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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이 원하시는 제자 (요 4:3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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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원하시는 제자 (요 4:34-38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예수님의 공생애는 3년 반에 불과했지만, 주님은 그 짧은 기간에도 우리에게 삶의 모범과 교훈을 풍성히 남기셨습니다. 주님은 어떤 경우 어떤 환경에서도 놀라운 삶의 방식과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은 이를 초대교회에 전수했을 뿐 아니라 신약성경에 기록하여 오늘 우리에게까지 알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영혼 구원을 위해 얼마나 큰 열정을 가지고 계신가를 알 수 있고, 구령사역을 위해 어떤 제자들을 원하고 계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의 양식은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므로 아버지의 일을 완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인 식욕을 충족시키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35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이것이 예수님의 비전입니다. 비전은 높게 멀리 보는 것입니다.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아라.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느냐? 낫을 대기만 하면 곡식을 거두는 때가 되었다.” 예수님은 둘러선 제자들에게 자신의 비전을 이처럼 선명하게 밝히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에게 대화를 통하여 자신이 메시야 되심을 보이시고 여인이 동네로 들어간 사이에 제자들과 대화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의 비유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이 원하시는 제자상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좀 더 이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제자는 어떤 성도인지 살펴보고, 주님의 마음에 흡족한 제자가 되기 위해 우리 자신의 부족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1. 눈을 들라고 하심 (= 높은 이상의 사람)

35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눈을 들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너희 눈들을 들어 올려라’ 입니다. 
이 동사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눈(옵달무스)’ 에 관한 고찰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눈은 시각적인 지각이 아니라 영적인 지각 능력을 가리킵니다. 영적 이해력이 없이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아 알 수도 없고, 주님이 지시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눈들을 높이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높은 이상을 가진 제자들을 원하십니다. 제자라면 차원 높은 비전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는 높은 곳을 향하여 우리의 시선을 올려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원하시는 제자는 높은 이상의 사람입니다. 눈을 들라는 것은 비전을 높이라는 말씀입니다. 눈을 항상 밑으로 향하고 있는 것은 비전이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성경 인물 중에는 눈을 높이 든 사람도 있고 그 반대로 눈을 내려다 보다가 낭패를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여호수아 5장에 보면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가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가까이 갔을 때에 여호와의 군대 대장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이 기다리고 있는 땅에 들어선 두려움과 걱정을 가지고 기도하는 여호수아 앞에 어떤 분이 찬란한 옷을 입고 마주섰습니다. 그분은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자세를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5:14). 여호수아는 그의 시선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시켰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을 모시고 강력한 담력을 받아 가나안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인 사건이 다윗에게 일어났습니다. 삼하 11장에 보면 다윗 왕은 신하들이 모압과 격렬한 전투를 치루는 그 시각에 왕궁의 옥상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지 못하고 이웃집 마당을 내려다 보다가 큰 죄악 가운데 빠졌습니다. 이것 때문에 온 집안과 나라가 큰 환란에 빠지고 왕궁을 떠나 피난까지 해야 하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눈을 들어 여호와의 군대 대장을 보고 가나안을 정복한 담력을 가졌지만, 다윗은 눈을 내려 보다가 큰 범죄에 빠졌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는 눈을 들어 높은 이상을 품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높은 이상을 가진 사람은 결국 높은 인격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멀리 보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내일을 보지 못하고 눈 앞의 이해관계에 눈이 어두워져 범죄하여 평생을 후회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비전을 높인다는 것은 멀리 본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비전을 높인다는 것은 넓은 세계를 먼저 본다는 뜻입니다. 우리 말에 ‘대아(大我), 소아(小我)’ 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가나 사회는 대아의 세계입니다. ‘큰 나’ 에 속하는 세계입니다. 나 하나의 세계는 소아, 즉 작은 나의 세계입니다. 눈을 높이 든다는 것은 대아의 세계를 본다는 것입니다. 넓은 세계를 바라볼 때 그 속에 있는 작은 세계 역시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을 높이 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앞세우는 삶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나 개인의 유익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의 일을 더 앞세워 가는 생활을 말합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존 칼빈이 강조한 구호 중에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라는 구호가 있고, 그가 자주 사용한 말 중에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그리고 모든 치욕은 내게’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은 치욕을 감수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는 것, 그것은 높은 이상의 세계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최우선으로 삼는 삶은 예수님의 삶의 특징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일체의 타협을 배제하셨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닮은 제자들을 키우시기를 원하십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에 활동했던 선지자 미가야는 인기도 없고 왕에게 인정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시드기야와 그를 따르는 사백인의 선지자 무리는 인기도 있었고 왕에게 인정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누가 참 선지자였습니까? 미가야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힘썼으나, 다른 이들은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높은 이상의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그는 철저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항상 찾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준행하는 일에 최우선권을 두고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눈을 높이 들어 하나님의 보좌를 우러르시기를 바랍니다.


2.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하심 (= 영적 안목의 사람)

35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넓은 세계 속의 추수할 밭을 보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는 영적 안목을 가진 사람입니다. 

본절의 ‘밭을 보라’ 는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 밭들을 눈여겨 보라’ 가 됩니다. 여기 ‘밭’은 일반적인 농토가 아니라 이 세상을 가리킵니다. 즉 인간 영혼들의 밭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Living Bible, fields of human souls).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밭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사역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의 영혼들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런 영적 안목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추수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영적 안목을 가질 것을 요구하십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이 말씀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와 사마리아 사람들의 회심 사건이 있었던 때가 언제인지 암시해 줍니다. 일반적으로 사마리아 지역의 추수는 유월절 절기가 끝난 후인 4월 경에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이로부터 4개월 전이라면 A.D. 27년의 12월 중순경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당시 제자들의 눈에 들어온 수가성 우물 주위의 들판에는 곡식들이 아직 푸른 빛을 띠며 넘실대고 있었지만, 주님의 눈에는 수가 성을 떠나 예수님께 나아오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미 추수할 때가 된 들판의 곡식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본문이 기록된 요한복음은 영적 복음서입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하여 육적인 사물을 통하여 영적인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3장에 보면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거듭나는 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중생의 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6장에 보면 오병이어를 가지고 5천 군중을 먹이신 후에 주님은 “내 피는 참된 음료요 내 살은 참된 양식” 이라 하셨습니다. 

9장에 보면 소경을 고치신 후 “보는 자는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는 자는 보게 하려 함이로다” 라고 하시면서 자기 백성이 영적인 소경됨을 탄식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안목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눅 5장에 보면 예수님을 만나는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밤을 새우면서도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그의 배 위에 올라 호숫가에 운집한 무리를 향하여 설교하셨습니다. 그때까지도 베드로의 마음은 오직 고기밖에 없었고, 예수님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내키지 않았지만 명령에 순종하였더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 정도였습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는 갈리리의 어부였지만 결정적인 때에 육적인 고기잡이에 대한 관심에서 영적인 문제로 마음이 옮겨간 사람입니다. 원하던 고기를 마음껏 잡았으나 그는 그 고기를 팔아 돈을 버는 데 관심을 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기의 죄를 고백합니다. 영적인 문제에 마음이 쏠려갔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수제자가 되고 역사에 남을 큰 인물이 된 계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는 영적인 안목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가현적인 세상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도덕적인 세계가 있습니다. 前者는 좋은 집과 고급스런 차, 화려한 옷과 같은 물질의 세계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이 세계가 상당히 진보되고 있습니다. 後者는 사람답게 사는 도리의 세계입니다. 물질의 세계가 아무리 번영한다 해도 도덕의 세계가 무너지면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로마가 그랬고, 인간 역사에 이런 원리는 수없이 반복되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이 둘 외에 제3의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세계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 성경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마음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 영적인 세계입니다. 도덕의 세계가 물질의 세계의 근본이 된다면, 이 둘의 근본은 영적인 세계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적인 세계가 분명히 설 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할 때, 즉 우리의 신앙이 건전할 때 도덕의 세계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기억합시다. 주님은 영적 안목의 사람을 원하십니다. 

3.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하심 (= 추수 현장으로 나가는 사람)
35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마리아 지역이 영혼의 추수기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 이유는 제자들이 추수
현장으로 나가서 영혼을 건지는 추수꾼이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원하시는 제자는 추수 현장으로 직접 뛰어나가 구령 사역에 힘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눈도 신령한 눈으로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비전을 가졌던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영혼 추수를 매우 엄중하게 명령했습니다.

딤후 4:1-2=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지금은 영혼들을 추수해야 할 때이고 예수님의 재림을 대비하도록 준비시켜야 할 때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향해 ‘오라’ 고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사람들이 은혜를 얻을 기회입니다. 
지금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은 들판으로 나가 추수하는 일입니다. 추수 때에 농부가 밭에 나가서 익은 곡식들을 거두어 들이듯이 구원 얻기로 예비 된 영혼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전도자의 모범을 보인 것처럼 우리가 나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 만나 구원 얻은 사실을 증거하기만 하면 달려나올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영혼을 추수하는 시급한 과제는 제쳐놓고 덜 중요하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 매달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며, 열심히 한다고 누구나 칭찬 듣게 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합시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제자는 영혼 구원을 위하여 추수 현장으로 달려나가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36절에 보면 거두는 자가 이미 삯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품삯은 일을 마친 후에 받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중대한 일을 누구에게 시키려고 할 때 선금부터 주고 일을 시키지 않습니까?

영혼의 추수는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잃은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아들까지 내어주면서 해야 할 귀한 일이 있습니까?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를 건지시기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준비된 영혼들을 추수하기 위해 일꾼들을 부르셨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그 일꾼들입니다.
일꾼으로 부르시되 거저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삯을 먼저 주셨습니다. 언제 우리가 삯을 받았느냐구요? 

우리가 받은 구원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삯입니다. 천국 기업, 영생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기업니다. 하나님은 이 삯을 주시고 저와 여러분을 영혼 추수를 위한 일꾼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벧전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전도하는 사람들은 최후의 날 주님 앞에서 면류관을 받아 쓸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도 이미 마음에 기쁨의 면류관을 받아 쓰는 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여러분은 나의 기쁨의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볼 때 면류관을 받아쓴 것처럼 기뻤다는 것입니다. 
시집간 색시가 아이를 낳고 기뻐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아기로 인해 남편과 시부모가 기뻐하고 친척들이 축하해 주는 것처럼, 오늘의 교회에는 전도를 통해서 더 많은 영혼을 전도하는 일로 기쁨이 충만해지게 됩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이것이 예수님의 비전입니다. 우리는 이 비전에 가슴 벅차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는 이 비전을 마음에 품고 제자의 길에 나서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동일한 비전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썩어질 양식을 위해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영원히 썩지 아니할 양식을 위해 우리의 인생을 예수님께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높은 이상과 영적 안목으로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추수의 현장으로 달려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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