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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몸으로 드리는 예배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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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드리는 예배 (롬 12:1-2)
  

세상은 참 좁아졌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서 느끼게 됩니다. 지난 주간에는 미국의 애플사를 이끌고 있는 스티브 잡스가 다시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휴가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국내의 한 신문에서는 그가 자기의 삶을 돌아보면서 지난 200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스탠포드 대학의 졸업식에서 했던 명연설을 다시금 조명하였습니다. 마침 제게도 그날 그가 했던 연설문이 남아 있어서 다시금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잡스가 병으로 경영에서 잠시 떠났다는 이야기만으로도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고, 애플사의 주가가 폭락하게 되는 영향력을 가진 대단한 인물이지만, 그는 자기가 이제까지 오는 동안에 몇 번의 고비가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첫 번째는 이미 출생하기 전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미혼모에게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지요. 자기가 직접 아기를 기를 수가 없다고 판단을 내린 잡스의 어머니는 자기의 아이를 잘 키워줄 양부모를 물색하였고, 변호사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그는 참 평탄하게 세상을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변호사 부부가 생각을 바꾸어서 그는 갑작스럽게, 근근이 생계만을 유지하던 부부의 집으로 입양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에게 대학공부를 시킨다는 허락을 받고서야 그녀는 아이를 부부에게 보내었습니다. 그를 키운 부모는 가난하였지만, 착하고 성실하였던 모양입니다. 

약속대로 그를 대학에 보내기는 하였는데, 한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느라고 있는 돈을 다 털어 넣어야했습니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잡스는 한 학기만을 다니고 학교를 그만둡니다. 그리고는 청강생으로... 때로는 기숙사 친구의 방바닥에 누워 자기도 하고,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5센트짜리 콜라병을 모으기도 하고, 일요일 밤이면 10킬로미터나 떨어진 급식소를 찾아 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공부했던 서체들이 후에 그가 컴퓨터를 만드는 일에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 시절을 회고하며 잡스는 ‘점을 이어가듯 살았다.’고 회고합니다. 
  
결국 공부를 포기하고 친구와 함께 자기 집의 차고에서 애플이라는 컴퓨터 회사를 설립하였는데... 10년 만에 매출액 20억 달러에 4000명의 직원을 가진 회사로 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자기가 설립한 회사에서 그만 해고를 당하고 맙니다. 그의 나이 서른에 닥친 일이었습니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실리콘 밸리를 떠날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자기에게는 여전히 일을 하고 싶은 열정이 간절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컴퓨터에 관련된 애니메이션 회사를 만들었는데, 대성공이었고, 그를 쫓아냈던 애플사가 그 회사를 사들이면서 그는 다시 애플사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그는 아내를 만나서 결혼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일을 돌아보면서 결국 애플사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 자기의 삶의 여정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계기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이야기의 마지막 주제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어느 날 그는 병원에 갔다가 췌장암이라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거의 치료가 불가능하고 길어야 6개월 밖에는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정밀 조사를 한 결과 수술이 가능하다고 판명되어서 한숨을 돌리기는 했지만, 사형선고와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에게 떠오른 생각은 역설적으로 생명에 대한 중요성이었습니다. 아무도 죽음을 원하지는 않지만, 자기의 삶에 끝이 있음을 알기에 오늘을 아주 의미 있고 소중하게 보낼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가 연설을 마치며 했던 말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항상 의욕으로 가득 차 있고, 미련할 정도로 진지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그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연설을 하는 중에 이런 말도 하였습니다. 물론 청중이 이제 대학을 막 졸업한 젊은이들이기는 해도 우리들도 귀를 기울일만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은 여러분 인생의 많은 부분을 채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만족하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 스스로 훌륭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일을 하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으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것을 발견할 때 여러분은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훌륭한 관계에서처럼, 그것은 해가 지나면서 점점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 찾으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어떤 확실한 근거가 있는지는 몰라도...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50대 여성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계시는 분들은 이런 발표에 동의하시는지는 몰라도...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들 중 대부분은 불행 바이러스에 중독되어서 살고 있는 셈이지요. 단지, 50대 여성만의 문제일까요? 그 남편이며, 형제들이며, 아이들이며, 부모들이며... 만일 우리나라의 50대 여성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느끼고 살고 있다면, 결국은 우리들 모두가 말로 표현을 하지는 않더라도 ‘나는 불행해... 우리 가정은 왜 이럴까?’ 이런 마음을 가진 채로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로마서 12장의 말씀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와 가치를 이제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해주는 소중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 이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에 대하여 진지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우연히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여성을 통해서 예수는 우리들에게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것! 자신이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인식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 이것이 가장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에 이처럼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처럼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때에 그 예배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아마 사마리아의 여성도 그렇게 생각하였겠지요. 이 세상에서 나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어... 그녀는 그날도 자신에게 드리워진 불행을 곱씹으면서 우물가에 나왔다가... 예수를 통해서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져버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배에 대한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또 다른 차원의 예배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v.1)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우리가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후에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과 진리는 어떤 것이고 몸은 또한 어떤 것인지...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는 지난주일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을 전하고 나서도, 잘 전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서, 제 마음을 실험 도구로 생각하면서 곰곰이 살펴보았습니다. 영과 진리! 아마 그것은 우리의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마음 깊숙이 잠들어 있던 한 부분이 서서히 아릿해지고, 평소에는 경험할 수 없던 신비함이나 엄숙함이 나를 감싸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서늘한 그늘 속으로 갑자기 들어 갈 때에 온 몸이 오싹해지는 것과 같은 그런 기분이기도 합니다. 마치 커다란 폭풍을 앞에 둔 것 같은 고요함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거룩함에 대한 경험... 그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그냥 내어 맡길 때... 오로지 하나님만을 생각할 뿐... 다른 어떤 것도 들어 올 수 없게 하는 마음가짐을 가질 때에...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한 하나님께 대한 경험은 우리의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태도와 자세를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마치 사마리아 여성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만일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이런 생각이 있다면... 거기에 대한 가장 분명한 해답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할 때에... 몸으로 드려야할 예배가 따로 있고...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따로 있고...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몸이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통해서 변화된 우리들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사마리아 여성이 그랬지요. 주님을 만난 후에는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세상이 무서워서 도피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당당하게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것은 이제까지와는 어떤 다른 것을 만들어 내는데...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과는 다른 DNA가 우리 안에서 생성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하늘나라의 DNA라고 한다면... 이것은 그냥 우리의 내면에 감추어질 수 없고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사람들 사이에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v.1) 그러므로... 라는 말을 사용할 때, 바울은 이 대목에서 그가 앞부분에서 말한 것들을 지금 그가 하려고하는 말과 연결시키는 고리와도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로 드려야 한다면... 그래야할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이미 앞부분의 말씀 가운데서 충분히 제시되었다고 바울은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가 로마서 8장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말하려 했던 것은 곧 우리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를 향하여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가진 신비함을 아름다운 언어로 찬양하였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5,37-39) 

이렇게 바울이 고백할 때... 그것은 곧 우리의 삶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음을 말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의 말씀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그 기초를 두고 있는 사람이기에...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에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몸으로도 하나님을 예배할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몸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2절에서 그것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따르려고 하지 말고... 이렇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특별히 여기에서 이 시대라고 할 때... 그것은 아직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여러 서신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적이 있는데... 그들은 도덕적으로 문란하고, 절제하지 못하며, 자신의 내면에 있는 욕망과 충동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 잘못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우리들에게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고 말할 때에 우리들에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지... 그것을 한번 돌아보라는 의미가 여기에는 담겨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남들이 세상을 사는 것처럼 그렇게 아무런 생각도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응하고... 그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것은 바울이 예수를 처음 만난 후에 자기 가운데서 있었던 생각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이미 자기 가운데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에... 그래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바탕에서 삶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을 때...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난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물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그 십자가 덕택에 오늘 내가 있게 되었다면... 적어도 나의 삶이 예수를 알기 이전과 똑같지는 말아야할 것이 아닌가? 나의 삶이 적어도 십자가가 부끄럽지 않은 그런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이것이 바울이 가진 생각이 아니었을까요? ‘나는 다르게 살아야지...’ ‘적어도 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지는 않을 거야...’ 

생각해보면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설혹 사실은 그렇게 남다르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말이지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바울이 말하는 것을 우리는 이렇게 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전체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아주 작아서 잘 느끼지 못할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제껏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생각도 없이 따라가던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게 나 자신이 변해야 하겠다... 하는 생각을 품는 것이 아닐까요? 나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어쩌면 우리의 삶에는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는 집이나, 타고 다니던 자동차나... 뭐 이런 것들... 다니던 직장이나... 이런 것들이 변하면... 얼마 동안은 우리는 새로움을 느낄 수가 있겠지만...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바울이 말하는 변화...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변화... 생각해보면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새로운 탈출구를 찾을 수가 있다는 말씀이지요.  
   
이러한 마음으로부터의 근본적인 변화는 예수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가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는 예수가 아직 사람들에게 자기를 드러내기 이전에 행하셨던 기적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변화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하는 그런 변화... 사람들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단지 사람들의 손을 시기 위해 떠놓았던 물이 다시 잔치의 활기를 불어 넣어 주는 포도주로 변화될 것을 누가 알았을까요? 예수는 또 하늘나라는 마치 누룩과도 같아서 그것은 살짝 섞어 놓기만 해도 가루를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한다고 하였습니다.(마태13:33)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 우리의 희망은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바울의 충고는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변화... 우리가 추구해야할 변화의 끝이 어디인가를 잘 말하여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화의 시작은 결국 ‘세상을 본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이렇게 살려고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닌데...’ 물론 자기 자신도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살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이게 전부일까? 좀 더 나은 삶은 없는 것일까? 이런 물음 앞에 자신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런 고민을 우리가 한참 하다고 보면... 우리는 어느 샌가 좀 다른 관점에서 자신과 세상을 보게 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나를 세상에 보내셨을까? 예수는 왜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을까?’ 이런 물음 앞에 우리가 진지하게 설 때에... 진정한 변화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요.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든지 이런 것들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대목을 읽고 있으면 막연하던 것이 조금씩 가닥이 잡히는 것을 느낍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으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삶을 통해서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로구나..’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도... 우리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살고 있는지요? 말을 한마디하려다가도... 혹시 나의 말이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욕되게 하면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행동을 할 때에도 이것이 과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참 좋으신 분이라고 알게 하는 행동이 될까? 좀 생각하면서 행동해야하지 않을까요? 
  
비울은 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나를 만족시키고 나를 만족시키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의 기쁨을 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많은 희생이 따르고 많은 손해를 보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나의 기쁨을 포기할 때에... 너의 기쁨을 위해서 나를 버리고 양보할 수 있을 때... 생각해보면 바로 그 순간이 우리들에게는 진정한 기쁨이 찾아오는 순간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까지 나가야 하는 것인지... 그 한계를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참 좋으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야하는데... 어디까지인지...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지 말을 하지 않아도 좋게 대해주지만... 완전하라고 하실 때에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게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대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나의 기쁨을 포기할 때에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우리는 내가 나를 버리고 포기할 수 있는 끝까지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조금도 나태해서도 안 되고 조금도 태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태5:48) 예수님도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완전을 향하여 한걸음씩 다가서는 우리의 발걸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아직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은 없습니다. 설혹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더라도... 그런 것들은 오히려 오늘보다 더 낫고 존귀한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우리는 스티브 잡스의 연설을 통해서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의 돌파구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론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힘입어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삶에 충실하려면 충실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세상을 본받지 않고... 남다르게 사는 것이고,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참으로 행복하고 멋진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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