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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1) (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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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1) (계 2:1-7)


지난 20세기에 전세계 교회의 화두는 교회 성장이었습니다.  그 결과 한국 교회는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무리한 성장의 뒤안길에서 적지 않은 역기능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한국 교회는 안팎으로 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21세기에 들어와서 교회의 화두는 더 이상 성장이 아니라 건강교회입니다.

건강한 교회라는 말은 반대로 병든 교회가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린 교회란, 교회의 본래적인 기능을 상실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건강한 교회란, 교회 본래의 목적과 기능을 잘 수행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들을 보면 그 교회의 표어를 '주를 기쁘시게 하는 교회'라고 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를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교회의 본래적인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바로 건강한 교회인 것입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건강한 교회는 오늘 우리들이 추구하는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건강하여 지면 그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슬픈 자들이 교회에 오면 위로를 받습니다.  낙심한 자들이 교회에 오면 새 힘을 얻습니다.  죄를 짓고 잘못된 자들이 교회에 오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 새 삶을 살게 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바로 그러한 은혜로운 교회,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은 우리 사회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우리들의 이웃이 우리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참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오늘의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라는 물음일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그분은 실제로 우리가 온 몸으로 섬기며 세워가고 있는 우리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저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오늘부터 요한계시록 2장에 나타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통해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부터 몇 주간에 걸쳐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일곱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교회의 현주소를 진단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진단을 통하여 우리 교회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교인들이 교회를 통하여 복을 받고, 또 우리의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아마도 오늘의 본문은 이 지상에 존재했던 교회들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밝히신 유일한 본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단 이것은 당시에 존재했던 일곱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들을 향한 주님의 메시지임을 아셔야 합니다.  7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뜻하는 매우 상징적인 것으로 일곱 교회는 바로 당시의 모든 교회와 오고 오는 시대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교회로서 선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서 오늘의 우리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사도 요한은 당시 A. D. 81년부터 96년까지 로마를 통치했던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 치하에서 아주 극심한 핍박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요한은 전도하다가 붙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터키에 속한 에베소에서 약 80km 떨어진 현재의 그리스 영토인 밧모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계시를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계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정황에 대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당시에 존재했던 일곱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내용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소아시아에 주신 주님의 메시지를 읽어보면 여기에는 일정한 틀을 지닌 형태로 전개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먼저는 그 교회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입니다.  다음으로는 칭찬과 권면과 책망과 경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에베소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습니까?

본문 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여기에서는 우리 주님이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걸어다니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은 계시록 1장 20절에 이미 해설되어 있습니다.  1장 20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여기에 보면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입니다.  그리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 곧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2장 1절에 보면 예수님이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오른 손으로 일곱 교회의 지도자들을 붙잡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촛대 사이로 왔다 갔다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셨을까요?  하나님은 교회의 존재를 위해서 지도자들을 세우십니다.  그러나 교회의 운명은 결코 지도자에게 달려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도자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만약 교회가 지도자에게만 의존되어져 있다면 예수님의 교회는 벌써 이 땅에서 오래 전에 없어졌을 것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지도자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교회의 지도자들을 주님께서 오른 손으로 붙잡고 계시기 때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다 부족하고 흠이 많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능력의 오른손으로 붙잡고 계십니다.  동일하게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분과 저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교회된 소명을 감당해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우리 교회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교회 사이에서 운행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지금 그분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일곱 교회들 가운데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첫 번째로 편지를 썼을까요?  그 이유는 사도 요한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밧모섬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는 당시의 소아시아에서 가장 커다란 도시로 소아시아의 수도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던 도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에베소를 향해 첫 번째로 사도 요한을 통해서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본래 에베소 교회의 시작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이 제3차 선교 여행을 할 때에 에베소가 선교적으로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곳에서 2년 반을 머물면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도를 함으로써 시작되었던 교회가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초대 목사는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3년 후에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나가면서 이 교회의 지도자로 디모데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이곳을 떠나가면서 교회 전승에 의하면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의 세 번째 지도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이곳에 왜 왔을까?
복음서를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요한에게 자기의 어머니를 부탁하신 장면이 있습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A.D. 67년을 전후하여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당시에 교회가 부흥하고 있었던 에베소로 오게 됩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사도 요한의 지도 아래에서 이끌리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을 통해서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계시를 받아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가 주님께로부터 받았던 칭찬은 무엇입니까?
본문 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에베소 교회가 칭찬 받은 것은 크게 말하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입니다.  사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초기부터 많은 박해와 시련을 겪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의 전도로 다이아나 신전 주변에서 여신의 우상 신상을 만들어 팔던 상인들이 생계의 위협을 받자 바울과 그리스도인들을 격렬하게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인들은 위축되지 않고 여전히 복음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전도했고 인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거짓된 자들을 드러낸 것입니다.  도대체 이 거짓된 자들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가를 6절에서 추론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 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여기에 보면 니골라당이 나옵니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니골라당은 니골라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단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도행전 6장에서 니골라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일곱 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을 세우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니골라였습니다.

학자들은 니골라 집사가 처음에는 좋은 신앙의 모습을 보였지만 나중에 잘못된 사상을 받아들여서 율법주의적 방종에 빠지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지만 마음대로 살아도 좋다.  그래서 부도덕한 방종을 가르치는 그런 이단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사에서 끊임없이 나타나서 교회를 혼란에 빠뜨렸던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주님이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이런 이단들을 잘 분별해서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런 이단들을 찾아내서 교회에서 쫓아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우리들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러나 복음이 우리들에게 자유를 준다는 말이 우리를 방종으로 인도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복음의 자유 안에 삽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기대에 합당하게 살도록 우리의 삶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 책임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칭찬 받을만 하고, 진리를 지켜 거짓된 것을 분별하여 바른 신앙을 지켰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칭찬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에베소 교인들은 주님의 책망을 들어야만 했던 치명적인 한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가 주님께로부터 받았던 책망은 무엇입니까?

본문 4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한 마디로 말해서 첫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첫 사랑은 인간적인 관계에서의 첫 사랑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에서의 첫 사랑입니다.  인간의 모든 사랑은 변질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가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사랑은 아무리 뜨거워도 시간이 지나면 식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본다면 분명히 에베소 교인들이 처음에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열심히 성도들을 돌아보고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이 사랑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따끈했던 사랑도 언제부터인가 식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교회가 칭찬 받았던 것이 거짓된 이단으로부터 진리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정통성을 사수하려고 지나치게 노력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지나치게 비판적으로 감시하면서 서로간의 불신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점차 이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식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른 진리를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바르게 믿는다는 것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사랑의 균형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면서도 이것은 언제나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강조하다 보면 사랑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을 강조하다 보면 진리를 놓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리가 없는 사랑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진리가 없는 사랑은 감상적인 사랑입니다.  무기력한 사랑입니다.  이것은 아무에게도 유익이 될 수가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진리를 가르치지만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인간을 질리게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에베소 교회가 바로 그러한 상태에 직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진리를 지키는 일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참으로 중요한 사랑을 잃었다는 것이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어떤 모습의 교회입니까?

그 대답은 첫 사랑의 열정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비밀을 본문인 5절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5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두 개입니다.  생각하라.  회개하라.  네가 그 첫 사랑에서 어떻게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  그리고 회개하라.  그래야만 첫 사랑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사랑을 회복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부들이 사랑이 식어지고, 사랑에 위기를 만나게 될 때 상담자를 찾아가면 상담자는 이런 위기 속에 있는 부부들에게 추억 여행을 해 보라고 권한다고 합니다.  이들이 뜨겁게 사랑했던 그 사랑의 추억이 있는 곳으로 여행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곳, 우리가 첫 사랑의 고백을 하던 그곳, 첫 프로포즈를 나누었던 그곳, 그리고 사랑의 언약을 다짐했던 그곳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통해서 지난날의 그 결심에서 우리가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에 대한 현실을 발견하게 되고 그 사랑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주 내가 주님을 처음 만난 그곳으로 기도의 여행을 떠날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서 내가 주님께 드렸던 약속과 결단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언제부터 내가 그 언약, 그 결심에서 멀어져 갔는가를 기억해 내셔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회개한다는 것은 단순한 반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회개한다는 말은 쉽게 말하면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탕자가 회개를 했습니다.  그것은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당연히 서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과 나 사이에 첫 사랑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랑의 자리에로 다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내가 왜 주님과의 관계에서 사랑이 멀어졌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를 등한히 하셨습니까?  기도의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혹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일에 등한히 하셨습니까?  말씀의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내가 주님과 교제하는 경건의 시간을 등한히 했습니까?  그렇다면 경건의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부부가 한 지붕 밑에 산다는 사실만으로 부부의 사랑이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한 지붕 밑에 살면서도 남남 같은 부부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부부라고 하지만 어느 날 보니까 마치 전혀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한 지붕 아래에 존재하는 부부들이 적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 사랑을 잘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의사소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서로 말을 해야 합니다.  내가 왜 힘이 드는지, 무슨 불만이 있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를 경청해야 합니다.  힘들어도 경청해야 합니다.  서로 대화를 하고, 의사를 소통하고,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 사랑의 불꽃은 다시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의사소통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열정을 상실하는 가장 보편적인 원인도 주님과의 교통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라고 지적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어떤 모습의 교회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첫 사랑의 감격이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여러 가지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무슨 큰 일을 하기보다는 주님이 보시기에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사람이 큰 일을 해 보았자 주님이 보시기에 그것이 얼마나 큰 일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마르다와 마리아가 생각이 나십니까?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분주히 돌아다니다가 짜증이 났습니다.  일하지 않고 도와주지 않으면서 가만히 앉아 있는 동생 마리아를 보면서 신경질이 났습니다.  이런 마르다의 모습을 보고서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마음이 너무 분주하다는 겁니다.  그런 분주한 마음, 질투하는 마음, 정리되지 않는 마음으로 나를 위해 일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일이 능사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면서 주님 앞에 머물러 있었던 마리아를 보면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좋은 편을 선택한 거야."

사랑하는 여러분, 건강한 교회,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주님을 생각하면 아직도 사랑으로 가슴이 뛰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한 번 불러도 그 이름의 소망 때문에 행복에 겨워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공동체입니다.  저는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때때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주님에 대한 사랑이 욘 사마(배용준)의 열정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생각을 해 봅니다.  일본 사람들이 욘 사마의 사랑을 느껴보려고 욘 사마가 출연했던 그 드라마 현장에 얼마나 많이 오는지 모릅니다.  드라마 속의 허구적인 사랑일 뿐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일본인들의 이런 성향을 분석하기를 일본인들이 순결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나서 드라마 속에서라도 그 사랑을 찾고 싶어서 허구의 사랑을 찾아 한국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있지도 않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있지도 않은 허구의 사랑, 욘 사마의 사랑을 어떻게 예수 사마의 사랑에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으신 분이십니다.

요한계시록의 동일한 저자인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사랑의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1)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이웃에 있는 형제와 자매들에게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증거 되고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이토록 사랑의 메시지를 강조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요한이 누구보다 사랑의 체험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랑하는 주님이 마지막 이 땅을 떠나기 전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주시면서 가르쳐 주신 다락방의 교훈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한복음 13장 34절 이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한 마디로 말해서 주님의 제자는 서로를 사랑할 때 증거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사랑의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마당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저 주일 오전에 한 번 와서 예배를 드리고 흩어지는 것으로 이런 사랑의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세워지고, 저와 여러분들이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목장 속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을 사랑하기로 결심하셔야 합니다.  그들의 허물과 상처를 끌어 앉고, 이해해 주고, 용납해 주셔야 합니다.  그들의 인생의 짐을 들어주고, 같이 울어 주고, 같이 기도해 보십시오.  거기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우리 이웃들의 발을 씻겨주며, 서로의 상처를 안고 사랑을 배워가며 치유를 경험해 가는 그 곳, 바로 거기에 우리 교회의 미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쇼가 아닙니다.  사랑은 행사도 아닙니다.  사랑은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어디에서 연습할 수가 있습니까?  그저 주일에 한 번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만 만족하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마당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장이 필요한 것입니다.  작은 공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사랑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 교회는 우리 모두가 소망하고 기대하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AD 96년에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가 죽은 후 사도 요한은 밧모섬의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에베소 교회로 돌아옵니다.  몸은 지치고 나이는 늙었습니다.  그때 사도 요한의 18번 설교가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였다고 합니다.  똑같은 설교를 너무 많이 하다보니까 사도 요한을 설교단 의자에 앉게 하면서 요한의 제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오늘은 우리에게 새로운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그때 사도 요한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소자들아,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그렇습니다.  사랑의 메시지 그 이상의 메시지는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노벨상을 수상하는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직도 세상을 움직이는 힘, 그것은 사랑입니다."  맞습니다.  아직도 여러분과 제가 목말라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목말라서 우리의 가족, 우리의 자녀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힘들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어떤 집사님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위로를 주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로를 받기 보다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공동체는 사랑이 시작될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이해를 받기보다는 이해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공동체 속에는 뜨거운 사랑의 기운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기를 내어 주심과 같이 우리도 자신을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낮아짐으로써 온전히 내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공동체는 사랑의 불꽃으로 뜨겁게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사회를, 그리고 우리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유일한 대안은 아직도 주님 가르쳐주신 사랑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는 그 사랑이 넘쳐흐르는 공동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가 그런 건강한 교회,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교회를 만드는 놀라운 작업은 당신에게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이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사랑하십시오.
거기에서부터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공동체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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