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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빌 2: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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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빌 2:19-30)
 

2011년 교회표어는 골로새서 4:3절의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로 정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알게 된 것도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젠 교회가 이 복음으로 열매를 맺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하게도 여전도회를 비롯하여 선교부가 하나님 나라 일에 열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에베소서의 말씀으로 교회가 성령으로 하나 되기를 힘써 지키자는 주제 말씀을 따라, 종말에 강건하여져서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기도로 힘써 싸워 복음의 문을 여는 일에 함께 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설교본문인 빌립보서는 새신자 교육과정이나 주일오후강론을 통해 여러분이 익히 아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교회는 무슨 성경 66권의 진도를 나가기 위하여 주일에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다시 고백하고 이 말씀으로 사는 저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되새기고 하나님 말씀을 들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이 추운 날에도 멀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려고 나아왔습니다. 그 예배는 ‘드린다’, ‘본다’는 어떤 말에 중요한 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경배함이 예배의 주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이 시간에 경배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여!’ ‘주여!’를 반복해서 부르고, 열심히 ‘아멘!’하며 예배시간에 참석했다고 경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는 선포되는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사는 삶까지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 주보에는 설교개요 아래 ‘경배와 기도’를 적을 수 있는 네모칸을 마련하여 오늘 말씀을 듣고 응답하며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화답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순종하여 살 수 있도록 기도문을 작성하라고 일부러 빈 곳을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 곳에 작성한 기도문이나 설교의 내용으로 애찬 시간에 서로 나누고 주일오후강론 시간에 그 말씀을 나누고 함께 기도함으로 시작하였으면 합니다. 이렇게 주보에 마련해 놓으면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리라 믿었는데 그리 되지 못하였기에 예배함이 무엇인지 여러분께 말씀을 드려서 오늘도 합당한 예배가 되도록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배가 말씀예전, 세례, 성찬예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바로 이런 경배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런 예배를 훈련해서 바르게 예배함이 우리 교회 안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저 숨가쁘게 시간에 가까스로 맞추어 왔다가 무슨 말씀인지도 모르고 돌아간다고 하면 그건 헛되이 경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에 대해 바르게 알고 실천해 주시면 여러분의 삶이 큰 축복으로 넘치실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도행전에 바울이 전도한 교회로써 유럽 땅의 첫 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럽의 첫 교회로 세워졌습니다. 그런데도 이 교회는 복음을 듣자마자 복음의 사역을 위하여 도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1장 처음에서부터 빌립보교회를 위한 감사와 기도를 합니다. 1:3-5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예하고 있기 때문이라.” 
  
누차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이 말한 구원은 이 공간에서 더 좋은 공간으로 가는 것으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엉망인 삶을 살았다가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착한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도 일면으로는 구원의 의미에 맞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옛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심도 애굽 왕 바로의 학대와 압제 아래 사는 것이 불쌍하니까 그 곳으로부터 벗어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옮긴 것으로만 말하지를 않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심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제사장나라로 하나님의 나라를 봉사하여 여호와께서 왕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 되어 함께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참여케 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는 신약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흑암의 권세 아래 살던 우리를 건지심은 그저 이 다음에 죽으면 저 좋은 천당에 간다는 확신만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에서 말씀했던 것과 같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곧 우리르 새 창조하신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은 이 다음에 공짜로 천국가게 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을 하게 하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서의 제자됨은 항상 주님의 종과 일꾼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우리가 편안하게 앉아서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종교적인 경건자세를 취하여 사는 것이 구원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은 자기 마음에 물을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은 오늘도 자기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가를 보시면 확실합니다. 주님의 일에 동행하여 힘쓰고 있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도 현대의 많은 교인들은 그저 딱 한 시간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가기 바쁜 삶을 나타내고 있으니 정말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빌립보교회는 구원의 복음을 들으면서부터 바울의 사역을 후원했습니다. 온 가족이 천당가게 되었다는 기쁨을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영광스러운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참여케 된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복음을 위한 봉사가 그 주제입니다. 그게 바울의 기쁨이요, 주님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사도를 시기한다 하더라도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힘써 수고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면 매우 기쁘다고 빌립보서 처음 부분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내용도 거기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1:9-11절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바울은 그저 빌립보교회가 안전하게 천당가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고,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의 경우에는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가득 채우기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세상의 초등학문과 헛된 철학이 들어와 교회를 교묘하게 속아 넘어가도록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에서는 복음의 봉사를 통하여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해야 하고 그 분별력을 위해서는 지혜와 총명이 필요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보통 자기 삶을 ‘죄가 되냐, 되지 않냐’ 이 정도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무슨 커트라인을 통과하기 위한 것처럼 영표냐, 엑스표냐 이 싸움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보다 내일, 내일 보다 모레가 더 나은 삶을 찾고 구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가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를 정할 때에도 어느 것이 더 선한 것인지 분별하려고 했습니다. 실제 자기 자신은 지금이라고 당장 죽어 주님 품으로 가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자기 자신이 교회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유익하리라 생각하여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함께 하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자기의 유익보다 교회의 유익을 더 생각해서 자기의 생사를 결정했던 것입니다. 
  
비록 감옥에 갇혀 있는 몸이었지만 바울은 자기의 당한 일로 말미암아 복음의 진보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더 기뻐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성도들로부터 어떻게 여김을 받는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일로 매우 기뻤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후에 바울은 1:27-28절에 빌립보서의 주제를 말씀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고합니다. 어떻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인가? 바울은 교회에게 ‘한 마음으로 서라!’고 말합니다. 그럼 어떻게 서야 한다는 말인가? 그걸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에 대하여 2장에 말하고, 대적하는 자들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에 대하여 3장에 말합니다. 그런 다음 4장1절에 최종 권면을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따라서 오늘 설교 본문은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 큰 주제가 되겠습니다. 먼저 2:1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이 구절은 전체적으로 성도간의 교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생활할 때 이런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성도간의 교제를 할 때 빌립보서가 말하는 강조점은 무엇입니까? 2:2절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여러분이 보시면 아시는 것처럼 이 한 구절에 똑같은 의미의 말을 여러 번 반복됩니다. 이러한 마음을 다시 3절에서 풀어 설명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 마음을 겸손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 겸손한 마음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남을 낫게 여기는가? 4절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러한 마음의 예는 어디, 누구에게 있습니까? 2:5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럼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2장6-8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겸손한 마음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이는 겸양지덕과 다릅니다.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낮아지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보다 죄인을 더 낫게 생각하셨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으로 주님은 어떤 영광을 얻으셨습니까? 2:9-11절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으로 일하여 그는 지극히 높으신 이름을 얻으셨습니다. 바로 이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만물이 그 발 아래 무릎을 꿇는 만왕의 왕, 우주의 왕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이 분을 따라 이 마음으로 이 길을 가야 합니다. 보좌 우편에서 함께 왕노릇하는 영광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는 누가복음이 말하는 내용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 나셔서 하나님에게까지 이르는 족보를 가지셨습니다. 인자가 받는 고난을 통하여 자기 영광에 들어가신 분이십니다. 그는 대제사장으로 하늘 성소에 오르신 분이십니다.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을 위하여 친히 고난과 죽음을 받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분이십니다. 바로 이 길을 제자들과 교회는 함께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2장12절에서 이 구원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루어 가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한 번 입으로 시인하여 예수를 영접하여 이 다음에 죽으면 구원이 보장된다는 교리의 가르침은 이 말씀과 전면으로 배치가 됩니다. 왜냐하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유월절에 나왔어도, 또한 홍해를 건넜어도, 그리고 시내산에 임하신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어도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제외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신 하늘의 구원은 어떻겠습니까? 단순히 한 번 영접하면 영원히 보장된다는 가르침이 성경에 맞습니까? 아닙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완성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려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우리 안에 있어 그 뜻으로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뜻으로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2:14절에 말하는 바와 같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하신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다툼과 허영이 있어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교회가 이룰 수가 없습니다. 원망과 시비가 따르게 되면 교회는 그 영광과 자랑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이렇게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합니까? 2:15-16절입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빛의 자녀로 생명의 말씀을 밝혀 바울의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하며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이 있게 하여야 합니다. 

빌립보교회가 이렇게 봉사한다면 바울은 자기의 목숨도 아끼지 않겠다고 합니다. 믿음의 봉사 위에 자기 몸을 관제로 내어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부모님이 자녀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는 마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이 자기보다 자녀를 더 낫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마음도 이와 같았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2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봉사했는지를 말했습니다. 교회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의 터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사도의 마음을 본받아 사는 것이 곧 교회가 합당하게 생활하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이제 이런 마음으로 봉사한 두 사람을 소개합니다. 빌립보교회에 이 사람들을 보내어 교회로 본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수원에 있는 구원파 분들을 만나러 갔다 왔습니다. 성경해석원리만을 약 5시간 연속해서 강론했으니 무척 딱딱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구원으로 충만한 마음을 가지길 원하였지만, 저는 오직 성경에 착념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구원을 확증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자매님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에는 진실한 형제들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교회나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존재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의 물음은 저희 교회에 그런 진실한 형제가 한 사람이라도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약간 멈칫했다가 머리 속에 여러분들을 떠올리고는 이내 긍정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저는 어느 분을 이들에게 소개하면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바로 바울이 오늘 설교 본문에서 말하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보내려는 사람인데 이 둘의 공통점은 20절에 있습니다.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디모데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지 않았으나 디모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이 복음의 일에 사도 바울과 함께 연단도 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니 디모데를 보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먼저 급히 보내야 하겠다고 말을 합니다. 이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한 형제요 군사입니다. 바울의 쓸 것을 돕기 위하여 빌립보교회로부터 헌금을 가지고 파송된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와서 바울의 일을 보니 그냥 헌금만 전달하고 돌아가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아예 그 곳에 남아 바울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병이 걸렸습니다. 그것도 죽을 병이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근심했습니다. 또한 이 소식을 빌립보교우들도 근심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았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급히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바브도디도 때문에 교회가 근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병든 사람들을 보면 평소 건강할 때보다 더 신경질적이 됩니다. 한결같이 왜 자기를 생각하거나 돌보지 않느냐는 불평이 많고 남에 대한 원망도 많아집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는 달랐습니다. 죽을 병이 걸려서도 그는 교회가 자기를 위하여 근심하는 것 때문에 더 근심했습니다. 죽을 병이 걸린 자기보다 더 교회를 근심하였습니다. 바울도 자기를 돕다가 병이 걸린 일 때문에 근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바브로디도를 디모데보다 먼저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바브로디도는 가까이서 보았던 교우였으며 바울의 사역을 도왔던 자였고, 하나님의 크신 긍휼함을 입었기 때문에 빌립보교회에게는 정말 적당한 증인이었던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빌립보교회의 사정을 진실하게 생각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말해 줍니다. 2:29절입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마치 로마의 개선 장군이 개선하듯이 빌립보 교회가 모든 기쁨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자들을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교회가 한 뜻으로 협력하여 서야 합니다. 그 뜻은 어떤 뜻입니까?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한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 겸손한 마음은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하는 자라는 말과 같습니다. 어떻게 진실하게 생각합니까? 자기 일 보다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는 자라는 말이 곧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저는 가끔 심방하다가 놀랄 때가 있습니다. 저보다 먼저 심방을 다녀간 교우 때문입니다. 거리도 멀고 여러 가지 사정이 어려운데도 심방을 다녀간 것입니다. 그 때 제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너무 기쁘고 감격이 넘쳤습니다. 제가 그렇다면 연약한 가운데 있던 심방을 받은 교우는 얼마나 더 기뻤겠습니까? 어려운 사정에도 더 교우의 사정을 진실하게 생각하여 돌아볼 때 심방을 받은 교우는 더 든든하게 바로 설 것입니다. 이런 저런 조건과 형편을 핑계하는 자보다 얼마나 교회를 생각하는 자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세상 사람들은 뭐라 하겠습니까? 네 코가 석자인데 어찌 남의 형편을 돌아볼 수 있느냐고 나무랄 것입니다. 아니면 조롱하며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에바브로디도는 어떠했겠습니까? 바울의 사역에 동참하다가 덜컥 죽을 병이 나버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교회의 일을 돌아보기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않은 에바브로디도에게 그렇게 힘써 수고한 결과가 무엇이냐고 비웃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조롱입니다. 만약 교우 가운데 이런 일을 당한 자에게 세상이 비웃는 것처럼 그리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주님의 일을 위하여 자기 권리와 자기 삶을 내려놓고 형제를 진실히 생각하는 자들을 위하여 혹 교회가 어리석다고 하면 어쩌시겠습니까? 
  
구약의 교회는 동포를 위하여 밭 모퉁이를 남겨 놓고 떨어진 이삭을 줍지 않고 내버려 두는 정도로 이웃을 생각합니다. 내가 수고하여 얻은 것 중에 십의 일만 내놓는 정도이면 됩니다. 그것이 남을 돌아보는 구제요 긍휼함입니다. 이 정도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도 자선사업이나 기부를 통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봉사와 섬김은 낮은 자들보다 더 자기를 낮추지는 않습니다. 남는 여유분으로 도와줄 뿐이지 목숨까지 드리는 일로 돕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겸손한 마음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의인을 위하여,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의 본체시며 동등한 권리를 가지신 분이 친히 종의 형체로 사람의 모양으로 낮아지셨으며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교회를 생각하셨습니다. 자기 살과 피를 내어줌으로 교회의 사정을 진실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바로 이 분이 나의 구주요 여러분의 구주이십니다. 이러한 분을 우리가 따르겠노라고 서약하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예배를 드리려고 오심은 여러분 자신의 구원의 안전을 위해서 오셨습니까? 아니면 여러분 가족의 안전한 구원을 위해 오셨습니까? 오늘 이 추운 날씨에 먼 거리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 어떻게 올 수 있을까 근심하고 오셨습니까? 교회의 형제 자매들의 형편과 사정을 진실하게 생각하고 오셨습니까? 내가 늦으면, 내가 예배하지 못하면 내 구원에 문제가 생길까봐 가까스로 오셨습니까? 
  
오늘 여러분과 제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가 가지신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자입니다. 만일 복음이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한 것이라면 이제까지 아는 것이, 배운 것이, 익혀왔던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4:9절에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배웠습니까? 행하십시오. 받았습니까? 행하십시오. 들었습니까? 행하십시오. 보았습니까? 행하십시오. 우리의 구원은 이렇게 일함에 있습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협력하는 것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것이며, 형제 자매의 사정을 진실하게 생각하여 자기 일 보다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는 삶이며, 그 일에 자기 목숨도 아깝지 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울이라면, 아니 제가 바울이라면 우리 교회 중에 누가 빌립보교회에 보내야 하겠습니까? 형제 자매를 진실히 생각하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부끄럽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내 삶을 더 내려놓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생깁니까? 지극히 선한 것을 위하여 하나라도 더 열심히, 또한 연단을 받기까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는 것이 정녕 어리석고 단순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신, 하나님의 권리를 버리신 주님이 여러분의 주님이 아니십니까? 누굴 위하여? 바로 여러분과 저 자신을 위하여 그 분은 사람이 아닌 죄인의 자리에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건 순전히 우리를 자기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이 여러분이 그 자리에 그 섬김으로 그대로 서 계시겠습니까? 복음의 진보, 믿음의 진보와는 무관하게 그 자리에 그렇게 서 계셔야만 하겠습니까? 아니 조목사보다 더, 또 조장로님보다 더 앞서 나가는 그런 마음으로 주님의 일에 협력하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지극히,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 의의 열매가 가득한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올 한 해에는 이런 열매가 우리 교회에 가득 맺어지길 소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처럼, 사도 바울의 마음처럼,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의 마음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주의 일에 협력하기를 바랍니다. 형제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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