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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생활 (약 1: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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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생활 (약 1:19-27)


유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우 한 마리가 배가 무척 고팠습니다. 그런데 먹을 게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나무 가지 위에 까마귀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우는 까마귀를 잡아먹기 위해 온갖 말로 땅에 내려오라고 꾀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쳐다만 볼뿐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여우는 인내하면서 말했습니다. 

<까마귀야, 내가 너를 해할까 염려하는가본데, 그럴 필요 없어. 너는 곧 메시아가 오신다는 소식도 못 들었니? 성경에 보면 메시아가 오시면 사자가 어린  양과 함께 눕고, 여우와 까마귀가 같이 논다고 되어 있어. 영원한 평화가 온다는 말이야.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내려와!>  

그런데 이렇게 달콤하게 꾀이고 있는 바로 그 때 사나운 개 한 마리가 짖으면서 달려왔습니다. 여우는 놀라서 도망쳤습니다. 그러자 까마귀가 여우를 놀리면서 말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메시아가 오시면 여우와 개도 사이좋게 지낸다고 되어 있으니, 넌 도망칠 필요가 없어!> 그러자 여우가 외쳤습니다. <나야 물론 그 말씀을 알지. 그런데 문제는 저 개가 그 말씀을 모른다는 거야!> 

여러분, <저 개가 그 말씀을 모른다는 거야!>,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찔리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해당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에 무식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그래도 은혜만 받으면 되지 않습니까?> 정말 은혜만 받으면 됩니까? 어떤 선교사가 시골을 지나다가 수요 예배 시간이 되어 농촌교회에 들어갔습니다. 

이 교회는 누가 예배를 인도하는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되자 몇 사람의 교인들이 들어와 앉았는데, 옷이 흙투성이인 한 사람이 옷을 털고 들어오더니 강대상에 섰습니다. 
<오늘 전도사님이 멀리 출타하셔서 제가 대신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찬송 한 장을 부르고, 간단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곤 시편 23편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글을 잘 모르는지, 정확히 읽지를 못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 자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러더니 그는 확신 있는 어조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을 자르는 일이 있더라도 우린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이 시를 지은 분은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을 자르더라도 부족함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여호와께 맡기고 감사해야 합니다. 목이 잘려 죽더라도 감사하세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교인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해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내 놓을 각오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 교인들이 은혜를 받기는 한 것 같지요?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시편 23편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심을 깨달아야 하는데, 앞의 이야기에 나오는 교인들은 그걸 전혀 모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은혜는 받는다고 하면서 말씀은 모르는 성도>, <말씀은 몰라도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성도>, 이런 사람은 가장 수준이 낮은 초등학생 같은 성도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말씀을 제법 많이 아는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선생님들에게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예배에 많이 참석해서 설교도 많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성경 10독 이상은 했습니다. 상당히 많은 중요구절을 암송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성경퀴즈 대회를 하면 단골 선수로 출전합니다. 그리고 10문제 중에서 적어도 8문제 이상은 맞출 수 있습니다. 어깨가 으쓱합니다. 우리 중에 이런 분들이 많이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 대표로 성경퀴즈 대회에 나가곤 했습니다. 입상도 많이 했습니다. 신학대학원 입학할 무렵에는 성경을 제법 많이 읽었습니다. 저희가 입학할 때는 성경 시험이 어려웠습니다. 오지선다형 200문제, 단답형 50문제, 그리고 요절을 암송해서 쓰는 문제가 10문항, 그리고 그 요절이 어느 성경 몇 장, 몇 절에 있는지 알아맞히는 문제 10문항, 이래서 총 400점 만점 짜리 시험을 치렀습니다. 저는 그 시험에서 오지선다형 세 문제를 틀린 것 외에는 모두 정답을 썼습니다. 심지어는 문제가 잘못 출제된 것을 찾아내서 시험지 여백에 그 틀린 부분을 적어 놓았습니다. <이새의 아들이 몇 명인가>라는 문제가 나왔는데, 보기 다섯 개 중에 답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문제는 잘못 출제되었음. 답이 두 개임. 사무엘상 16장에는 여덟 명으로 되어 있고, 역대상 2장에는 일곱 명으로 되어 있음. 확인하고 출제하기 바람>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이 시험을 위해 요절을 불과 4일만에 500개나 외웠습니다. 여러분, 이쯤 되면 성경을 제법 많이 알지요? 

그러면 성경을 많이 알면 훌륭합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 자르시니>라고 하는 사람보다 훨씬 낫습니다. 성경도 잘 찾을 수 있지요. 요즘엔 성경구절이 화면에 나오지만, 예전에는 각자가 찾아 읽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찾아 읽는데, 자신만 못 찾아서 성경봉독이 다 끝나도 못 찾고, 아예 설교가 끝날 때까지도 못 찾는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성경을 많이 알면 장점이 많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면 설교가 잘 이해됩니다. 그러나 성경 내용을 모르면 설교를 들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성경을 많이 알면 남에게 잘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들은 늘 맞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우님들이 말씀을 더 풍성하게 알게 되길 원합니다. 이를 위해 말씀을 많이 읽으십시오. 설교를 집중해서 들으십시오. 말씀을 많이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의 지식이 많은 사람도 최고는 아닙니다. 그는 중학생 정도에 불과합니다. 말씀 지식이 많은 사람에게는 결정적 맹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을 보면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모르는 사람을 깔보게 됩니다. 성경 지식이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이 악하게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동방의 박사들은 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왔지만, 왕이 어디서 나셨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헤롯의 궁궐에 가서 물었습니다. 그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구약성경 미가서 5장 2절을 알고 있었고,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박사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 대단하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은 베들레헴에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메시아를 기다렸고, 게다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으니, 당장 달려갔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헤롯이 주는 부귀영화에 취하여 다른 왕은 필요 없다고 여겼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말씀 지식은 헤롯에게 악용되었습니다. 헤롯은 박사들에게 아기를 만나면 자신에게도 알려주어 경배하게 해 달라고 말했는데, 이는 탄생한 왕을 죽이려는 속임수였습니다. 결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말씀 지식만 있었을 뿐, 지식대로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지식은 결과적으로는 헤롯을 돕는 악한 지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후에 헤롯은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지식은 죽은 지식이었습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여우는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기 사자가 어린양과 함께 한다는 말은 있지만. 여우가 까마귀와 함께 논다는 말은 없습니다. 게다가 까마귀를 잡아먹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까마귀는 성경을 악하게 이용하는 사람의 상징입니다. 

여러분, 이게 지식의 한계입니다. 지식은 정보를 주지만, 사람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대학교수가 아버지를 죽이기도 합니다. 현대는 지식 사회로서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지만. 사람들은 불행해지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아무리 많이 읽고 알아도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겨우 중학생이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요? 그 다음 단계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1편 2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을 설명하면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의미를 깊이 마음에 새기고, 생각하고, 되새김질합니다. 묵상합니다.  

처음에 말씀을 대하면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꾸 묵상하면 그 의미가 서서히 분명해집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필름 현상과 같다고 했습니다. 요즘은 디지털 카메라가 대부분이지만. 예전에 필름에 찍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암실에서 필름을 현상할 때 먼저 화학약품을 담은 큰 쟁반에 필름을 넣습니다. 그리곤 필름 위의 영상이 분명해 질 때까지 그 쟁반을 앞뒤로 흔듭니다. 그렇게 계속하면 서서히 영상이 나타나 시간이 흐르면 또렷하게 나타납니다. 

성경 말씀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그 의미를 점점 분명히 알게 됩니다. 숨어 있는 속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글자와 글자 사이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점점 말씀의 맛을 느끼게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말씀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깨닫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가 됩니다. 정욕적으로 살았던 다윗의 죄가 자신의 죄처럼 느껴집니다.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도망하던 요나가 자신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가 자신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두고 거짓을 행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신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세상을 사랑해서 떠난 데마가 자신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회개가 터져 나옵니다.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의 심령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그러면서 말씀에서 힘과 위로를 얻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말씀을 통해 극복하게 됩니다. 성경의 그 많은 말씀 중에서 인생을 뒤집고, 일평생 붙들고 살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를 변화시킨 한 절의 말씀>을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이쯤 되면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달게 느껴집니다. 그리하여 다윗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시편 19편 7-10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가 이런 기쁨에 이르게 되길 기원합니다.  이렇게 되면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쯤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다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이것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이런 사람은 몽상가가 되기 쉽습니다. 늘 기쁘고, 만족하고. 늘 주님과 동행하는 것 같습니다만, 현실감이 떨어집니다. 결정적인 것은 현실적 책임의식이 결여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위 믿음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늘 성경을 묵상하고, 회사에서도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말씀을 늘 설명해 줍니다. 전도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기피 대상이 됩니다. 별종 취급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비행기 안에서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한 구절 읽고는 눈을 감고 묵상하고, 한 구절 읽고 또 묵상했습니다. 옆자리의 남자가 비아냥거리면서 물었습니다. <이봐요. 그 책에 써진 얘기를 다 믿수?> <그럼요, 이건 성경이에요.> <그럼 고래 안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도 아슈?> <요나를 말씀하는군요, 그럼 알지요. 근데 성경에는 고래가 아니라. 큰 물고기라고 되어 있지요. 좀 정확히 아셔야지요...> <어쨌든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슈?> <글쎄요... 나중에 천국에 가면 물어보죠, 뭐.> 그러자 그 사람이 또 말했습니다. <그 요나란 친구가 천국에 없으면 어쩔꺼유?> 그러자 기독교인은 가소롭다는 듯이 다시 성경책을 펴며 대답했습니다. <그럼 선생이 나중에 물어보시면 되겠네요.>  

여러분, 무슨 말인지 아셨습니까? 잘 모르신다구요.... <요나가 천국에 없으면 지옥에 있을 테니, 선생이 후에 지옥에 가서 물어 보라>는 저주였던 것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런 식으로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교인에게서 무슨 정중함이나 예절이나 상대방에 대한 따스한 배려가 느껴집니까? 아마 상대방은 <그래 예수쟁이, 너나 잘 믿고 천국에 가라. 나쁜 놈!> 이렇게 욕할 게 뻔합니다. 

예전의 수도원이 그랬습니다. 수도사들은 수도원의 높은 담장 안에서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묵상은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나가서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신만 만족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지식, 풍성한 묵상은 현실의 삶과 너무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은 욕을 먹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을 알고 묵상은 하는데,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책임의식이 없습니다. 충성해야 하다는 것은 알지만, 회사 일에 충성하지 않습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동료들에게 밥 한 그릇 제대로 사지 않습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회사 사무용 볼펜을 집에 가져갑니다. 할 일이 남았는데, 교회 핑계 대고 먼저 퇴근합니다. 그가 부모에게 잘못하는 게 동네에 소문이 납니다. 사람 대하는 태도가 건방져 보입니다. 혼자만 똑똑한 것처럼 행동하기 쉽습니다. 이러다 보니 사람들이 손가락질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최근에 불거져 나온 교회들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알고 계시지요?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 중직자들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아시지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말씀을 알고 묵상하고, 감동 받는데, 문제는 그 말씀대로 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생활은 변화가 없고, 삶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게 문제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깨우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아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온유함으로 받는 것입니까? 22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아멘.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알기만 하고 지키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위선입니다. 

또 25절을 보세요. 참 자유가 어디서 올까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아멘. 여기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율법은 족쇄처럼 우리를 묶는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율법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율법의 말씀대로 하면 자유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운전하다가 교통법규를 위반했습니다. 그 때 경찰이 있으면 그의 마음은 긴장합니다. 경찰관이 부르면 가야 합니다. 자유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법규대로 지킨 사람은 경찰관이 백 명이 있어도 끄떡없습니다. 그는 자유입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8장 32절은 말씀하기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의 진리는 알고 있는 지식으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삶 속에서 실천되는 진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 실천의 마지막 예로 경건에 관해 말씀합니다. 여러분, 참 경건은 무엇일까요? 2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아멘.  

참 경건은 말씀을 많이 아는 게 아닙니다. 참 경건은 말씀을 많이 묵상하는 것으로도 안 됩니다. 참 경건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실천, 자신을 지켜 더러운 삶에 물들지 않도록 정결하게 지켜나가는 삶, 이게 경건입니다. 경건은 지식이 아니라. 삶이요, 생활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8절을 보면 지식은 때가 되면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아멘. 여기서 지식이란 말씀의 지식을 말합니다. 지식도 끝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자식이 어머니를 존경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식이 많이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이 땅의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의 사랑이 자식을 감동시켰습니다. 어머니를 존경하는 자식의 마음에는 어머니가 학교 문턱에도 못 가 봤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됩니다. 어머니의 무식, 유식은 이미 의미가 없습니다. 단 하나,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하셨다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대로 사십시오. 오늘 설교 제목인 <말씀생활>을 풀어 보면 <말씀이 곧 생활이 되어야 한다>, <말씀대로 사는 생활이 진정한 생활>이란 의미입니다. 말씀이 생활화될 때 우리는 진정한 성도가 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20절에서 다음과 같이 당부했습니다.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말과 거짓된 지식의 논쟁은 버려야 합니다. 지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미 도를 터득한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생활 속에서 실천되는 말씀만이 <살아서 역사하는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25절 끝의 말씀처럼 우리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말씀생활에 성공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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