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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명령 : 하나됨을 지키라! (엡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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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령 : 하나됨을 지키라! (엡 4:1-6)


20세기의 세상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분열이라는 단순한 공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말부터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를 보며 우리는 세상의 하나 됨을 섣불리 예측해 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소위 21세기 포스트 모던 세상에 진입하면서 세상은 보다 복잡한 분열 양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슬람과 기독교권의 종교 갈등, 경제블록의 형성으로 말미암은 경제 이익을 둘러싼 세계적인 지역 갈등, 중국의 부상으로 말미암은 세계 패권의 새로운 갈등등이 심화되고 있는 중입니다. 

한국만 보더라도 남북의 분열에서 동서의 지역감정을 기반으로 한 분열, 심화된 경제 계층의 분열, 연령계층을 근거로 한 노소의 이데올로기의 분열, 여야의 분열, 지난 세기에 보지 못한 종교 갈등의 홍역을 앓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 기독교 내부로 시선을 돌려 보십시오. 심화된 진보와 보수의 분열, 목회자와 평신도의 의식의 분열(당회의 갈등), 원로 목사와 담임 목사의 갈등, 더 나아가 담임 목사와 부목사의 분열등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이 단순히 세상이 진화하는 방식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모든 분열의 배후에 치열한 분열의 영의 역사가 있다고 믿습니다. 

사단을 희랍어로 ‘디아볼로스’(Diabolos)라고 일컫습니다. 이것은 ‘사이를 나눈다’(디아/dia=사이, 발로우/ballow=던진다)는 뜻을 갖습니다. 그래서 성경 번역자들은 그를 ‘참소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참소와 분열의 영의 역사에 대한 성경적 해답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엡4:1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엡1-3장의 전반부와 엡4-6장의 후반부를 연결하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는 접속사입니다. 엡1-3장의 핵심은 교회론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의 몸, 한 지체가 되는 놀라운 교리적 비밀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 사도는 교리에서 실천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 것은 사람의 역사가 아닌 진실로 성령의 일하심이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우리의 사역의 마당, 그리고 섬김의 일터에서 어떻게 우리가 진실로 하나됨을 이루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 나갈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 중요한 문제를 로마의 감옥에서도 줄곧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이 1절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쓰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편지를 기록한 가장 중요한 의도를 3절에서 피력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하나 됨을 지키는 길은 무엇입니까?

1. 그리스도의 성품을 학습하십시오.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나 됨을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특히 4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겸손과 온유가 한 짝, 인내와 용납이 또 한짝) 

공동체의 삶의 마당에서 성도의 교제가 깨어지는 아픔을 겪을 때마다 반드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4가지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중에 누군가가 겸손하지 못했고, 누군가가 온유하지 못했고, 우리 중에 누군가가 오래 참지 못했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자신의 몸을 낮추는 것입니다. 온유가 무엇입니까? 온유는 유약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세는 강한 사람이었지만 온유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성경적으로 온유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통제하는 힘입니다. 겸손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자세라면 온유는 내적인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런 예수님의 성품이 학습되면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헌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 됨을 위해 학습해야 할 또 한짝의 예수님의 성품은 오래참음(인내)과 용납입니다. 평화가 깨어지는 삶의 현장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은 인내심의 상실입니다. 제임스 보이스의 에베소서 강해를 읽는데 이런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옛날 한 성도가 목사님에게 찾아와 “목사님, 제가 인내가 부족합니다. 제가 인내하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목사님의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오 주님, 이 형제가 인내가 필요하오니 지금 먼저 환난을 보내주옵소서” 그러자 그는 기도하다 목사님을 툭툭 치면서 “아니에요 목사님, 환난이 아니라, 인내에요 인내!” 그러자 목사님은 정색을 하고 “형제여, 환난이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낳고라는 말씀을 기억 못하시나요. 환난속에서 인내는 빚어지는 것이지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성령은 환난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오셔서 이 인내의 성품을 연단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드리는 용납의 성품입니다. 이런 인내와 용납 또한 예수님의 성품이 아닙니까? 이런 성품들은 모두 바울이 갈5:22-23에서 언급한 성령의 열매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 열매들은 모두 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도의 하나됨은 이런 성품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하게 일하시고 그리스도의 성품의 열매가 나타나는 곳에서 우리는 놀라운 성도의 일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사모하십시다. 그리고 성령안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학습하십시다. 그것만이 우리들의 인간적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성도의 하나 됨을 지키는 길입니다.


2.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성도의 교제중에 우리가 상처받는 가장 보편적인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우리의 삶의 초점을 사람에게 맞추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성도의 교제가운데 부르신이는 궁극적으로 삼위 일체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그분을 바라보고 산다면 우리는 어떤 실망도 극복하고 교제중에 성숙해 갈수 있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라는 말을 7번이나 반복합니다. 하나됨의 근거를 일곱 개나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7번의 하나는 모두 삼위 하나님과 연관되어 등장합니다. 

4절에는 먼저 성령과 관련하여 한 몸, 한 성령, 한 부르심, 5절에는 주 되신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한 주, 한 믿음, 한 뱁티즘(침례) 6절에는 한 하나님 아버지로 되어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삼위 하나님을 열거할 때 성부, 성자, 성령을 말하는데 여기에선 성령, 성자, 성부로 되어 있습니다. 

말틴 로이드 존스는 그 이유를 우리가 삼위 하나님을 경험한 순서로 언급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맨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우리를 부르시사 예수 믿어 교회의 한 지체가 되게 하시고 그 다음 우리는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게 되고 그 다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고 모시게 된다고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 됨을 위하여 이 삼위 하나님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그분 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에 지나치게 생각을 고정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로이드 존스는 말합니다. 그는 옛 설교가 맥닐이 말한 한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과 마가복음 8장에 각각 맹인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치유를 경험합니다. 이 두 사람이 만나 대화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9장의 맹인은 그분은 내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고 그 결과로 나는 빛을 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8장에 맹인은 그분은 그렇게 치유하실 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 경우에 그는 진흙이 아닌 내 눈에 침을 바르시고 내게 광명을 주셨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치유 경험을 두고 두 사람은 분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을 동일한 주님이 치유하셨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치유의 방법이 아닌 주님이시라는 것-거기에 우리에 시선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비본질적인 것을 가지고 우리가 논쟁하여 분열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교회는 아름다운 리더십 교체를 통하여 행복한 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우리 교회를 그냥 방관만 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모두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로 우리의 시선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일체 하나님께 둘 때에만 하나 됨을 지켜 갈 줄로 믿습니다.


3. 할 수 있는 평화의 노력을 속히 하십시오.

본문 3절에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할때 ‘힘써’라는 말의 원어는 ‘속히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speudo=make haste/quickly)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냥 평화가 올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대부분 평화를 깨는 원인을 추적해 보면 사소한 것들입니다. 사소한 것이 큰 갈등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2절에 언급한 겸손하고 온유하지 못한 우리들의 태도, 인내와 용납을 상실한 사소한 조급함이 평화를 깨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대로 우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사소한 노력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 사역이라는 큰 그림을 위해서 우리들 자신의 이기심을 깨트리고 이웃을 세우려는 노력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족한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유학생 선교를 위해 KOSTA운동을 시작하고 나서 제1회와 2회가 참석 숫자는 적었지만 너무 잘되자 이 일이 앞으로 큰 운동이 되리라는 예감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 운동에는 제가 섬기던 교회뿐 아니라, 여러 교회 여러 지도자들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깨우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다 많은 여러 교회의 동참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소위 기득권을 내려놓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3회에서 10회가 되기까지 저는 강사를 안 하기로 했고 우리 교회 이름도 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뒤에서 섬기는 자로만 존재하기로 했습니다. 앞에 나서서 일하시는 분들 격려만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일이 되더라구요. 

기독교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큰 혼란과 고통을 집단적으로 경험한 시기가 11세기부터 13세기라고 할 것입니다. 이때 두 가지 큰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교회가 동서로 분열됩니다. 그다음 십자군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성을 잃어버리고 무력과 자본과 군대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던 시대였습니다. 나라마다 무기를 들고 이방인들에 대한 적대 감정을 부추기며 광기에 붙들린 사람들처럼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을 때에 무력은 해답은 아니라고 믿고 있었던 예외적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성 프란치스코였습니다. 

1219년 제5차 십자군 원정당시 그는 12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아무런 무장없이 시리아에 있던 적의 우두머리 술탄을 만나러 갑니다. 당시 술탄은 누구든 기독교도의 머리를 베어오는 자는 금화로 상급을 내리겠다고 선포한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그가 술탄을 회심시키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그는 술탄에게 깊은 감동을 남깁니다. 그의 기도와 겸손과 온유함은 술탄에게 존경심을 불러 일으켜 그는 오히려 융숭한 대접을 받고 풀려났고 그가 지나는 곳에 적어도 그는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고 복음을 나눌수 있었습니다. 중동에서 십자군 시대이후 유일하게 복음의 열매가 있었던 곳은 프란치스코 형제들이 지나간 곳(시리아, 이집트)이었다고 전해집니다.

프란치스코는 평화의 기도를 문자 그대로 자신의 몸으로 살아낸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야 말로 그의 기도, 그의 평화의 노력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요?

“주여,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어두움이 있는 곳에 광명을/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며/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우리는 줌으로써 받고/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자신을 버리고 죽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도, 이런 삶으로 하나된 평화를 지키고 평화를 전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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