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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요 4: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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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요 4:19-26)
   

따뜻한 남쪽 나라가 간절히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하도 추위에 시달리다 보니, 저도 모르게 며칠이라도 좀 따뜻한 나라에 가고 싶어...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그런데 어떤 분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남쪽 나라에 가면 너무 더워서... 며칠 못가서 추웠던 날들이 그리워질텐데요...’ 그래서 맥없이 웃은 적이 있습니다. 

어쨌든 추위가 절정에 이른 요즘, 우리들의 마음이라도 따뜻해질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기는 해도, 지나놓고 보면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있을거라는 마음으로 추위를 잘 견뎌내야 하겠습니다. 박노해씨는 ‘겨울사랑’이라는 시를 통해서 겨울은 물론 춥지만 그 속에도 참으로 소중한 것이 담겨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오늘 아침이 올 겨울 들어서 가장 춥다고 하는데... 오늘이 지나가면 조금씩 날씨가 풀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에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마치 내복을 입듯 말이지요. 나아가서, 이러한 따뜻한 마음을 서로 나누려 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어느 때 보다도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겨울이 우리들 서로가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서 사마리아를 지나시던 예수가 수가 성의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성을 만나서 그녀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알게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읽어보면, 아주 섬세하게 구성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처음에는 아주 우연한 만남이었지요. 

시간은 정오쯤이어서 가장 뜨거운 때였는데, 지칠 대로 지친 예수는 우물가에서 쉬고 있었고,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로 들어간 사이에, 사마리아 여성이 우물가에 나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예수가 그녀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대화가 시작되는데... 그것은 마치 동문서답처럼 서로 겉돕니다. 현실의 때가 잔뜩 묻어 있으며, 닳을 대로 닳아버린 사마리아 여성이 예수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지요.
    
비록 물과 기름처럼 이질감을 느껴지는 이야기였지만, 예수는 단념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갑니다. 그러는 중에 사마리아 여성의 마음이 열리고, 그녀는 자기가 가진 깊은 고민과 자기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간절한 바램을 드러내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사마리아 여성이이 가장 해가 뜨거운 한 낮에 우물가를 찾아 왔다는 것에서부터 좀 심상치 않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는 여성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물을 좀 달라고 하는 예수의 부탁을 거절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이고 나는 사마리아 사람이기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녀는 혹시라도 이 낯선 사람에게 자기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가 그녀에게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10절)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자기에게 그녀가 관심을 가지도록 하십니다. 그녀는 예수를 다시 보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이 분이 누구인데 나에게 물을 준다고 하는 것인가? 또 하나님의 성물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궁금함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디에서 생수를 구하신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판 이래로 오로지 여기서만 물을 길어서 마시며 살고 있는데요. 여기 이 우물 말고 다른 곳에서 생수를 구하여 오시기라도 한다는 말인가요? 그렇다면 혹시 선생님은 야곱보다도 더 위대한 분이신가요? 그녀는 이렇게 예수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13-14절)  물론 그녀가 잘 알아들을 리가 없지요. 그녀는 그런 신비한 물이 있다는 예수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 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물을 마시기만 하면... 이렇게 귀찮게 사람들을 피해서 물을 길으러 다니지 않아도 될 터인데... 그러면서 예수에게 그 물을 달라고 재촉합니다.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 주십시오’
   
하지만, 예수는 생수를 줄 생각은 하지도 않고,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는 정말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감추고 싶었던 부분을 예수가 들추어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물러날 예수는 아니었습니다. ‘그래... 지금 네가 한 말도 틀린 말은 아니야. 너에게는 지금 남편이 없지. 과거에는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까...’ 그녀의 정체가 말씀을 읽는 이들에게 완전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좀 이상하다... 왜 이 여자는 사람들을 피해서 홀로 우물에 나온 곳일까?’ 처음부터 그녀의 정체가 궁금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녀는 무척 민망했습니다.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에 대한 궁금증은 더 커졌습니다. 도대체 저 분은 누군가? 누구이기에 나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을까?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예수가 자기에게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한 셈이지요. 그러면서 그녀는 예수에게 이러한 물음을 던졌습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20절) 여러분! 그녀의 이 질문이 참 놀랍지 않습니까? 어느덧 그녀는 예수를 향해서 자기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고민과 문제를 털어 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리움과 간절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나가고 싶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그래서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지만... 자기와 하나님의 거리는 너무 멀어 보였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느꼈습니다. ‘나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물론 행실은 형편없고...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오로지 부끄러움뿐이지만 말이지요. 하지만, 나에게는 거리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의 예배도 받아 주실까... 하는 마음이 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선뜻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그리고 자기가 사마리아 사람이어서 이 곳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릴 수밖에는 없는데...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아닌 이곳에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실까? 하는 의구심과 주저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이것은 그녀의 삶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입니다. ‘아... 나에게도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구나... 나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바램은 단 한 번만이라도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었구나...’ 자기에게 이런 마음이 있다는 것도 그녀는 몰랐습니다. 늘 살아남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그러는 동안에 그는 참 비참한 모습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고립당하고... 그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지... 진정 자기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이 어떤 일인지... 자기가 수렁과도 같은 현실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도무지 그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물가에서 만난 한 낯선 사나이...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그녀는 비로소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도 하나님께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 나의 가장 깊은 내면 가운데 있는 소망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소망이라는 것을 그녀는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차가운 날씨에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여기에 오신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요? 그것은 마치 오래도록 세상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느라고 모든 기력과 삶을 다 탕진해버리고, 지칠 대로 지친 한 나그네의 귀향과도 같은 것입니다. ‘마치 나에게서 진정한 휴식은 가정뿐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나그네가 오랜 여행 끝에 집으로 돌아오듯, 내가 쉴 곳은 오로지 하나님의 품 밖에는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고, 존귀하며 고상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처럼 나의 삶 가운데서 소중한 일은 없어... 이런 마음이 오늘 이 아침 우리들에게는 있는 것인가요? 
    
사마리아여성에게는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리기는 하지만... 그것 가지고는 여전히 부족한 것 같고... 더 온전하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녀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이라는 한계를 무시하고 예루살렘으로 달려가고 싶은... 더 정성을 다해서... 더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이 그녀에게는 있었다는 것이지요. 예수는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서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2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우리에게는 예배가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요? 왜 우리에게는 오늘은 어제보다 더 예배를 잘 드리고 싶어 하는... 그래서 ‘참되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이라는 인정을 예수님께로부터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이 시간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옛날에는 이발소에 가면 고상한 그림들을 많이 붙여 놓고는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그림 중의 하나가 바로 프랑스와 화가 밀레가 그렸던 ‘만종’이라는 그림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광경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던 부부가 저녁 기도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려 퍼질 때, 하던 일을 멈추고 마주 보고 서서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남편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아내는 두 손을 꼭 모으고서는 역시 기도에 깊이 빠져든 모습입니다. 비록 그곳은 예배당은 아닙니다. 화려한 장식이나 찬양이나 말씀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진지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서 하루 종일을 밭에서 보낸 사람들처럼 말이지요. 
   
만일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기도가 이렇게 될 수 있다면... 살면서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 안에 내가 머물러 있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머물러 계시는 신비를 느끼게 되는데...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거룩한 힘이 우리의 내면으로 불쑥 들어오는 것을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경험하게 되는데... 그 순간이 우리들에게는 꺼지지 않는 밝고 환한 빛으로 충만한 순간이며...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로 우리의 내면이 채워지는 순간이며... 그동안 우리를 괴롭히고 있던 모든 아픔과 상처가 다 치유되는 순간인데... 멀리 보이기만 하던 하나님나라가 이미 내 안에 있음을 예배를 드리며 확인하였는데... 말입니다.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시23:5)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누리는 은혜를 아주 생생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살벌한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은 나를 따스한 사랑으로 맞아 주셔서, 이미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고, 평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게다가 아주 풍성하고 기름진 식탁까지 차려 놓으셔서, 나는 그냥 숟가락하나 들고 달려들기만 하면 됩니다. 여기까지 정신없이 달려오느라고 허기진 마음과 몸을 하늘의 양식으로 가득히 채우게 됩니다. 

그 뿐이 아니지요. 주님은 나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 그 기름은 나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내가 얼마나 존귀한 사람인지... 그것을 다시금 알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아,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이로구나...’ 이런 것을 느끼게 될 때에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내 잔이 넘칩니다...’ 이렇게 밖에는 고백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여러분들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녀가 자신이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한계를 느끼고... 예배를 더 잘 드리고 싶은 목마름이 있을 때, 그래서... 이곳 그리심 산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야기할 때에... 예수는 그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v.21) 과거에는 그러했습니다. 어떤 정해진 공간과 장소... 그런 것들을 참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장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가지는 마음가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장소에만 머물러 계시는 하나님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v.24) 예수는 이렇게 하나님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분이셔서 어떤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제약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v.24) 

이렇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영과 진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떤 목사님은 이 대목에서 그런 표현을 썼습니다. ‘고무막대기로 전기를 옮길 수는 없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좀 더 진실해지려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게 된다면... 무엇 하나 소홀히 할 수는 없겠지요. 다른 잡념이 틈을 비집고 들어 올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 때에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가지는 마음입니다. 예전에는 커다란 공사현장에 가면 ‘혼을 담은 시공’이라는 구호를 커다랗게 붙여 놓은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 때마다 목사인 저는 좀 부끄러웠습니다. 집을 한 채 짓거나 어떤 공사를 하나 하더라도 거기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데...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우리들의 예배는 어떠한가? 정말 나의 모든 것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들고는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6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고린도후서6:2) 우리가 하나님께 영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 가운데에는 이런 마음도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자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다시금 느끼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예배를 통해서 나에게 임하여 주시고, 이러한 은혜를 내려주실 것을 믿고 기대합니다. 이런 확신과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무척 조심스런 이야기이지만... 오늘도 우리가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같은 찬송을 부르고, 같은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아마도 이 예배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저마다 다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가인과 아벨의 예배가 하나님께는 다르게 받아들여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찾으신다.’(v.23)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예수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때라는 것인가요? 누구든지... 어디에서든지... 만일... 그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그것만으로도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남자와 여자, 죄인과 의인... 그러한 구분이 이미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누가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인가? 그것을 우리들에게서 보실 뿐입니다. 

이렇게 예수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녀도 어느덧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예수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v.25) 그러자 예수는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 주저함도 없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v.26) 그녀는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자기가 지금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온갖 부끄러움과 잘못된 행실로 가득한 자기이지만...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 마치 다윗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심을 경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너는 내게 참으로 소중한 사람이다.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 그녀에게 이제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이제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다시 동네로 돌아갔습니다.(v.28) 아마 사람들은 달라진 그녀를 보고 놀랐겠지요. 그녀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사랑하려 하였고, 누구보다도 부요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일들이 우리가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혜요 축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설혹, 이 자리에 올 때에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마음은 닫혀 있고, 세상이 두렵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싫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이 될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곳을 찾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차지한 사람처럼.. 행복하고 즐겁게 세상을 향해서 나갈 수가 있게 됩니다. 매 시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런 놀라운 변화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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