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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신앙태도 (고전 9: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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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신앙태도 (고전 9:15-23)


얼마 전 이런 우수개 소리를 들었습니다.

한 할머니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원두막”이라는 삼행시입니다. “원/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두/ 두 쪽 다 빨개, 막/ 막 빨개” 이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 해 주려고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원두막” 첫 글자를 하나씩 불러보라고 했습니다. 

“원/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여기까지는 잘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그만 “원두막”을 원숭이로 착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숭”하고 두 번째 말을 불렀습니다. 할머니가 계속했습니다. “숭/숭하게 빨개“ 이번에 할아버지가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뭔가 잘못된 것을 알고는 ”이/ 이건 아닌데“

저는 오늘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이 할머니의 당황스러운 심경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건 아닌데...”

예수님께서 마 5:13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썩지 않도록 방부제 역할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 5:14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두운 그늘을 거두어 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소금 자체가 썩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빛 자체가 빛을 발하기 보다는 어두운 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건 아닌데...”라는 자조 섞인 탄식을 금치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신앙의 열심을 쫒다가 신앙의 태도를 바로 세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으로 열심을 내서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신앙적 열심의 결과로 많은 사역도 펼쳐왔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태도가 성숙해 지지 못해서 부흥했지만 많은 문제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태도가 미숙해서 많은 사역은 펼쳤지만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일에는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신앙의 태도를 성숙하게 바로 세우는 일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열심을 내는 일보다 신앙의 태도를 바로 세우는 일을 앞세워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한국교회 성도들이 신앙의 태도를 어떻게 바로 세워가야 할까요?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모범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의 진솔한 자기 고백입니다. 이 고백 속에 자기가 어떤 태도로 신앙생활을 해 오고 있는 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다음의 세 가지 점이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성숙한 신앙태도를 갖추고자 할 때 꼭 본받아야 할 점이기도 합니다.

첫째, 자기자랑을 삼가는 태도

바울은 16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바울은 정말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출신 성분이 남다른 사람입니다. 경건한 가문 출신으로 그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지키며 성장했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까지 유학 와서 당시 명문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모두가 가지고 싶어 하는 로마 시민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 믿게 된 후에도 자랑거리가 남다릅니다. 그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간 직접 주님께 그 누구도 받아 본 일이 없는 영적 훈련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의 신비한 영적 체험을 많이 했습니다.

더욱 대단한 것은 그만큼 열심히 복음을 전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말 많은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정말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도중에 정말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자랑거리는 다 배설물처럼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복음 전한 그 대단한 자랑거리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자기자랑을 삼갔습니다. 그리고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영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우선적으로 본받아야 할 점이 이것입니다.

자기자랑은 신앙생활에 심각한 독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먼저는 우리 개인의 영성을 고갈시킵니다. 우리가 자기자랑을 시작하게 되면 우선 감사가 사라지게 됩니다. 자기자랑은 “자기 때문에”를 말하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 때문에”를 약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감사가 은혜의 샘물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감사가 줄어들면 은혜가 점점 줄어들게 되고 결국 영성은 고갈되어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들에게 받은 은혜를 간증해 보셨습니까? 간증하신 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홀로 서셨을 때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많은 경우 간증이 자기 자랑으로 흐를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 마음이 공허하고 은혜의 샘물이 고갈되는 것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 앞에서 왠지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자기자랑은 다음으로 신앙공동체의 영성을 오염시킵니다. 신앙공동체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으로 충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은 빌 2:6-8 말씀에 명확하게 드러나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한 마디로 말하면 겸손의 영성이요 비움의 영성입니다.

그런데 신앙공동체 안에서 누군가가 자기자랑을 시작하면 신앙공동체 안에 가득 채워진 이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이 오염되게 됩니다. 마치 깊은 산속 1급수 맑은 시냇물이 축산 농가 곁을 지나면서 축산 폐수가 흘러들어와 오염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맑던 물이 마실 수 없고 물고기가 살 수 없는 더러운 물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한국교회에 이런 자기자랑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자기자랑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매스컴을 통해서 자기자랑이 하나의 상품으로 브랜드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개인의 영성이 고갈되어갑니다. 그리고 공동체의 영성이 심각하게 오염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바울의 신앙태도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16절 말씀처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분명히 자랑하려면 그 누구보다도 자랑할 거리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코 자랑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자기자랑을 철저하게 삼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권리주장을 삼가는 태도

바울은 18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바울은 자기가 권리가 있지만 이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권리가 있다는 점을 9:7-14에서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군인과 농부와 목동의 일반적인 예를 들어서 복음을 위해 큰 수고를 한 자기에게 상식적인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은 율법 조항 즉 신 25:4의 의 예를 들어서 주를 위해 수고한 자기에게 율법적인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셋은 성전에서 섬기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대가를 정당하게 받는 것처럼 자기도 대가를 받을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넷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근거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기에게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많은 수고를 했지만 거기에 걸맞은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많은 교회를 설립했지만 교회 설립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최고 수준의 영적 지도자이지만 지도자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남다른 독특한 전통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신을 벗는 전통입니다. 

룻 4:7-8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기업을 무를 권리를 가진 자가 보아스에게 그 권리를 양도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을 벗는다는 것은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약속의 표시인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종들에게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두 곳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출 3:5입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수 5:15입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 가까이에 당도했을 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명령의 핵심 메시지는 ‘권리포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권리포기를 명하셨을까요? 지도자가 권리를 주장할 마음을 가지게 되면 리더십에 사리사욕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앞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보다 자기 자신을 더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한국교회에 권리주장의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큽니다. 많은 교회들에서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자기 권리주장을 거세게 하는 소리들이 들립니다. 그리고 그 소리들이 충돌하여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스스로 그 갈등을 해소하지 못해서 사회법정에서 다투는 볼썽사나운 모습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을 벗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고, 교회 공동체 앞에서 신을 벗어야 하겠습니다. 권리를 포기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나도 살고 공동체도 살리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바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바울은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대신 권위를 세워주셨습니다. 남다른 주의 종의 권위를 채워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을 벗으면 하나님께서 대신 채우십니다. 비록 권리는 잃어버렸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권위를 세워주십니다. 목사로서의 권위, 장로로서의 권위, 성도로서의 권위를 채워주십니다. 바로 

셋째, 자원하는 태도

바울은 19절을 보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은 자기에게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롭게 선택할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는 그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출 36:2-5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왔으므로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중지하고 와서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성소를 지을 때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일할 사람을 선택했는데 그 기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원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자격도 경험도 실력도 필요하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자원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성소를 지을 때 사용한 물품 역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가져 온 것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심령을 찾으실까요? 우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때문입니다.

제가 장신대에서 강의할 때 종강시간이면 한턱을 냅니다. 학생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대개 피자를 배달시켜 나눕니다. 지난 학기 한 클래스에서 한 여학생이 피자 한 조각을 정성스럽게 접시에 담아서 맛있는 커피와 함께 제게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수님 맛있게 드십시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 마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제가 그렇게 마음이 좋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저는 피자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피자는 제가 산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키지도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는데 정성껏 준비해 온 그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이 좋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재능도 주셨고, 시간도 주셨고, 건강도 주셨고, 일할 기회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를 위해 일하겠다고 나서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공동체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남자 배우 중에 현빈씨가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씨크릿 가든”에서 까도남(까칠하고 도도한 남자)으로 주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현빈씨가 해병대에 자원 입대하겠다고 발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정치 지도자들까지 나서서 칭찬 일색입니다. 남들은 군대 가지 않겠다고 ‘일부러 치아를 뽑았느니’, ‘브로커를 통해서 편법으로 면제 받았는니’ 시끄러운 판에 그것도 해병대를 자원했다니 팬들을 더욱 행복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원하는 태도는 공동체의 여러 사람들을 더불어 행복하게 만들어줍니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성도들 가운데 자원하는 심령을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집니다. 십자가는 지려하지 않습니다. 해도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원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교회생활도 그렇고, 전도도 그렇고, 봉사도 그렇고, 헌금도 그렇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참 걱정입니다. 신앙의 열심은 있는데 신앙의 태도가 잘못되어 생긴 일들입니다. 이제 신앙의 태도를 올바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우선 자기자랑을 삼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권리주장도 삼가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자원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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