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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엡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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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엡 3: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 3:16)

영국에 '줄리안 모리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미아가 되어서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느 굉장한 부자집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져서 막대한 유산을 받게 되고 졸지에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부자가 되고 나서도 걸인 행세를 지속하는 유별난 행동을 했습니다.  날이 밝으면 걸인의 옷차림으로 비누, 샴푸, 좀약 같은 것을 집집마다 팔러 다녔습니다. 그러다가도 한 달에 한 번쯤은 자기 소유의 최고급 리무진을 타고 런던의 초호화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했습니다. 1년에 한 두 번은 파리를 비롯한 구라파의 다른 도시들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튿날이면 다시 비누와 샴푸를 팔러 다녔습니다. 그는 그런 생활이 좋은 것입니다. 좋다기 보다는 그런 거지생활이 자기에게 맞았던 것입니다. 다 떨어진 남루한 옷차림, 초점 없이 방황하는 눈동자를 보면 그는 영락없는 거지 중에도 상거지인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순간에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왕자다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주께서는 엄청난 하나님의 기업을 약속하셨기에 우리는 감격해 하며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는 그분의 아들 딸, 곧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구체적인 삶의 장에서 무력해 하고, 좌절하고, 방황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연약한 모습 영락없는 탕자 신세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회복하는 놀라운 삶을 제시하며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속 사람'은 인간의 '영', '마음', '이성과 의지가 활동하는 인격'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속 사람'은 '겉 사람' 즉 육체에 속하여 부패한 사람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롬7: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고후 4:16)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사람들은 겉 사람을 치장하는 데 일평생을 보냅니다. 집이라는 겉치장, 자동차라는 겉치장, 옷이라는 겉치장, 화장이라는 겉치장, 여기에 일평생을 보냅니다. 돈도, 관심도, 여가도, 정렬도 다 쏟아 붓습니다. 그러나 정작 속사람을 가꾸는 데는 소홀합니다. 

몸도, 집도, 차도, 장신구도, 취미생활도, 수집품도 종래에는 다 벗어 버릴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만은 영원을 갑니다.  영원과 접촉된 것은 우리의 속사람뿐입니다.  천국에 가지고 갈 것도 우리의 속사람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겉 사람에 집착합니다. 겉 사람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겉 사람의 멋있음에 힘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겉 사람만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옷이 화려 찬란하다고 그 사람이 건강하지는 않습니다. 옷이 멋있어 보인다고 그 사람 속사람의 인격도 멋있지는 않습니다. 옷이 향기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속사람이 향기나지는 않습니다. 옷을 한 평생 입는 사람은 없습니다. 옷을 자주 갈아입습니다. 옷은 벗어버릴 것입니다. 한 가지 옷을 평생 입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옷은 그저 소모품입니다. 자주 갈아입습니다. 입고 버릴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라서 더 많이 갈아입습니다. 춘추복, 하복, 추동복 이렇게 옷이 세 계절로 분류되어 나옵니다. 한 계절에 열 벌이라도 서른 벌은 됩니다. 평생을 따지면 아마 수백 벌은 갈아입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속사람의 갱신과 변화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삽니다. 그 만큼 속사람의 모양새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삽니다. 

젊은이들 겉 사람만 보고 열광하고 무시합니다. 그러면 평생 고생입니다. 겉 사람만 보고 결혼하면 평생을 두고 후회하는 수가 생깁니다. 겉 사람도 좋고 속사람도 좋다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그러나 겉 사람은 번지르르하고 키 크고 늘씬한데, 속사람이 볼품없고 왜소하고 추하고 냄새난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래등 같은 기와집, 그림 같은 별장 안에 쓰레기 오물로 가득 찼다면 들어 갈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현대식 화장실인데 오물로 넘쳐난다면 사용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많다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멋있어야 합니다. 속사람이 새로워야 합니다. 속사람에 집중해야 합니다. 속사람 다이어트하고, 속사람 화장하고, 속사람 꾸미고. 속사람 향내 내고 그렇게 거꾸로 속사람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겉사람이 강건하여지고 하지 아니 하고 속사람이 강건하여지고 라고 합니다. 참된 사람은 속사람이 강건하여 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속사람이 강건하여 지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속사람이 강건하여 지는 사람입니다.

속 사람의 강건은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이루어집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안전한 행위를 시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모든 속성 즉 사랑과 은혜, 지혜의 무한함과 영원함을 포함합니다.

열등감을 희망으로 바꾼 오바마 이야기라 합니다. 오바바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케냐 흑인 아버지와 미국 백인 어머니는 이혼을 하게 되는데 나중 알게 되지만 아버지는 케냐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술을 마시며 살게 되고, 종국에서 교통사고로 죽게 되었다 합니다. 어머니는 인도네시아 사람과 재혼을 하게 되고, 그 곳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미국에 와서는 백인 외할머니 밑에서 자랍니다. 자기 정체성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어디 가나 차별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동네 할머니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그 할머니가 짜증을 내며 웬 흑인이 자신을 해코지 한다며 경비원에게 신고를 하여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 마다 오바마는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어느 하나 자랑할 만 것이 없는 불량 청소년이 되어 혼돈의 나락으로 빠지느냐, 세상을 상대로 자신을 단련하며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느냐의 기로에서, 어머니의 도움으로 그는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기로 결단을 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속 사람의 강건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의 기업을 누리게 되는 줄 믿습니다.

어느날 오후 다나와 리치는 상쾌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오게 될 것을 기대하며 자전거를 타러 나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인생은 영원히 바뀌어버렸습니다. 언덕을 내려가던 리치가 자전거 제어능력을 잃고 곤두박질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의 몸은 엉망이 되어서,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간신히 목숨만 붙어 있었습니다. 다나는 남편의 옆에서 정성으로 간호했습니다. 그는 혼자 먹을 수도 없었고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병원 밖의 나무 그늘에 그들이 같이 앉아 있을 때 리치는 아내를 바라보며  "다나, 내가 다시 걸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걸음마를 배우고 있어. 그리고 그것이 내가 진실로 바라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주먹을 쥐고 흔드는 대신, 리치는 손을 뻗어 하나님의 손을 붙잡은 것입니다. 

고난의 한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 관계야말로 가장 힘든 순간에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바라볼 때 비록 현실은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지만 소망을 가지며 낙심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기에 속사람이 건강하게 됩니다.

'속 사람'은 성령을 통해서 능력으로 강건해집니다.

'성령'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속 사람에 날마다 내주하셔서 역사하는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내주하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살전 1:5)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하나님의 그 모든 것을 성령님이 전달하시고 공급하여 주시게 됩니다. 이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속사람, 영혼이 건강하여지게 됩니다.  

어느 큰 회사는 쇠 드럼통에서 오염 물질을 뽑아내기 위해 흡입기를 사용합니다. 강력한 펌프가 통 속에서 물질들을 뽑아내는데, 작업하는 사람들은 이 펌프들의 힘을 조심스레 조절해야 합니다. 공기를 너무 많이 뽑아내면, 바깥의 압력이 통 안의 압력보다 더 커지기 때문에 그 드럼통들은 종이컵과 같이 오그라들고 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역경이나 고난이 우리 삶 속에 찾아올 때 하나님께서 내부로부터 힘을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바깥으로부터의 압력을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 또는 기독교인 친구들로부터 든든한 도움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를 견디게 하고 또 부서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는" (엡 3:16) 우리의 영적 속 사람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할 때 우리를 강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소홀히 하고, 주님과 대화 나누기를 꺼려하고, 다른 신자들과 교제하기를 그만둔다면, 우리는 약해지고 쉽게 상처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유혹이나 고난으로부터의 압력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우리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여, 인생의 불행이나 근심들이 우리를 짓눌러도 거기에 굴복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사기 6장의 기드온은 두려움과 의심과 피해의식과 열등감이 많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삿 6:15)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그런데 성령이 임하게 되자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 모아서 적군을 물리치는 큰 용사가 됩니다.(삿6:34)

성령님이 임하게 될 때 속사람은 달라지고 담대하게 됩니다. 

(욜 2:28)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현상과 현실을 넘어 꿈과 비전을 말하는 존재들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것을 말하지 않고, 긍정을 말하며, 사실을 말하지 않고 믿음의 전망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함으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하도록 해야 합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영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시며 하나님의 영과 연합된 영입니다.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이제는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있는 영입니다.
거룩한 생명으로 거듭나게 된 영이 우리의속사람입니다. 성령안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강건해 집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주의 영이 내게 함께 해서, 하나님의 영이 내 마음을 주장해서,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바람이 임의로 와서 어디로 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나 성령도 그와 같으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모르게 성령이 내 마음을 주장할 때, 성령이 내 마음을 지배할 때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심령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 보면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게 될 때, 그의 어두운 과거, 그의 나약함, 다 이기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은혜에 충만하여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누가 잡느냐 하는 것으로 삶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의 주도권을 인정하면서 성령 안에서 성령과 의논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며 살아가는 삶이 영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삶의 주도권을 자기 스스로 가진 사람은 성령님을 모시고는 있지만, 성령 안에 거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외면하고, 주님을 인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날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요, 무디어진 사람, 세상 중심으로 치우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에게 나의 전 존재를 맡기고 그의 인도하심을 순종하는 진정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매우 교인답게 행동하는 기능적인 교인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을 강건케 하느 내면적인 훈련에 관심을 두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속사람의 삶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이며,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실제적인 속사람의 삶은 그리스도와 일치된 삶을 의미하는데, 거룩한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과의 교통이며 우리 주님의 인격과 형상을 닮아 가는 것이요,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을 바르게 하며 열정적인 영성을 가져야 이 어려운 시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힘써 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는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우리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성령의 충만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 주셨기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아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었고, 지금도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므로 십자가의 사건은 바로 나를 위한 사건이 되었고, 나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지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속사람의 강건은 뿌리로 설명 합니다. 

벼랑 위에나 길가 언덕 위에 서 있는 나무는 뿌리가 다 드러나고 흔들흔들하여 보기에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무 또한 그 생명이 오래 가질 못합니다. 더욱이 그런 나무는 가지도 펴지 못하고 잎도 무성하지 못하며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많이 맺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옥토에 있는 나무는 열매도 좋고 가지도 무성하며 좋은 재목으로도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처럼 나무의 모든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그 나무의 뿌리가 단단히 박혀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무의 건강은 그 뿌리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 속사람이 든든히 서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속사람'을 사람의 뿌리에 비유한다면 좋은 옥토는 말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속사람이 말씀에 온전히 박혀 있고 그 말씀에서 영양분을 섭취할 때, 그 성도는 뿌리가 옥토에 든든히 박혀 있는 것과 같이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으며,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재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속사람이 옥토에 박힌 뿌리와 같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원리를 비유로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마 13:3-23). 즉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이 결실하여 많은 열매를 맺듯이 말씀을 듣고 깨달아 믿는 자만이 결실하여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거두는 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에 온전히 서야겠습니다. 그번 성회를 통해서 다시 한번 옥토에 뿌리내리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속사람의 강건은 좋은 집으로 설명 합니다

좋은 집을 짓는 데는 기술 좋은 건축자가 필요하고 질이 좋은 건축 재료가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견고한 터가 있어야 합니다.  마 7장에서 이에 대한 교훈을 얻습니다. 즉 지혜로운 자가 지은 반석 위에 집은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고, 비가 내려도 흔들리지 않고 튼튼히 서 있을 수 있으나 어리석은 자가 세운 모래 위의 집은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고 비가 내리면 다 무너지고 만다고 했습니다(마 7:24-27).

성도는 모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이 속사람, 곧 인격을 건축하는 자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로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고전 3:10, 11에서 말하기를 진정한 터는 예수 그리스도요 이 터 외에는 신앙의 터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성품과 인격을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말씀의 지시를 받아야 하고 거기에 충성스럽게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무장할 때 우리의 믿음은 견고해질 수 있으며 어떠한 환난과 유혹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만 우리의 신앙은 성장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번 성회를 통하여 좋은 집이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속사람의 강건은 사랑의 실천으로 설명 합니다.

요단강의 이름은 '내려간다'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요단강의 길이는 320km나 되며, 해발 2,850m 되는 헤르몬의 산기슭에서 시작하여 해면에서도 394m나 낮은 사해에서 끝이 납니다. 그러므로 요단강은 경사가 급한 강입니다.  또한 사해는 해면보다 394m나 낮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간 물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그 물은 태양열로 증발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짠물이 사해입니다.
받을 줄은 아는데 줄 줄을 몰라서 짠물이 된 것입니다. 물은 자고로 흘러야 합니다.

그와 같은 원리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예수께서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교훈하셨습니다. 자꾸 받기만 하는 곳에 부패가 있고 부정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사회가 썩어가는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줄줄 아는 사람이 모인 사회는 생명의 리듬이 있습니다. 활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주기 위해서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이 준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 가운데'를 특히 강조합니다.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을 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죄인이 구원을 얻었으며,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그에게 꿇어 경배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빌 2:10-11)

어떤 청년이 차 사고로 인해서 큰 충격을 받아서 그만 두 눈, 안구를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받게 될 때 의사는 말했습니다. "너무 출혈이 심하기 때문에 수술을 하겠지만 어차피 안구가 다 빠져나가서 눈을 볼 수는 없을 것일세"하고 말했습니다. 청년은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장님으로 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지 그런고로 나 수술하지 말아달라고, 이대로 죽을 것”이라고, 바락바락 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이 사람아, 생명은 소중한 것이야. 이 어려움을 극복해야지." 그리고 강제로 붙들고 마취를 하고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 몇 일 후에 붕대를 풀게 될 때 의사는 말했습니다. "축하하네. 자네는 분명히 실명을 했지만 자네를 위해서 안구를 기증해 주는 분이 있어 눈 하나는 볼 수 있을 것 같으네. 축하하네" 그랬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또 소리 질렀습니다. "애꾸눈으로 살기보다 죽는 게 낫지." 의사는 크게 청년을 책망을 했습니다. "자네를 위해서 멀쩡한 눈을 빼준 고마운 분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네. 무슨 망령된 발악인가?" 그러며 붕대를 풀어주었습니다. 뿌옇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점점점점 밝게 환하게 보이는데 눈앞에 서있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눈 하나가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청년은 여기서 큰 감격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저는 한평생 절대로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감사한 이 감격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어머니의 주는 사랑에 감격한 아들의 삶의 자세가 바꿔졌습니다. 성도들도 그와 같이 줄줄 알아야 건강한 속사람의 신앙인입니다. 줌으로써 이웃도 살리고 자신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속 사람의 강건을 나타내야 합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되고 뿌리를 옥토에 내리고 좋은 집처럼 반석위에 세움 받고 사랑가운데서 행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금번 성회를 통해 속사람의 강건함의 역사를 이루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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