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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용할 양식 (출 16: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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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 (출 16:11-36)


사람은 같은 것이 너무 오랫동안 반복되는 것을 누구나 다 싫어합니다.
비록 처음에는 재미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싫증이 나게 되어 있고, 처음에는 원하던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필요를 훨씬 넘도록 초과 공급되면 역시 지겨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기한 장난감을 사 주어도 그것이 수명이 다 되어 절로 못쓰게 되는 날이 오기 훨씬 이전에 벌써 어린아이는 그것을 가지고 놀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첫눈 내리는 날에는 제법 감흥도 생기고 백설이 주는 분위기에 젖어 보기도 하겠지만, 며칠만 계속 내리면 이미 그 눈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입에서 온갖 불평을 토해내게 만들기 마련인 것입니다.
하여튼 무엇이든지 '같은 것이 계속 반복되는 것'은 다 지겨운 일이지만, 특히 그 중에서도 '같은 음식'을 계속 먹어야 할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옛날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사람들 중에는 이제 햄버거나 바나나 따위를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했던 사람도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환상은 미국에서 더도 말고 한두 주일만 살고 나면 깨끗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무려 40년에 걸친 기나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 매끼 똑같은 식단'을 대했을 때 그 기분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 식단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만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만나를 가리켜 '하늘에서 내리는 일용할 양식'(출16:4)이라는 아주 의미심장한 명칭으로 부르셨습니다.
그 만나는 장장 4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꼭 필요한 양식'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 보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부로 '지겹게' 여겨서는 결코 안 될 아주 '소중하고 특별한 양식'임이 분명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같이 만나를 먹으면서 그저 질린다는 생각만 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민들이 그 만나를 통하여 매일을 생존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뿐 아니라 더 큰 은혜들까지 체험할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만나가 내포하고 있는 그 깊은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오늘날 우리가 매일 대하는 일용할 양식을 과연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받아야 하는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통하여 '남과 똑같이 받는 것들에 대하여 감사'드리는 마음을 익혀야 합니다.

본문 11절부터 16절에 기록하기를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2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14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15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만나"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 하나는, 그것이 실제로 그 지역에서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자연현상의 하나와 비슷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그것은 소위 '태머리스크 만나'(Tamarisk Manna)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부드러운 가지 위에 벌레가 만들어 놓는 완두콩 크기의 달콤한 알갱이인데 매년 6월경에 3주 내지 6주간 정도의 기간 중에 생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만나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일 처음 만나를 보았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라고 기록된 것을 볼 때, 그것은 분명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의한 것이었음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기적적인 제조과정을 통하여 그 만나가 '이스라엘 진중에만 40년에 걸쳐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마다' 내리도록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이스라엘 진중에 내렸다고 했습니다.
메추라기는 주로 큰 떼를 이루어 몰려다니는 습성이 있고 또 높이 날지 못하고 한 1미터씩 푸드득거리며 날아다닌다고 하는데 시내반도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새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메추라기는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생활 동안 매일 내려 주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민수기 11장 20절 말씀에 보면, 만나만 먹게 한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메추라기를 보내 주어 "일 개월 간"을 먹게 해 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메추라기는 특별한 기간 동안만 '별식'으로 내려 주셨고 반면에 만나는 40년 동안 꾸준히 '주식'으로 내려 주셨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여튼 그 만나는 "매 명에 한 오멜씩" 거두어들이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한 오멜'은 '한 되'가 조금 넘는 분량이었는데 물론 그것은 한 사람의 하루 분 식량으로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 한 오멜을 '매일' 나가서 거두도록 하셨습니다.
한꺼번에 일주일 치를 내려주거나 하지 않으시고 매일의 일용할 양식을 필요한 만큼씩만 내려주셨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매일 오직 당신께만 의존하도록' 하셨습니다.
남들과 똑같이 받는 '한 오멜의 만나', 별로 특별히 감사드릴 것도 없어 보이는 바로 그 만나가 사실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 생활에 '가장 요긴한 것'이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혹 먹기 지겨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만나를 내려주시는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단 하루라도 결코 생존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무언가 남보다 더 많이 받아야만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보다 돈을 더 많이 벌게 되어야 감사하고, 남보다 더 좋은 집에 살게 되어야 감사하고, 내 자식이 남보다 더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야만 감사할 일이라고 착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무언가 '특별 은총'이 내게 내려야만 감사드릴 마음이 조금 들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일용할 양식'의 은총을 통하여 우리가 '날마다 남들과 똑같이 받아 누리는 것'들, 즉 '일반 은총'이야말로 정말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제목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사람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은 모든 사람들이 다 흔히 누리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날마다 반복되는 것들이야말로 사실상 우리의 생명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누구나 다 같이 공유하고 호흡하는 '공기', 평생을 두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맥박', 하나님께서 때를 맞추어 내려주시는 '햇빛'과 '비', 가장 기본적으로 이런 것들만 생각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처럼 '남들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누리는 것들'에 대하여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매일 아침에 잠에서 깨어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특별한 반찬은 없다 해도 삼시 세 끼의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잊지 말고 감사드려야 합니다. 
항상 얼굴을 맞대고 살고 있는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볼 때에도 새로운 마음으로 감사드리고, 어제와 다를 것 없는 똑같은 일과이지만 무사히 지낸 것을 두고도 반드시 감사를 잊지 않고, 날마다 들어가는 이부자리라도 그것마저 반드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덮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용할 양식'을 인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릴 줄 아는 성도가 됨으로써, 그 외에도 우리가 매일 받고 있는 것, 단 하루라도 하나님께서 내려주지 않으시면 당장 죽을 수밖에 없는 온갖 '일반은총'들에 대하여 하루도 잊지 않고 늘 감사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통하여 '복음전파 사역을 위하여 헌금'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17절과 18절의 말씀에 보면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침마다 나가서 만나를 거둘 때, 아마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그 거두는 양이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나이든 노인이나 병약한 사람이 모은 양은 건강한 젊은이들이 모은 것에 비해 조금 모자라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한" 것들을 나중에 되어 보면 모두 다 "남음이 없고" 또한 "부족함이 없이" "각기 (필요한 만큼의) 식량대로 거두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두 구절의 내용이 신약 성경에 인용된 곳이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후서 8장 11절부터 15절까지에 보면 "11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12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13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14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15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당시 이방 지역에 있던 교회들이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힘을 모으고 있던 '구제헌금'을 가리킵니다.
특히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은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 가운데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헌금에 가장 열심을 내었습니다.
하지만 남쪽 아가야 지방의 대표적인 교회라 할 수 있는 고린도교회는 이미 1년 전에 이 헌금을 함께 시작하기는 했지만 교회 내의 문제로 인하여 그 실행이 지연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바로 그 특별구제헌금을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하라"고 종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할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이 헌금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기록한 것같이" 즉 바로 오늘 본문 출애굽기 16장 18절에 기록된 말씀을 여기 고린도후서 8장 15절에서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 인용했던 것이었습니다.
즉 그 구제헌금을 함으로써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나 이방 지역 교회들의 성도들이나 '피차 부족함 없고 함께 유여해지기 위하여' 드리는 헌금이라고 고린도후서 8장 13절과 14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의 영혼에 꼭 필요한 양식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필수적인 일용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복음을 받고 은혜 생활하고 있는 우리는 영적으로 이미 '유여한 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며, 아직 이 복음을 받지 못한 자들은 '부족한 것'이 있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전도와 선교를 위하여 헌금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피차 아무도 부족한 것이 없고 함께 복음 안에서 풍족해지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밥 한 숟갈을 먹지 못하는 사람을 바로 곁에 두고 혼자서 도시락을 다 먹을 수 있겠습니까?
또 만약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본다면 얼마나 뻔뻔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것은 '복음의 양식'을 두고 생각할 때도 똑같습니다.
즉 이 소중한 복음 전파를 위하여 헌금하지 아니하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이 아주 '낯 두꺼운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병들고 굶어서 죽어가고 있는 어린이들이 부지기수인 것을 일깨워 주면서 그들을 위하여 기부자가 되어 달라는 광고를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그처럼 '육신의 양식'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상으로, '생명의 양식'을 먹지 못해 영원히 죽게 되는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여기면서 그들을 도와줄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 다른 그 어떤 '생활필수품'보다도 더욱 소중하고 가능하면 많은 사람이 함께 나누어 가져야 할 것, 바로 '영혼을 위한 일용할 양식'인 복음을 아직도 받지 못하고 있는 이웃과 민족들의 이 가장 절실히 '부족한 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기꺼이 전도와 선교의 헌금을 '보내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 영혼의 필수적인 양식'임을 꼭 깨달아야 합니다.

31절 이하 36절에 "31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고도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32모세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33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34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35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36오멜은 에바 십분의 일이더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광야 세대'만 기억하는 특별 음식 정도로 끝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그 "만나 한 오멜"을 "항아리"에 담아 "증거판" 즉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언약궤가 만들어졌을 때 그 안에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십계명의 돌판'과 함께 이 '만나 담은 항아리'도 영구히 보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함으로써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중요한 신앙 교육의 증거가 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 '일용할 양식'을 통하여서도 후손에게 신앙생활을 교육시킬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식사 때마다 잊지 않고 먼저 감사기도를 드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나, 혹은 주일에 먹을 간식을 미리 토요일에서 사서 준비하는 것들에서부터 벌써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신앙교육을 시키는가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나를 통한 신앙교육'이라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신명기 8장 3절에서 "3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출애굽기 16장 4절에서부터 "4...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고, 바로 그 '말씀대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육신'이 살게 된 것도 '만나' 이전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으며, 그렇다면 더욱이 그 '영혼'의 삶에 있어서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도 "4...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고 바로 이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까?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주식(主食)이 '만나'인 줄로만 알고 있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그들의 진짜 주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자들, 비록 만나는 매일같이 먹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먹고 순종하지 못했던 자들은 오히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진짜 일용할 양식'을 먹지 못했을 때 닥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결과였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루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먹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꼭 필요한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 반찬은 무엇을 할까?', '시장은 언제 보아야 할까?'를 항상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여 그 일용할 양식이 단 하루라도 아니 단 한 끼라도 끊어지지 않도록 정성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그처럼 '먹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정말 나와 나의 가족이 꼭 배부르게 먹어야 할, 빠지지 않고 먹어야 할 인생의 진짜 주식인 것을 깨닫고 계십니까?
불행스럽게도, 밥만 자기 인생의 주식으로 알고 하나님의 말씀은 가끔 가다가 생각날 때 먹는 '부식' 아니 '간식'쯤으로 여기는 교인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정말 곰곰이 새겨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나'를 가리켜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요 6:58)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다른 세대가 아무도 먹어 보지 못한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었던 사람들, 아니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베풀어 주신 '최고의 잔치 음식'을 먹었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결국 다 죽고 말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기적적인 특별 음식'도 오로지 '먹고도 죽은 그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먹고 살아야 할' 진짜 주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양식을 두고 "58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8)고 하시면서, 당신께서 바로 그 "생명의 떡"(요 6:48)이라고 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예수님이 곧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며 "그 말씀이 곧 하나님"(요 1:1)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진짜 '필수 음식', 이 '영생 양식'을 반드시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육신의 생존과 기력을 위하여 '일용할 양식'을 매일 먹을 때마다 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의 양식'을 더욱 소중히 받아먹음으로써 '영원히 사는 생명'을 반드시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날마다 먹는 일용할 양식, 사람이 보기에는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 가치도 없어 보이는 흔한 '삼시 세 끼'의 식사에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뜻 깊은 교훈들을 각인해 주셨습니다.
남들과 똑같이 받고 있는 평범해 보이는 것들이 사실에 있어서는 내게 가장 요긴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 일용할 양식을 대할 때마다 깨달으면서 잊지 않고 감사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는 것이 사람의 도리인 것처럼 복음도 마찬가지로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하는 것임을 기억하면서 이 복음의 양식을 전파하기 위한 헌금에 사랑과 정성을 다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나와 내 가족이 평생을 통하여 영육 간에 건강하게 자라며 아니 영생하기 위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단 한 끼도 거르지 않고 부지런히 먹고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 밥상에 올라오는 '일용할 양식'을 대할 때마다 지겨워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결코 범상하게 대해서도 안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꼭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용할 양식'은 사람의 육신의 건강과 생존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일 뿐 아니라, 이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우리 기독신자들은 더욱 '매사에 감사'를 드리고 '전도와 선교를 위한 헌금'에 정성을 쏟고 '말씀의 양식을 통한 영생구원'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올해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바로 이 같은 '일용할 양식의 은혜'를 영육 간에 풍족히 받고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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