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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중한 자유 (갈 5: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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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자유 (갈 5:13-15)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를 만끽하지 못하는 것과 또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는 것은 비례합니다. 은혜와 자유는 같은 것은 아니지만 비례합니다. 은혜가 많을수록 더 자유해 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제일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부분입니다. 저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론적으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 삶에서 얼마나 구가하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베드로도 그것을 잘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읽어보면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에 왔을 때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누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식사를 하지 않는 것처럼 위선을 행할 때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성도님들끼리 와인 잔을 기울이다가 목사가 심방한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와인 잔을 치우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면 그리스도인들끼리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갔다가 교인을 보고 기둥 뒤에 숨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많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마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베드로도 이런 면에 있어서 자유하지 못한 면이 있었다면 우리는 오죽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인간의 자유함을 제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입니다. 사백년 동안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해방을 얻었습니다. 노예 해방. 미국의 흑인노예들이 해방을 맞은 지 이제 백오십년 남짓 되는데 적어도 삼천 오백년 전에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을 얻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하버드 신학교의 하비 콕스 교수는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에서 그저 정치적, 법적인 자유함뿐만이 아니고 여러 가지 차원의 자유함이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인간의 신격화로부터의 자유라고 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왕은 신이에요. 일본에서는 이십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그들의 국왕을 신격화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뭐라고 합니까. 천황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로마시대에서 황제를 신으로 높였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모세가 애굽의 왕 바로에게 다가가서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을 놓아주라고 명하고 바로가 거기에 순종할 수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요 인간은 신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자유하게 했는지는 다 상상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피조물의 신격화로부터의 자유함입니다. 예로부터 인류는 자연을 두려워하고 섬겼습니다. 산에 가면 산신령이 있고 바다에 가면 용왕신이 있고 고목나무에도 신이 있고 심지어 부뚜막에도 신이 있고 장독대에도 신이 있습니다. 많은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했습니다. 타부라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신들의 비위를 건드렸다가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했어요. 그걸 피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제1계명과 제2계명이 그러한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유하게 했습니다. ‘너희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제1계명이지요. 또 ‘너희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것의 형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에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 제2계명이에요.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고 그 이외의 것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속박이 아니고 해방이에요. 

세 번째는 십계명을 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자율과 또 자립을 얻게 하신 것인데 이것은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이지만 저는 하비 콕스 교수의 해석이 옳다고 봅니다. 그건 십계명과 율법을 주신 것이 마치 무엇과 같냐면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 통치 삼십 육년에서 벗어나서 독립국가가 되고 주권국가가 되어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헌법을 만든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 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바로 제헌절입니다. 제헌절이 왜 귀중하냐? 남이 하라는 대로 따라하는 것은 식민지 국가나 하는 것이고 주권국가, 독립국가는 스스로 법을 만들어서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주국가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십계명을 받기 전까지는 남의 종이었어요. 남이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자라고 하면 자고, 일하라고 하면 일하고, 쉬라고 하면 쉬고,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고, 종은 자기 스스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해방을 얻은 다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자치국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자치라는 말은 스스로 自에 다스릴 治, self rule, autonomy, 자율, 자주,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라크가 사담 후세인이 죽은 후에 자유함을 얻었지만 사담 후세인의 동상을 끌어내는 것이 자유함의 증거가 아니고 자기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자립국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직도 어렵습니다.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냥 유리창을 깨고 불을 지르고 길거리에서 뛰어다니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지만 자기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자유함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냥 남이 명령하는 대로 수동적으로 따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능동적인 인간, 자기 마음속에 옳고 그른 것을 알고 분별하고 그것을 스스로 따를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을 자유하게 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사람들이 변질시킨 것처럼 이것도 하나님의 원래 뜻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자유하게 하는 법이 아니고 부자유하게 하는 법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첫 번째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만들어버렸어요. 사람에게 규칙을 줘 보세요. 그리고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시면 그 규칙을 가지고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수업 중에 떠둘지 말라는 법규를 만들어 줘보세요. 그럼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선생님, 쟤가 수업 중에 떠든대요! 쟤는 나쁜 애래요!’ 학생들이 스스로 떠들지 말라는 취지에서 규칙을 주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좋은 학생과 나쁜 학생, 말을 잘 듣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모범학생과 불량학생을 구별하는 기준이 돼 버리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도 그 속에 바리새인의 유전자가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나는 옳고 쟤는 틀리다, 그런 빙거를 주게 되면 얼마나 율법주의적인 존재가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둘째는 율법의 정신보다는 문자에 매이는 결과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고친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은 원래 사람들이 쉬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쉬라고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을 위해서 준 것입니다. 

특별히 자기 스스로 휴일을 얻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 종, 남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위해서 모두가 안식일에 쉬게 하면 그들도 쉴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육일은 열심히 일하고 칠일 째는 쉬어라, 얼마나 좋습니까. 얼마나 인간을 배려하신 하나님의 지혜입니까. 오늘날의 법정 공휴일과 같지요. 직장인들이 얼마나 고대합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사람을 속박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뭘 하면 안 되고, 뭘 하면 안 되고, 여러 가지 해서는 안 되는 많은 규칙을 만들어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 고치는 것을 시비를 걸었어요. 다른 날 병자를 고치지 왜 하필이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느냐. 그런데 이런 비판을 한 사람들 본인은 다른 날 병자를 고쳐주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날도 안식일도 어느 날도 병자를 못 고쳐주면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 고치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한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다.’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것은 안식일뿐만이 아니고 율법 전체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세 번째 부작용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하나님 때문에 인간이 부자유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father-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실제로는 father가 아니고 bother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귀찮은 존재, 간섭하는 분. 하나님이 왜 나의 삶에 간섭할까. 하나님만 없으면 내 뜻대로 살 수 있을 텐데.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느냐? 아닙니다. 다 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사람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적질 하지 말라고 했다고 도적질 안하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간음하지 말라고, 살인하지 말라고 했다고 살인하지 않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거짓증거 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사람들이 거짓말 안하고 삽니까? 다 합니다. 하고 싶은 것 다 합니다. 

그러면서도 말하기를 하나님만 없으면 내가 자유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타락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왜 하나님을 탓합니까. 하나님 때문에 못하는 게 아니고 있는데도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하나님만 없으면 인간이 자유해질 수 있을 것이다. 설령 그런 자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입니까. 과거 원시시대로 돌아가서 원시인처럼 살겠다는 얘기입니까? 야만시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입니까? 자기 멋대로 도적질하고 죽이고 약탈하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얘기입니까? 그것이 인류에게 유익하다는 얘기입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특별히 무엇을 하고 싶어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게 아니고 그냥 하나님이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편한 것입니다. 정말로 자유를 위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 섬기기가 싫은 거예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처럼. 이건 애초부터 사람들 본능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한가지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이 아주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이 말은 자유하라고 부르셨다, 자유하게 만드셨다, 자유하기를 원하신다, 자유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얘기입니다.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이 말씀이 진리에요.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정 반대에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자유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함을 위해서 부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관건은 그 자유함의 용도가 무엇이냐, 그 자유함의 유효함이 어디까지냐 하는 문제인데 그 자유를 내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느냐 그게 관건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어떤 것을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13절의 말씀입니다.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그 말은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선택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를 삼을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론적으로 가능해요. 자유니까. 그러나 그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목적은 아닙니다. 거기에서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육체의 기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자유니까. 그러나 그게 하나님의 목적은 아니에요. 그럼 하나님이 무슨 목적으로 자유를 주느냐?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그 말은 섬기라는 뜻입니다. 역설적인 진리에요. 자유는 내가 누구를 더 이상 섬기지 않고 내 뜻대로 살기 때문에 자유 아닙니까. 그런데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목적은 섬기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만 노예의 섬김과 자유인의 섬김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사랑의 유무입니다.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그게 결정적인 차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의 가장 고귀한 표현은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자유인이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어부의 신발을 보면 안토니 퀸이 시베리아 정치수용소에 이십년 동안 수감돼 있다가 석방됩니다. 이십년 만에. 기자가 그에게 묻습니다. ‘자유를 얻은 소감이 어떻습니까?’ 그랬더니 안토니 퀸이 대답하기를 ‘나는 수용소 안에서도 자유 했다.’고 했어요. 사랑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영혼은 자유한 것입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가난하든 남의 밑에 매여 있든 남의 나라의 통치를 받든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사람의 영혼이 정말로 자유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느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인간의 자유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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