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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메시야를 만난 여인 (요 4: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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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야를 만난 여인 (요 4:3-26)


이스라엘 나라는 끝에서 끝의 거리가 500리입니다. 남북으로 길게 생긴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 이름을 셋으로 나누는데, 맨 북쪽 지역이 갈릴리, 중간이 사마리아, 남쪽이 유대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 일행이 남쪽 유대 땅에 왔다가 북쪽 갈릴리 지방으로 가는 도중 중간 지점인 사마리아 땅에 왔을 때 잠시 생긴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지방은 지리적으로 역사의 상처가 있는 지역이라서 일종의 피해지역이 되었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해석이 됩니다. BC 720년 앗시리아 제국의 침략을 받아서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앗시리아 정부는 이 사마리아 지역을 점령한 다음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자존심 두 가지를 꺾는 정책을 폈습니다. 하나가 종교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고집하는 유일신 개념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는 대목 중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가지 말고 이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워 줄 테니까 여기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라.” 이렇게 정책화하였기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렇게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신전에서는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앗시리아 종교인 바알 예배도 병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지 바알 신을 섬기는 것인지 모르는 이상한 것을 만들므로 유대인의 유일신 사상을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인종 혼합 정책을 썼습니다. 유대인들은 가장 심한 인종 편견의 문화를 갖고 있는데 종교적 이유 때문에 “우리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은 그렇지 아니한 이방 족속과 절대 구분해야 된다.” 이런 인종 문화를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으니까 이것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혼합 정책을 써서 막 결혼을 시키는 제도를 썼습니다. 보름 전에 본 교회 이스라엘 선교사인 제이 선교사와 부인이 찾아오셔서 만났습니다. 제이 선교사는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결혼은 한국 여자와 했습니다. 뭐가 제일 어려우냐고 질문하니 가는 데마다 나를 이상하게 말하는 것이 “너 왜 아브라함의 후손이 한국 여자와 결혼을 해서 선교사를 한다고 여기에 와 있느냐?” 그러는 것이 제일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모님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겠습니까? 실제로 그렇습니다. 앗시리아는 정책적으로 국제결혼을 다 시켜버려서 인종을 다 섞어놨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다른 지역 사람들은 다 멸시해 버렸습니다. 

죽음으로 사수할 것이지 앗시리아 정책에 말려들어가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상종을 안했습니다. 오늘 여기 예수님이 물 길러 온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하니까 금방 반응이 나오지 않습니까?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합니까?” 그리고 해석을 달아놓았습니다.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 이러라.” 이런 역사가 약 400년 갔습니다. 말도 안하니까 상업 거래도 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거래는 더욱 안했습니다. 가장 심한 일이 일어납니다. 사마리아 땅도 밟기 싫다고 2배나 되는 거리를 돌아서 다녔습니다. 

이러한 긴 역사의 민족의 고통 문화를 오늘 예수님이 개혁해 버리는 겁니다. 사마리아를 통과 안할 수 있는데 오늘 4절에 예수님 일행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일부러 그러신 겁니다. 수가성이라는 동네를 지나가다가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때가 6시라고 했는데 우리 시간으로 낮 12시입니다. 제자들이 아마 시장하니까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로 들어갔고 예수님이 혼자서 우물가에서 쉬고 계실 때 그 동네에서 사는 한 여인이 우물을 긷기 위해 왔기 때문에 예수님과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우물은 야곱의 우물이라고 했습니다. 또 우물이 아주 깊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 시대에 판 우물은 그때까지 약 1800년입니다. 긴 역사가 지나갔는데 이 유대 나라는 물 전쟁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우물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우물에 가서 옛날에 길이를 재본 사람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 한국 우물의 10배가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나라에 가면 우물 관광지가 있습니다. 아예 옆의 계단을 만들어서 10층 높이만큼 내려갑니다. 

그러면 그 속에 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통로를 통해서 나가게 되어 있는데 가보신 분들 많이 계실 겁니다. 저도 갔다 왔습니다. 이 물 전쟁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제일 부러워하는 것이 강물입니다. 옛날에 박정희 대통령 때 워커힐에 묵은 이스라엘 정부 관리가 아침에 워커힐에서 잠을 자고 내려다보니까 한강물이 산더미 같은 겁니다. 또, 그때 마침 장마가 졌을 때입니다. “이게 물이 아닌가?” 

그래서 자기가 막 뛰어 내려가서 구경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은 한국 정부가 초청한 이스라엘의 기브스 농장 책임자이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농장을 경영했느냐?” 그것을 한국에 보급하려고 정부가 초청한 것입니다. 그 분은 “내가 한국에 와서 가르쳐 드릴 거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물이 없기 때문에 기브스 농장을 하는 것이지 이렇게 물이 많은 나라가 무슨 기브스 농장이 필요합니까? 하나도 필요치 않습니다. 이 대한민국은 한강 물줄기 하나만 가져도 부강한 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 하시고 그냥 가신 적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해석하려면 우선 물 길러 온 여자에 대한 궁금증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이 여자는 지금 낮 12시에 지금 이 우물을 찾아왔습니다. 여기 요한이 이렇게 시간을 밝힌 것은 그 자체가 매우 이상한 일이기 때문에 시간을 밝힌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물을 길으러 다닐 때 두 가지를 사용합니다. 하나는 가죽 부대이고 하나는 물동이입니다. 가죽 부대는 멀리 갈 때 물동이는 가까운 거리에서 사용합니다. 그런데 물을 긷는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아침 해 뜰 무렵, 아니면 해 질 무렵입니다. 사막이기 때문에 낮 12시는 다 낮잠을 자는 시간입니다. 

우리나라는 낮잠 자는 시간이 따로 없습니다. 자고 싶으면 자고, 말고 싶으면 말고, 또 점심시간 한 시간 쉬었다가 오후에도 그냥 일합니다. 그러나 이 사막 국가들은 낮에는 거의 다 잠을 잡니다. 밤과 같이 잠을 잡니다. 낮 12시에서 오후 3시까지 거리에 사람이 한명도 없습니다. 그런 나라들이 아주 수두룩합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다 쉬는 시간인데 이 여자 혼자서 이렇게 여기 낮 12시에 물을 길으러 오다니 이 여자가 사람을 피하는 기피증에 걸렸나?’ 하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 여자는 과거에 남편이 5명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남편도 정식으로 결혼한 남자가 아니고 동거남이라고 예수님이 밝혀냈습니다. 그러니까 이 조그만 시골 동네에서 이 여자는 아주 소문난 여자이고 심심풀이 말장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소재로 재미있게 말할 때는 그 대상의 과거가 험악하고 요란할수록 더 재미가 있습니다. 

LA타임스에 어느 날 사진과 함께 크게 신문에 기사가 났습니다. “마침내 그린 울프 씨가 88세로 리버사이드 요양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누구인가? 29번 결혼하신 분입니다. 놀라지 않으시는 걸 보니까 많이 접하신 기사인가 보네요. 그런데 “29명의 아내가 장례식에 한명도 나타난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신문에 아주 크게 났습니다. 기자가 간호사에게 그가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하더냐고 물었더니 “마지막 말은 이렇게 하셨습니다. 

내가 이다음에는 다이애나와 결혼하려고 했는데…. 그러면서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기네스북은 세계 역사에서 결혼 최고로 많이 한 사람은 사우디 국왕 중의 하나인데 300번 했다고 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교인 집사님 가운데 최고 많이 한 사람 결혼 네 번하신 여 집사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한번하고 두 번하고 세 번하더니 네 번째는 간 데로 또 가시더라고요. 그런데 아주 행복하게 잘 사십니다. 

유대나라의 유대관으로서 이 여자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됩니다. 그런 과거를 이미 지녔습니다. 이 여자는 이제 자신의 과거 때문에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조차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시간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 여자는 유대나라에서는 결혼 많이 한 것으로 기록 보유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를 평가해 볼 때 두 가지 방향이 있다는 것도 우리가 염두에 두어 두어야 합니다. 하나는 ‘아주 품행이 좋지 않은 바람잡이 여자인가?’ 이렇게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여섯 번째로 했는데 상직적인 판단으로 나쁜 점수를 주는 것이 대다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대나라의 이혼 문제를 보면 이 여자는 너무나도 불쌍한 피해자일 수도 있습니다. 모세율법에 나옵니다. “이혼하려면 이혼증서를 써줄 것이요” 이것을 휴서라고 합니다. 유대남자들이 여자를 아주 잘 버립니다. 살기 싫다고 하면 아무 이유나 갖다가 붙입니다. “음식 솜씨가 나쁘다, 잠버릇이 나쁘다, 걸음걸이가 이상하다, 질병 소유자다, 말 함부로 한다, 이웃과 다투기 좋아한다, 못산다.” 아주 심합니다. 

그런데 쫓겨나는 여자는 남자가 증서 하나를 써 주어야 합니다. 그 증서는 이 여자는 죄가 있어서 이혼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혀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한 장을 가지고 쫓겨나면 다른 남자가 그 종이를 보고 재혼해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남자들이 악해서 휴서도 안 써주고 그냥 내어 쫓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말하는 겁니다. “이혼증서를 써줄 것이요. 새롭게 살아갈 길을 열어주면서 버려야지 그냥 버리면 되느냐?” 그래서 그 율법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지금 나쁜 남자들의 수없이 많이 피해를 받아온 불쌍한 여인일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 여인은 공교롭게도 오늘 예수님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런데 대화의 내용이 도저히 예수님을 뿌리치고 갈 수가 없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 예수님이 어떤 개인을 만나 가장 길게 대화한 것이 이것입니다. 왜 도망가지 못하고 붙들렸는가? 자신의 과거를 다 말했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 남자는 누구인데 내가 일생 살아온 모든 과거 경력을 이렇게 분명하게 알 수가 있는가?’ 그래서 아주 깜짝 놀라지 않습니까?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예수님이 자기를 대하는 모습에 빠져들어서입니다. 사실 이 여자는 남자 경험이 많지 않습니까? 남자 심리 전문가라고 해도 좋을 만큼 경력이 화려합니다. 남자가 쳐다보는 눈빛만 봐도 저 남자가 나한테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아차릴 수가 있고 남자가 말 한마디 건네는 것을 봐도 속을 다 들여다볼 수 있는 경험이 넉넉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를 대하는 이 순간에는 자기가 도저히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만나온 어떤 남자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진지하고 거룩하게 인격대우를 하는 그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보통 남자는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선지자가 이렇게 하지 누가 이렇게 하겠습니까?” 자기가 먼저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제 고백입니다. 제가 어디를 가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때 제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그분들이 듣고 보실 겁니다. 그런데 제일 반가운 소리는 “목사님 아니세요?” 이게 저는 너무 좋습니다. 목사라고 안 그랬는데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지자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고백했습니다. “당신은 선지자이십니다. 선지자가 아니면 이렇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대화의 소재는 주제가 바뀌지요? 예배 문제로 들어갑니다. 

이 예배 문제에 있어서 이 여인은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리심 산이 예배 처소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런데 뭐가 갈등이냐? 이 그리심 산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것인지 아닌지, 우상숭배 성전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혼합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자신의 신앙 걸림돌이 그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오늘 말씀에 그랬잖아요? 주님은 무슨 대답을 하십니까? “이 산에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배는 장소가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예배의 대상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오랫동안 담을 쌓고 불필요한 신경을 쓰면서 살아온 사마리아와 유대를 통합시키는 신앙의 개혁 운동을 오늘까지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했지 않습니까? “당신은 유대인 남자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겁니까?” 400년 동안 다투고 말 걸지 않았던 것을 지금 열어서 예수님이 과감하게 사마리아로 들어가시고 이 여자도 예수님의 말씀에 문을 안 열수가 없었습니다. 

이쯤 되니까 이 여인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돌아갑니다. “앞으로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복잡스러운 이 모든 민족의 해결해 주실 것으로 그렇게 나는 믿나이다.” 그의 메시야관이 나타났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 사상을 이해하려면 지금 우리들을 보면 됩니다. 지금 전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이 똑같이 믿고 기다리는 신학 사상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이 부분은 모든 신학이 동일합니다. 

온 세계, 어느 교회나 어느 인종, 기독교는 다 똑같습니다. “내가 다시 오겠다.” 이 말씀에 대해서 의심은 안합니다. 이후에 종말적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의 왕 재림 다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지금 우리가 재림 주를 기다림과 똑같이 당신은 초림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신 방법이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이 말하지 않습니까? 

“너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네가 어떻게 메시야가 돼? 나사렛 같은 빈민굴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네 형제들, 누이들이 모두 우리의 친구가 아니냐? 너는 블루칼라의 직업을 가진 목수 노동자가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네가 메시야가 돼?” 초림 메시야가 나타나는 모든 예언이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초림 메시야는 처녀 잉태가 될 것이며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며 나사렛에서 살 것이며 다윗 가문에서 오실 것이며 고난의 종이 될 것이며 죽을 것이다.” 다 예언되어 있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은 예언되어져 있는데도 메시야가 이 땅에 그렇게 오실 리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기다리는 재림 메시야의 모습으로 초림 예수를 기다렸습니다. 천사장의 나팔로 구름을 타고 심판주 만왕의 왕으로 오시겠다고 주님이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온 인류와 함께 바라보는 메시야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으로 초림 예수를 기다렸으니까 나사렛 예수를 믿지 못하는 겁니다. 

이제 이 우물가의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발전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너에게 복음을 주겠다. 내가 그로라” 그랬더니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여인은 지금까지 대화의 모든 전개가 메시야로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아! 그래서 나를 그렇게 아셨구나!’ 그래서 이 여인은 어떻게 됩니까? 정신 나간 여자와 같이 변해버립니다. 본래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물 길으러 왔지 않습니까? 그런데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갑니다. 

우리 기독교의 가치 발견은 그겁니다. 베드로, 안드레도 주님을 만났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최고의 인생의 가치를 발견했을 때 다른 것은 무시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자기의 모든 재산을 정리해서 그것을 샀느니라.” 하나를 발견하고 다른 것은 다 무시해 버립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 최고의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낮에 낮잠을 자고 있는 동네로 돌아가서 소리를 쳤습니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모두 와서 내가 만난 메시야를 와 보라.” 여러분, 가끔 가다 영어로 “Come and see!” 전도할 때 많이 붙입니다. 이 여자가 말합니다. “네가 누구를 만났다고?” “메시야!” “어떻게 네가 메시야를 만나?” “와 보라. Come and see!” 아주 굉장한 전도 방법이 되었지요? 요한복음 1장 39절에 예수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니까 예수님이 직접 “와보라. 그리고 네가 결정해.” 그다음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때 나다나엘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때 빌립이 뭐라고 합니까? “Come and see! 그러면 네가 와서 보라. 그리고 결정해.” 

그리고 오늘 말씀 사마리아 여인의 증거! “네가 뭘 어쨌단 말이야? 너는 우리 동네 소문난 여자 아니야? 네가 뭘 어떻게 했단 말이야?” “Come and see! 와 보라.” 우리 최고의 전도 방법은 이것입니다. “예수 믿는 거 어떻다는 거야?” 설명하지 말고 “한번 교회 와 봐. 그리고 당신이 결정해.” 이것이 우리 전도 방법입니다. 결국 이 사마리아 땅은 그 동네에서 제일 왕따 당하던 부정한 취급의 이 여인 하나를 통해서 예수님이 소개가 되었고 복음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말씀 계속 읽어 내려가면 30절에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다 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정리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쓰셨던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사마리아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왜 예수님은 그 동네에서 왜 왕따 취급을 받는 이 여인을 쓰셨는가? 유대 나라에 그렇게 여인들이 많은데 왜 창녀 출신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는가? 구약 성경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어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디로 가라고 명령하셨는데 그 보낸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3년 6개월 동안 닫혀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그렇게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사람의 상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4장 39절에 가보면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이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거함으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아니, 그 사람을 네가 처음 만났는데 어떻게 되었다고?” “나를 보자마자 여러분이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과 똑같이 나의 일생에 대해서 그가 말했도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내가 그로라. 메시야라고 밝혀주셨습니다. Come and see! 와서 그와 함께 이야기해 보십시오.” 그렇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 여자의 말이 “내게 한 모든 것을 그가 말했다 하므로 그 동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지라”로 오늘 말씀이 정리가 됩니다. 

이 여자의 밝히고 싶지 아니한 과거가 지금은 복음 전도에 유익하게 작용했음을 밝혀주는 대목입니다. 죄는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면 부끄러운 많은 과거의 죄도 은혜로 발전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간증 집회 부흥사들은 다 깡패 출신들입니다. 과거가 요란하고 험악할수록 간증은 좋더라고요. 나 같은 사람은 간증할 것이 없습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 다녔으니 “자기만 다녔나? 나도 다녔다.” 이렇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서울역의 암흑가의 왕자였습니다.” 그러면 눈이 둥그레집니다. 죄는 부끄럽지만 예수를 만난 이후는 과거의 죄도 은혜로 연결이 되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르쳐주고 있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제가 지금 열심히 설교하고 있지요? 목적은 하나입니다. 아직 예수를 만나지 못한 영혼이 예수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겁니다. 예수를 만난 자는 과거에 남편 다섯이 있든지 말았든지 모두가 다 하나님 사역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요한이 밝혔습니다. 이 여자는 물 뜨러 왔다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생수를 얻었습니다. 

성경에는 이 여인의 그 후 생활을 기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평생을 통해서 어떻게 살았을까?’ 가는 곳마다 오늘 겪은 이 이야기를 간증했을 것입니다. 예수를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다 죽었을 것이며 아마 보이지 않는 제자로 예수님을 그때부터 따랐고 예수님 부활하신 후에도 주님의 제자가 되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주님은 마지막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유대니즘에 사로잡힌 제자들을 향해서 교육적 설교를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제부터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그때 예수님은 사마리아 단어를 꼭 쓰셨지 않습니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너희들 머릿속에 있는 편견을 버리고 사마리아를 품에 안아라. 그리고 땅 끝을 향해서 가라.” 이렇게 되었습니다. 400년 막힌 담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가 대화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쓰심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다 똑같지는 않지만 우리가 처한 상황과 내가 가지고 있는 경력에 의해서 쓰임 받습니다. 여러분! 모두 다 이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사역에 쓰임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사마리아 여인이 쓰임을 받고 하나님의 역사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던 오늘의 말씀을 기초로 해서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역사에 똑같지는 않지만 쓰임 받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삶의 과정이 주님을 만날 때 변화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주님을 만난 자가 가아할 길이 무엇인가? “Come and see!” 이렇게 전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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