 삶의 기회를 얻게 되면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죽을병에서 회복된 사람, 사지에서 살아온 사람, 탄광에서 매몰되었다가 구출된 자, 모두가 덤으로 사는 삶입니다. 이런 분들은 한 결 같이 “살려주시면 충성을 다하고 모든 것 다 바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따지고 보면 모두가 죽을 뻔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아니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데 죽을 뻔 했던, 죽음의 문턱에서 십자가로 구원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세요.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네 손을 내밀라”,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또 친구가 중풍을 앓자 친구들이 환자의 침상에 줄을 묶고 천정을 뜯고 예수님 앞에 친구를 달아내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믿음이 행위를 만나면 그 대가는 치유, 살림, 생명, 희망입니다. 
  
저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입에 바이오세라믹 조각을 물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효과도 없는 유리조작을 물고 있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래도 물고 있습니다. 유리조각의 효능을 믿지 않으면 아무리 물고 있더라도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 약과 의술이 마찬가지입니다. 안 믿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나았다’고 선포하십니다. 믿는 자에게 치유의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동사를 활용하는 데에 우리 삶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원한다’(to want), ‘소유하다’(to have), ‘행하다’(to do)입니다. 이것들 중 그 어떤 것도 잊지 않는 것은 어떤 궁극적 중요성을 지닙니다. ‘존재하다’라는 근본적인 동사가 그것들을 뛰어넘고 포함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것들이 더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존재하다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존재하다’(to be)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 외의 아무 것도 가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주고 네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십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돈을 살리려고 목숨을 버립니다. 보물 때문에 목숨을 버립니다. 그러나 죽고 나면 수 만 가지의 보물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의 목숨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합니다. “믿음은...이다”라고 합니다. 믿음은 바로 지금, 현재라는 영역에서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어제의 하나님이나 내일의 하나님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에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는...이다”라고 하시지 “나는...이었다” 또는 “나는...일 것이다”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가도 현재적 보상입니다. 

  결론 

히말라야 고산족들이 양을 사고 팔 때에는 양의 무게, 양의 생김새를 보지 않고 양을 가파른 비탈에 두고 파는 자와 사는 자가 지켜봅니다. 양이 비탈 위로 올라가면 비싸고 아래로 내려가면 싸다고 합니다. 올라가는 양은 산 중턱에 이르지만 내려가는 양은 협곡에서 굶어 죽게 됩니다. 내려가면 우선 쉽고 살 것 같지만 오히려 죽음이 기다립니다. 올라가면 잠시 힘들지만 사는 길입니다. 믿음의 원리가 이와 같습니다. 우선 쉬운 길을 종래 죽는 길이고 우선 어려운 길은 사는 길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원수의 손에 팔려가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죽지 않고 노략물같이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라고 인정할 만큼 믿음으로 사세요.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위로 올라가세요. 정상에 곧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평안이 있고 하나님의 보좌가 있습니다.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반드시 그 보상과 대가가 따릅니다. 이 약속을 믿고 풍성한 축복 가운데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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