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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 (호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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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속의 사랑 (호 3:1-5)


호세아 3장은 호세아가 아내를 사랑해서 노예 된 아내를 다시 사온다는 연속극의 한 편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위대하신 분이시라 이런 연속극을 가지고 우리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큰 교리를 가르치십니다. 호세아 3장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중요한 교리는 “구속”(Redemption)입니다. 저는 성경을 처음 읽을 때나 지금이나 구속이라는 단어가 좀 불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셨다고 하면 꼭 경찰서에 끌려가는 느낌이 들어서 구속이라는 단어가 대단히 불편하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3장을 통해서 구속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고멜이라는 여자는 호세아의 아내로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우상숭배를 하고 영적으로 타락했는가를 상징하는 여인입니다. 고멜은 2남 1녀를 낳고서도 바람이 났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따라간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을 하는 것입니다. 고멜이라는 여자가 바람이 난 이유는 호세아 3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호 3:1) 

그냥 쌀로 만든 찐 떡은 별로 맛이 없지만, 건포도가 들어가면 떡을 씹을 때 건포도가 같이 씹혀서 얼마나 맛있는지 모릅니다. 고멜이 우상숭배에 빠진 이유는 바로 이 건포도 떡 얻어먹는 재미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려서 큰아버님이 소천하셨을 때 절에 모셨는데, 절에 따라가 보면 밥을 줍니다. 고사리도 주고 튀각을 주는데 저는 지금도 절에서 먹은 튀각의 끝 맛이 얼마나 고소하고 상큼한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절에 가자 그러면 밥 얻어먹으려고 따라갔습니다. 절에서 주는 밥이 좋아서 절에 가는 사람처럼 고멜도 건포도 떡이 좋아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것입니다. 
  
고멜은 결국 이 남자, 저 남자 따라다니다가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거지가 되었고 노예 시장에 팔려나온 신세가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고멜의 남편이자 선지자인 호세아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집에 가만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면서 수동적으로 고멜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만 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호세아는 구원을 행동으로 보이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원하겠다고 말만 하지 않으시고 실제 행동으로 보이십니다. 
  
호세아서 3장 1절을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나와 있지 않지만, 영어 성경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향해서 하는 말에 명령형으로 동사가 먼저 나옵니다. “Go, show your love to your wife again” 너의 아내에 대한 너의 사랑을 가서 다시 보여주라는 명령에 따라 호세아는 방에 앉아 있지 않고 노예 시장에 팔려 나온 아내를 찾아 나서게 된 것입니다. 호세아가 만약 먼저 찾아오지 않았다면 고멜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결국, 노예로 팔려가서 짐승취급을 받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먼저 찾아오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는 아무 소망도 없이 구원도 없고 천국도 없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물으시고 먼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주권적인 사랑이요, 주도적인 사랑이요, 능동적인 사랑이요, 행동적인 사랑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고멜을 향한 호세아의 사랑으로 예표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I. 하나님의 사랑은 “구속적인 사랑”이다. 

구속이라고 하는 말은 사람을 감옥에 구속시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속전의 ‘속’과 구원의 ‘구’가 합쳐져서 구속이 된 것입니다. 영어로 Redemption은 ‘re’는 ‘다시’라는 말이고 ‘demption’은 ‘사들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자기 것이었는데도 다시 사들이는 것이 구속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노예가 되는 이유는 대체로 3가지입니다. 첫째, 전쟁에 져서 포로가 된 경우입니다. 쇠사슬로 다 묶어서 끌고 와 노예 시장에서 파는 겁니다. 둘째, 부모가 노예이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노예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셋째, 본인이 방탕해서 빚을 지고 이 빚을 갚을 수가 없어서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멜의 경우는 세 번째입니다. 방탕해서 빚을 지게 되고 빚을 갚을 수 없으니까 노예가 된 것입니다. 
  
호세아는 고멜이 본래 자기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내 아내니까 데려가겠다고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멜이 빚을 졌기 때문에 당신이 남편이라도 돈을 내고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은 열다섯 개에, 보리 한 호멜 반을 주고 고멜을 삽니다. 호세아는 본래 고멜이 자기 아내이지만 돈을 주고 다시 샀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Redemption)인 것입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구속한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신 사건의 드라마틱한 예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택한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성경에서 자기 백성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소유되었던 백성인 우리가 죄에 팔려 버렸습니다. 죄를 지어서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세상은 죄와 사망과 마귀의 노예 된 우리를 사기 위해 종교도 내어놓고 갖가지 교육도 내어 놓고 철학도 내어 놓고 사상도 내어 놓았지만, 죄와 마귀의 손아귀에서 그런 것 가지고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자신의 생명과 피 값을 내놓겠다고 하니까는 더 이상 나서는 자가 없어서 우리는 예수님께 낙찰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노예 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자신의 생명 값을 치르고 다시 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우리를 사기 위해서 기꺼이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 값만큼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구원은 공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치르신 값은 결코 공짜가 아닙니다. 그것은 금으로도 안 되고 은으로도 안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값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신약 성서를 보게 되면 “구속”, “속전”, “대속물”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대속물은 노예를 사기 위해서 치르는 속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이 땅에 오신 것이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는 말만 하고 가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속전으로 치르시고 하나님 아버지가 택하신 많은 사람들을 다시 사들이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대속물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께서 온 세상 모든 죗값을 다 갚았다고 그러는데,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전 그것은 신학이 잘못된 거짓말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택하신 사람들의 죗값을 치루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신 영혼들의 죗값을 치르고 그들을 사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저는 알미니안 주의는 바른 신학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캘빈 신학이 압도적인 진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성령께서 이것이 진리라고 하는 확신을 제 영혼에 확실히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이 진리를 증거하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저는 마태복음 20장 28절을 볼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이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많은 사람 중에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딛 2:14) 

예수님께서 자신을 주셨습니다. 왜 주셨냐면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자신의 값을 치러 불법에 매여 있는 우리를 해방하시고 선한 일에 열심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벧전 1:18-19) 

이 말씀은 구속에 대한 더 확실한 말씀입니다. 호세아가 가짜 은과 보리를 가지고 고멜을 산 것이 아닙니다. 진짜 은과 보리로 속전을 치르고 고멜을 다시 사들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의 진짜 피를 주시고 죄와 불법과 망령된 행실에 빠져서 영원한 형벌 받기 위해 지옥에 가는 우리를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사랑은 “명령적인 사랑”이다.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 바로 살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전에는 호세아가 고멜에게 구애를 하고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호세아가 매달리지 않고 명령을 합니다. 호세아가 왜 명령을 하냐면 고멜을 노예시장에서 샀기 때문입니다. 돈 주고 샀기 때문에 이제는 고멜의 법적 주인이 된 것입니다. 명령할 수 있는 주인이 된 것입니다.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 3:3) 

호세아가 고멜을 향해서 한 명령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다른 우상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대해서 명령권을 가지는 분입니다. 물론 창조하셨기 때문에 명령권을 가지시지만 우리를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명령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셔서 우리의 합법적인 주인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향해서 명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명령하느냐 나는 명령받기 싫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명령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명령하십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 20:2) 

우리는 광야에서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애굽에서 바로 왕의 노예 생활을 하고 거기서 중노동하고 사는 것보다는 비록 광야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쫓아 사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이제 더 이상 다른 신을 우리 앞에 두고 살 수 없습니다. 내 생명의 주인은 자신이 아닙니다. 사람은 죽음이 눈앞에 닥치면 내 생명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자신 생명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라면 영원히 살지 왜 죽습니까? 결국, 내 생명을 찾아가는 분이 계시니까 죽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 생명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하는 것이 싫다면 그 사람의 주인은 딴 존재입니다. 마귀 악령이라 불리는 마귀가 주인인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마귀의 종노릇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나를 사셔서 주인이 되었으니 나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여기에 명백히 우리는 값으로 산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명령하실 권한이 있다는 것을 항상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야 될 의무가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되겠습니다. 


Ⅲ. 하나님의 사랑은 “보상적인 사랑”이다. 

호세아는 고멜에게 명령만 하지 않습니다. 호세아 3장 3절 후반을 보면 "나도 내게 그리하리라" 이것이 짧지만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가 너에게 정절을 요구하지만 나도 너에게 정절을 지키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도 남편으로서 너에 대한 정절의 의무를 다하고 너를 사랑하고 너와 교제하고 너를 떠나지 않고 너만 사랑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고멜은 참 망신스런 과거를 갖고 있습니다. 모든 수치와 죄악과 노예 시장에 팔려나가는 그런 비참한 신세로 전락 되었지만 그런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도 죄짓지 않은 아내처럼 대우해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하니까 진노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다시 사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진실임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그대로 증명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요약한 말씀이 호세아 3장 4-5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호 3:4-5) 

이스라엘 백성이 고멜처럼 우상숭배해서 결국 북 왕국 이스라엘은 B. C. 721년에 앗수르의 포로가 되고 남 왕국 유다는 B. C. 587년에 바벨로의 포로가 됩니다. 포로 되어 살다 보니까 왕도 없고 궁도 없고 그리고 제사도 없고 에봇(제사장이 입는 조끼)도 없고 드라빔(우상)도 없었습니다. 우상숭배도 못 하고 하나님도 제대로 섬길 수 없는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고멜이 노예 시장에 나온 것처럼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B. C. 539년에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게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고레스 칙령을 발표하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고향으로 돌아가 성전을 짓게 되었습니다. 또한, 호세아 3장 5절에 보면 “말일에는”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바로 신약시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때 그들이 여호와를 구하고 그 왕 다윗을 구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유대인이 말일에 신약시대의 예수님을 믿게 되어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 것입니다. 처음 복음을 전해준 열두 사도들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처음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도와 선지자들은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유대인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그리고 복음을 세계에 증거하는 복음의 핵심 국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머지 택함 받지 못한 유대인들은 불신앙을 했지만 택함 받은 유대인들은 기독교회에 기둥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호세아 3장 4-5절을 그리스도 재림얘기라고 하는데 이것은 초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초림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대로 실현되었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이스라엘에 대한 민족적인 사랑이 아니고 이스라엘 통해 세계 만민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큰 사랑의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 

5절을 보게 되면 두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경외와 은총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를 “경외”해야 합니다. 경외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무서워하거나 존경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존경하면서도 사랑하고 두려워하면서도 가까이하는 것이 경외입니다.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혜의 근본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별 볼일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물이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당신은 누구시오?”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경외만 받으시고 내려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느냐? 아닙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면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주십니다. 은총은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선하시다’, ‘좋으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온갖 선하심을 베풀어주십니다. 너희가 죄가 있으니 내가 죄를 용서해 주겠다는 사죄의 은총과 너희는 천국에 들어갈 의가 없으니 내가 너희를 의의 옷을 입혀주겠다는 칭의. 그리고 전에는 내가 너희하고 원수가 되었지만 이제는 내가 너희와 화목해서 내가 너희와 동행하겠다는 화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갖 선한 것을 주셨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서 사는 삶은 비참한 삶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예수 믿으면 비참해지는 줄 압니다. 하지만, 예수 안 믿고 마귀 종 되서 사는 것이 비참하지 예수 믿고 사는 삶은 비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온갖 선하심을 체험하면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요즘 왜 이렇게 불평하면서 사는 사람이 많은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2011년을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 받은 사람입니까? 우리 대한민국 역사 가운데 지금처럼 잘 사는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선하셨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에 선하심을 더욱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저 북한이 아무리 우리를 위협해도 악은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이생에서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을 떠나 죽어서도 영원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한 축복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해보시죠. “나는 하나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겠습니다.” 항상 이 두 가지가 여러분 입술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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