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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시련 (약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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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시련 (약 1:1-4) 
 
 
2011년을 시작하면서 성도의 삶의 핵심은 행동의 변화 이전에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야고보서를 통해서 ‘참 믿음을 가진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배우면서도 먼저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서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절은 문안 인사인데 “야고보”가 이 서신의 발신자입니다. 야고보라는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바꾸면 ‘야곱’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 민족의 조상인 야곱을 대단히 존경했기 때문에 이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무척 많습니다. 신약성경에도 여러 명의 야고보가 등장합니다. 학자들은 그들 중에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발신자라는 주장과 그가 AD 62년경에 순교했으므로 최소한 야고보서는 그전에 기록되었다는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좋은 자세 중 한 가지는 불분명해서 짐작한 일에 대해서는 참고만 하고 분명한 말씀에 보다 관심을 두는 태도입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실은 “야고보”가 자기의 출생 배경을 말하는데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사회적으로 어떤 신분인지 교회에서 어떤 직책을 가졌는지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이것이 교회의 중요한 특징인데요, 출생 배경이나 사회적 신분이나 종교적 직책이 큰 의미를 가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신분을 가장 의미 있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종은 ‘노예’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칭호가 명예롭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종은 오직 주인의 말씀을 전달하며 주인의 뜻대로 사는 존재입니다. 이 서신은 바로 그런 존재에 의해 쓰였습니다.

수신자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입니다. 1차적으로는 핍박으로 뿔뿔이 흩어진 유대계 성도들을 의미할 것이고, 확대하면 오늘날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도들이 되겠지요. “흩어져 있는”(디아스포라)이라는 말은 수신 교회의 상황이 정든 땅을 떠난 나그네 처지임을 말해줍니다(벧전 1:1; 행 2:5). 사랑하던 가족 친지가 흩어진 상황, 특히 사랑하는 성도들이 흩어져 있는 상황은 그 자체가 진한 애달픔을 느끼게 합니다. 야고보는 그들을 잊지 않고 “문안”합니다. 비록 흩어져 있을지라도 아픔을 이기고 더욱 하나님 백성다운 모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내 형제들아”라고 부르며 권면을 시작합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 교회적 삶이 늘 행복의 꽃동산은 아닙니다. 흩어져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에는 가시밭 같은 시험들이 있습니다. “시험을 만나거든”은 ‘시험에 빠지거든’, ‘시험에 넘어지거든’이라는 뜻입니다. 삶의 여건이 넉넉하면 넉넉해서, 부족하면 부족해서 시험에 빠집니다. 여유가 있으면 여유가 있어서, 바쁘면 바빠서 시험에 넘어집니다. 때로는 미워했던 사람만이 아니라 사랑했던 사람들 때문에 더욱 시험에 빠집니다. 

목사가 아끼던 성도 때문에, 성도가 존경하던 목사 때문에, 혹은 성도가 사랑하던 성도 때문에 시험에 넘어집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거나 재산상의 피해를 당합니다. 너무 억울해서 잠 못 이룰 일을 당하기도 하고, 수치스러워서 참을 수 없는 일을 겪기도 합니다. 참으로 성도들의 삶에도 일일이 나열할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은 시험들이 있습니다.

대체로 시험이란 할 수만 있다면 빨리 벗어나고만 싶은 괴로움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시험에 직면한 교회에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명령합니다. 시험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처방은 한 가지입니다. 우선 이 말씀이 ‘시험을 즐기라’는 뜻이 아님에 주의해야겠습니다. 고통 속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면 특이한 상태이지 정상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인간은 고통을 당하면 고스란히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은 ‘온통 즐거움으로 간주하라’는 뜻입니다. 즉, 시험에 대한 느낌이 아니라 시험에 대한 생각을 바꾸라는 명령이지요. 고통스러운 느낌을 즐거운 느낌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생각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시험에 빠지면 슬픈 생각이 강화되고 증폭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도 온통 회색빛일 것처럼 상상하기 쉽습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연민이 생기고 마음이 약해지면서 힘이 빠집니다. 실망이 강화되면 낙망이 되고, 절망으로 증폭된 후에 사망에 이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때에 괴로운 생각을 계속 고수하면서 쭉 밀고 나가지 말고 생각하는 관점을 180도 바꾸도록 명령합니다. 슬퍼할 일이 아니고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3). “시련”(도키미온)이라는 말은 용광로에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하게 정제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성경은 성도 개인이나 교회가 만나는 “여러 가지 시험”을 믿음에서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순수하게 만드는 “믿음의 시련”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도의 믿음은 처음부터 순수하지는 않습니다. 마치 온갖 불순물들이 섞여 있는 금광석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내 뜻대로 사는 일도 흔합니다. 믿음으로 결단했다고 하지만 그 결정이 내게도 유익했기 때문인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지만 내게도 영광이 되는 일이기에 선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믿는 것이 내 삶을 행복하게 하기 때문에 그분을 믿기도 합니다. 그 믿음이 가짜는 아닙니다. 분명 금덩이지만 불순물들이 많이 섞여 있다는 것이지요. 그 모양 그대로는 하나님의 백성답지도 하나님 자녀답지도 않습니다. 가끔 그런 면이 보이지만 대체로는 세상 사람들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삶의 과정 중에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해 시련됩니다. 용광로에 녹여지는 과정과 일정한 틀에 부어져서 두드려지고 깎이는 과정을 겪습니다. 그런 후에야 순금 보석이 됩니다. 점차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그분 백성의 모양이 갖춰지고 하나님 자녀다운 빛이 나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불순물이 남아있지만 불순물 가득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빛납니다. 시험이 없다면 시련도 없고 금광석이 순금이 되지도 않습니다. 시험이 전혀 없다면 성도이긴 하되 성도 같지 않을 것이고 교회이긴 하되 교회 같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이 그렇게 지내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 탁월하게 쓰임을 받았던 인물들은 모두 시련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요셉도 모세도 다윗도 다니엘도 여러 가지 시험들을 받았지요. 욥은 많은 자녀들을 한 날에 잃었고, 재산을 몽땅 잃었으며, 건강까지도 잃었습니다. 욥에게 있어서 삶은 너무나 혹독하고 잔인한 현실이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의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고까지 했을까요. 그의 친구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충고한답시고 욥을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욥은 선언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욥은 아무도 나를 몰라준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나의 길을 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히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하시는 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미래가 암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정금이 되어 빛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당신님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욥은 큰 즐거움과 기쁨을 얻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시험은 결과적으로 성도에게 “인내”라는 성품을 가지게 합니다. 이는 시험 자체가 가진 힘이 아니라 시험을 시련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성도와 함께 하기 때문이지요. 인내는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좌절하지 않는 불굴의 성품을 뜻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말은 ‘인내가 충분히 일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표준새번역은 4절을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로 번역했습니다. 인내를 통해 성도는 성숙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와 교회가 성숙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자라지 못하는 성도와 교회에게는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 5:12-14)라고 말씀합니다. 성도와 교회의 성숙은 이론 교육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시험을 통해 불순물이 빠지는 인내의 과정 속에서 성도는 점점 성도답게 교회는 점점 교회답게 세워져갑니다.

이상의 말씀을 보면 개인적으로든 교회적으로든 시험이 없다는 것은 전혀 축복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시험이 없다면 성숙함도 없다고 할 수 있겠지요. 시험을 당해 보지 않았다면 머리로 믿고 있는 그 믿음의 진정성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셈입니다. 그 믿음은 견고하지 않으며 깨어져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계속 그 상태로 머문다면 큰 불행이지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 정말 왜 이러십니까?’라고 따지고 싶은 상황, 혹은 ‘하나님! 살려 주세요’라고 부르짖어야 할 상황, 그것이 눈물 흘리게 하고 가슴을 찢게 만들지만 역설적으로 감사 제목이 된다는 사실을 봅니다.

성경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고 했습니다. 시험 당한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무척 괴로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그만한 믿음은 있다고 평가하셨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만난 여러 가지 시험이 지독히 아플지라도 말씀들 앞에서 생각을 바꾸고 인내하며 성숙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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